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대 총선은 또 한 번 민심의 준엄함을 보여줬다. 앞서 20대 대선에서 박빙의 표차로 현 여권을 탄생시킨 민심은 불과 2년여 만에 압도적 의석 차이로 여소야대 정국을 연출했다. 지역구와 비례를 합쳐 겨우 개헌저지선을 지켜낸 108석의 여권, 이건 어떤 뜻인가 정치권 내 해석은 분분한 실정이다. 보통 우리는 취득한 정보와 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내가 옳다” 하는 아상(我相)이 깔려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거다. 그렇기에 결과를 놓고 암만 분석하고 반성을 한다 해도 의식 밑바닥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달라질 뿐이죠.” 어느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뇌리에 남는다.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며 밖으로 치닫기 일쑤인데, 사실상 할 수 일은 남이 아닌 자기를 개선하는 일일 뿐이라는 거다. 쇠못으로 덮인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가죽신을 신는 게 우선이라는 경전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신부님은 젊은 시절엔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이 늘 주변에 함께 있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는 이야기다. 즉, 나의 시각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리
21세기 들어서도 한일 양국 사이에는 애증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문화적 수혜자 입장이던 일본은 고비마다 침략 근성을 노골화했고 일제 강점기에서 최고조를 이뤘다. 일본은 독일에 비해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과나 반성이 없어 미래 전망도 요원하게 한다. 그래도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희망의 끈을 부여잡게 한다. 현직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한반도 식민지배를 사죄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삼일절 105주년인 지난 1일 100세 생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이합집산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축구 국가대표팀 내 불화 사건까지 터지며 국민들의 불안이 가중하고 있다. 해외언론을 통해 먼저 알려진 이번 사건은 협회측이 서둘러 감독을 해임하고 관련 선수들끼리도 사과를 주고받으며 일단은 봉합되는 분위기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서나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다. 요는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다. 감추려 쉬쉬하거나 꼬리자르기로 봉합하거나 네 탓 내 탓 책임공방에 골몰해서도 안되고, 진영논리를 앞세운 네 편 내 편 다툼도 진상 규명과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 출가 대중의 모
여름철 복날이 되면 평소 사랑받던 애견들이 찜통에서 덜덜 떠는 모습이 SNS로 전해져 가슴 뜨끔하던 기억이 있다. 지인들은 세상을 풍자하면서 웃자고 보내주는 거겠지만 제발 살려달라는 그 절규를 애써 무시하고 사는 것 같아 스스로 부끄럽다. 4대 성인 중 한 분인 공자께서도 드셨다고 할 정도로 개 식용 문화는 오래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널리 퍼졌다고 하는데 이제는 위법한 일이 됐다. 우리나라는 지난 1월 이른바 ‘개 식용 금지법’이 통과돼 조금이나마 부끄러움을 덜게 됐다. 이 법안은 3년간 유예 기간을 거쳐 2027년부터 시
젊은 시절 경전을 보며 의아했던 대목이 있다. 눈 하나 달린 원숭이들이 사는 나라에 눈 둘 달린 원숭이가 갔다가 결국 자기 눈 하나를 빼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수행의 길을 안내하는 비유겠다 싶었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두 눈이 있어야 세상을 더 정확히 볼 수 있고 대중을 선도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반대로 됐다면 하향평준화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불가에는 ‘용사혼잡 범성동거’(龍蛇混雜 凡聖同居),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인, 즉 깨닫지 못한 이와 깨달은 이가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합중(和合衆)이라는 승가의 뜻 그대
젊은 시절 한 수련대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큰스님께서 “여기는 송장감들만 모여 있나?” 하시는 말씀에 왠지 기분이 상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겠고, 또 진리를 알지 못해 생사(生死)에 헤매는 보통 사람들을 경책하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설법에 대해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 다들 자존심도 없나? 법문이란 게 이런 건가? 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돌아보면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로선 죽음보다 삶에 더 관심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겨울의 초입이던 어느 날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세상사 인연을 가슴깊이 파고들게 하기에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사실 부처님이 펼치신 장광설이야말로 이러한 인연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게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으니 인연이고 인연사(因緣事)다. 환갑을 맞이하며 인연에 수순하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