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에서 바라본 저녁 풍광
불교방송에서 바라본 저녁 풍광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겨울의 초입이던 어느 날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가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세상사 인연을 가슴깊이 파고들게 하기에 많은 이들이 애송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사실 부처님이 펼치신 장광설이야말로 이러한 인연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게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으니 인연이고 인연사(因緣事).

 

환갑을 맞이하며 인연에 수순하는 삶을 지향하게 된다. 점점 더 보수적이 되나 싶지만 그래도 뭔가 바꿔나가고 싶은 것은 바꿔나가려 한다. 다만 최대한 조화와 균형을 감안해 조심스럽게 하게 되니 몸 조심 마음 조심이 생활 모토가 된 듯하다.

 

인연 내지 인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다만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마주하는 인연사들을 받아들이며 이해하려 하고, 때로 수순하며 또한 개척해 나가는 삶이 바로 수행이 아니겠나. 그리고 깨달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대응 역량에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다.

 

선가(禪家)에는 어느 스님이 깨달은 이는 불락인과(인과에 떨어지지 않음)라고 했다가 500년간 여우 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어느 선지식의 꿈에 나타나 하소연을 하니 불매인과(인과에 어둡지 않음)라고 답해 주는데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업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그물코 하나를 집어 내면 그물 전체가 다 올려지는 것처럼 일체는 두루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복잡 다단한 세상에서 어찌 인연 내지 인과를 낱낱이 알 수 있으리오. 우리들의 앎은 지나보면 오류였음이 드러나거나 빙산의 일각처럼 아예 부분적인 사실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 아닌가. 그렇다면 이러한 중생의 현실에서 그럼 어쩌라구?” 반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기치 않은 소신 입적으로 충격을 던진 전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영결식에서 내렸던 조계종 종정 성파 대종사의 법어 한 자락에서 힌트를 구해본다. "복숭아 꽃과 오얏나무 꽃과 장미 꽃의 소식을 봄에게 물었는데 봄은 자기도 모른다. 어떤 소식이냐 이거라. 이 뭐냐 이거라."

 

봄에게 봄꽃 소식을 물었는데 봄조차도 모른다. 그렇다면 봄꽃 자신은 그 소식을 알까. “이게 무엇인가?” 하는 화두는 , 이거 쉽게 알 수가 없네. 뭐지?” 하는 큰 의심이 핵심이라고 한다.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실한지 종정 예하께서는 우리에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화두를 내려주신 것 아닌가.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나름 하느라고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잘 못 살았다는 뜻보다는 스스로에게는 최선의 인연사들이었고 복기하듯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데 위안을 삼고 싶다. 자기를 돌아보라는 선지식의 고구정녕한 말씀이 귓전을 때린다. 확증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의심에 올곧이 집중하는 화두 일념의 자세가 필요함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