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다래헌에 핀 꽃이 우아하다
봉은사 다래헌에 핀 꽃이 우아하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요. 내가 달라질 뿐이죠.” 어느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뇌리에 남는다.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며 밖으로 치닫기 일쑤인데, 사실상 할 수 일은 남이 아닌 자기를 개선하는 일일 뿐이라는 거다. 쇠못으로 덮인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가죽신을 신는 게 우선이라는 경전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신부님은 젊은 시절엔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이 늘 주변에 함께 있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는 이야기다. , 나의 시각이 달라지니 세상이 달리 보였을 뿐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는 거다.

 

신부님은 또 정해진 행복이나 불행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이건 마치 불교의 무유정법(無有定法)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 공감이 간다. 정해진 바 법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기에 언제나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함께 옆에서 이야기 나누던 스님도 거들었다. 불교 역시 행복이든 불행이든 고정불변한 가치로 말하지 않는다고.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불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한 괴로움과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이 따로 있지 않아 인식만 바꾸면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삶이 그대로 영원한 행복의 세계가 된다고.

 

그런데 이런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단 수용하고 살아가면서 스스로 경험하면 되지 않을까. 불교에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을 이야기하듯 우선 믿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증명하는 일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 증득하는 자증(自證)이 중시되는 이유다.

 

화향천리(花香千里), 꽃향기가 가득하면 먼 곳까지 전해지듯 수행자의 공덕은 저절로 주위를 안락함으로 채운다. 그런 사람은 그냥 바라만 봐도 보는 이를 행복하게 해준다. 스스로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든지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주의할 점은 자기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를 무조건 사회와는 무관하게 사는 소승불교로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오히려 자기에 충실하게 접근할 때 스스로의 존재를 깊이 볼 수 있고, 그러다가 사회 속의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곧바로 대승불교가 되지 않겠나. 소승불교적인 지향과 과정이 조건에 따라 그대로 대승불교적인 지향과 과정으로 전환될 수 있지 않겠나.

 

우리는 때론 홀로 있고 싶고 때론 함께 있고 싶다. 이러한 원숭이 같은 자기 마음을 헤아린다면 다른 이도 그럴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를 배려하듯 상대를 배려하며 자타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면 보살의 길도 멀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한 마음 한 호흡마다 언제 어디서든 '따로 또 같이' 행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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