‘여론 형성 과정에서 자기 입장이 다수 의견과 동일하면 적극 동조하지만 소수일때는 나쁜 평가나 고립이 두려워 침묵하는 현상. 74년 독일 사회과학자 노엘레-노이만 발표'    대학 시절 신문방송학 전공 수업으로 접한 ‘침묵의 나선 이론(Spiral of Silence Theory)’은 당시 대중화된 연구였지만 20여년이 훌쩍 지나도 그닥 진부해보이지 않습니다. 정치권과 언론 환경의 격변 속에 이 이론은 여전히 민심을 들여다보다는 잣대로 기능하며 논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전통 매체인 TV,라디오,신문에 인터넷 포털과 페이스북같은 SNS까지 언론을 자처하는 지금 이 이론은 과연 민초(民草)들이 언로(言路)에서 더 민주적이고 더 주체적으로 바뀌었는지를 비춰볼 수 있는 선택 가능한 ‘거울’입니다.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가 몰고 온 촛불 혁명과 적폐 청산을 내건 새 집권세력의 등장은 2016~2017년의 대한민국 민심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이 과정의 민심에 ‘침묵의 나선 이론’을 들이대는 것은 결코 반감이 깃든 여론 해부가 아닙니다. 80%를 넘나드는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분명 놀랍고 자랑스럽지만 ‘국민의 뜻’에 담긴 의미를 좀 더 ‘기술적’으로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광우병 파동과 한미FTA 등을 보더라도 광장에서 피어난 민심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침묵의 나선 이론’을 실감케하는 무대는 이제 민초들의 저잣거리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의 여의도 정치권입니다. 그 중에서도 침묵이 소용돌이 친 상황을 넘어 ‘침묵 권하는 사회’가 돼버린 곳이 있는데, 바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입니다. 요즘 여당에서는 ‘당청 관계’란 용어 자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고있고, 취임 초기 밀월 기간이란 점을 감안하다손 치더라도 야당 시절 그렇게 비판했던 ‘거수기 여당’을 자신들이 오히려 자처하고 있는 것은 딱한 노릇입니다. 청와대의 위세 앞에 누구 한사람 쓴소리 한마디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딱 한번 추미애 대표가 인사권을 두고 청와대와 약간의 기싸움을 벌이다 꼬리를 내린게 전부입니다. '당청 일체' 기조가 깨진다면 지금의 완벽한 국정 주도권이 혹여 흔들릴까 걱정하는 판단이 깔린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박근혜 정부 ‘불통’의 교훈을 딛고 들어선 새 정부 트레이드 마크 ‘소통’은 ‘쇼통’이라 폄하하는 야당의 비판을 버텨내기 어렵습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수세적인 당청관계는 협치를 통한 개혁 입법 추진을 어렵게 할 것이란 우려마저 나옵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과 적에게 무기를 내줘 우리를 정복하게 하는 것은 결코 다르지 않다.(발타자르 그라시안/영웅론)"   여론의 눈치를 보는 침묵과 달리 ‘자아를 관리하는’ 침묵은 차원을 달리하는 긍정적 덕목입니다. 말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위 그라시안의 어록에서처럼 침묵은 정치적 효과를 발휘합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쏟아낸 ‘말 폭탄’으로 일촉 즉발의 전쟁 위기가 찾아온 한반도에서는 지도자의 침묵이 갖는 정치적 효과는 각별할 수 밖에 없을테죠. 그래서 취임 후 문재인 대통령이 쏟아낸 국정 개혁과 대외 정책의 수많은 메시지 가운데 북한이 넘지 말아야할 ‘레드 라인’을 규정하고 ‘개성공단 재개’를 언급한 것 등은 ‘적에게 무기를 내준 것’ 같아 보이는 대목입니다. 앞장서 말하기보다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게 문 대통령의 본래 성품이란 점에서 분별력 있는 침묵으로 대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계적 평화운동가인 틱낫한 스님은 세상을 치유하는 다섯가지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경청의 소리, 침묵의 소리’를 두 번째로 역설했습니다. 불교에서 불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관음보살도 '세상의 소리를 마음깊이 들어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론의 높은 지지를 업고 질주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소음으로 둘러싸인 세상 속 침묵의 소리에 귀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울러 침묵의 나선 속으로 숨어들었을지 모를 상당수 국민과 여당 의원들의 생각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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