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하늘에 걸린 반달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잠시 명상에 잠겨 본다
초저녁 하늘에 걸린 반달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잠시 명상에 잠겨 본다

 

젊은 시절 경전을 보며 의아했던 대목이 있다. 눈 하나 달린 원숭이들이 사는 나라에 눈 둘 달린 원숭이가 갔다가 결국 자기 눈 하나를 빼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수행의 길을 안내하는 비유겠다 싶었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두 눈이 있어야 세상을 더 정확히 볼 수 있고 대중을 선도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반대로 됐다면 하향평준화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불가에는 용사혼잡 범성동거’(龍蛇混雜 凡聖同居),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와 성인, 즉 깨닫지 못한 이와 깨달은 이가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합중(和合衆)이라는 승가의 뜻 그대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우러진 현실을 표현한 말로 이해하고 싶다. 또 즉범즉성(卽凡卽聖),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 말도 있다. 깨닫지 못한 이와 깨달은 이가 차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표면상 전자는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후자는 그런 이분법을 넘어서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다 분별을 넘어서도록 요청하는 뜻으로 사용된 방편의 말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할 것으로 본다. 영가현각의 증도가첫머리에 나오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든가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 같은 표현도 같은 맥락일 게다.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으니 오로지 간택하지 말라, 허깨비 같이 이 무상한 몸이 곧 진리의 몸,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다.

 

신기한 일은 이런 말을 듣다보면 속이 절로 후련해진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멀쩡한 눈 하나를 빼고 살았을까 오랜 화두가 됐지만 이제는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내 입장으로 시비해본들 상대가 인정해 주지 못하면 서로 감정만 상할 뿐 해결점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기에 어떤 경계든 흘려보내려 하다 보니 마음은 더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연초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께서 신도들에게 선물하신 만선동귀집 총송을 꺼내들었는데 단숨에 읽혔다. 시종일관 전해지는 메시지가 어쩜 요즘 내 심사에 그렇게 와 닿는지 가슴에 박힌다. 어떤 것이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뒤따르고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있으니 언제나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을 얹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보통 우리들에게 세상은 차이에 의한 인식, 즉 분별에 의한 차이로 드러난다. 빛이 어둠을 배경으로 빛나듯 하나를 기준으로 온갖 상대적 세계가 구성된다. 그리고 그러한 분별에 좋고 나쁨의 감정까지 실어 자기고집을 강화할수록 불화는 커지게 된다.

 

다양한 군상들이 시비하고 애증하며 살아가는 사바세계에서 사회적 고통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탈출구가 없지는 않을 테다. 내가 이해하는 세상이 나의 분별로 이루어진 것임(一切唯心造)을 깨닫는 일이 관건이다. 각자의 분별이 세상의 본모습과는 다름을 명심하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다툼을 그칠 수 있지 않겠나. 순간순간 회광반조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나아갈 길임을 다짐하는 성도재일 전야(前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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