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아침 벤치 위에 낙엽
어느 가을 아침 벤치 위에 낙엽

 

젊은 시절 한 수련대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큰스님께서 여기는 송장감들만 모여 있나?” 하시는 말씀에 왠지 기분이 상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겠고, 또 진리를 알지 못해 생사(生死)에 헤매는 보통 사람들을 경책하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설법에 대해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다들 자존심도 없나? 법문이란 게 이런 건가? 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돌아보면 앞날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로선 죽음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은 시절이라서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스스로 세상을 등진 배우 이선균 씨 사건에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또다시 그 시절 송장감 화두가 떠올랐다. 그는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스스로 삶을 포기해야만 했을까.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비슷한 어려움을 당한다면 나는 어땠을지 자문해본다.

 

한 해를 보내며 돌아보니 민낯의 나가 보인다. 언제 죽어도 별로 여한이 없을 것 같고, 그 누구도 아쉬워 할 게 없는 인생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도 든다. 광대한 우주에 부평초 같은 존재 하나 없어진다고 뭐 크게 달라지겠나. 물론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겠지만 뭐 세월이 지나면 잊히지 않을까.

 

송장감을 자처하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는 없어 생각을 더 깊이 가다듬어 본다. 내가 이해하는 불교는 삶이든 죽음이든 그것은 나의 분별이며 그 어떤 분별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삶에도 죽음에도 매이지 말고, 그에 대한 집착도 벗어나며, 벗어났다는 견해에도 머물지 마라. 그리하여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中道)의 길을 걸으라.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버릴 것은 송장감인 몸뚱아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된 개체적 존재로만 아는 아상(我相)’이라는 분별과 집착이다. 이와같이 보자면 허깨비 같은 몸뚱아리를 애지중지하며 살아갈 이유도 헛되이 내던질 이유도 없다. 생사 문제이던 어떤 것이던 특정한 시각에 매이지 않는 균형된 인식으로 살아가다 보면 아름다운 마무리도 가능할 터이다.

 

큰스님의 송장감 법문은 우리가 이러한 깨달음으로 살았으면 하는 고구정녕한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어슴프레 느껴진다. 이제는 중도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인식 전환의 노력과 더불어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까지 바꾸려는 노력까지 필요하다는 깨달음도 되새겨진다. 그동안 이러한 수행을 게을리 한 자화상을 돌아보며 새로운 발심을 하는 세모(歲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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