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공동묘지 인근 피란민 부락, 섬뜩한 이야기도 전해져"

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designed by 이효재

●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1945년 아미동, 감천 일대 항공사진_주황색 선은 당시 도로(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최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을 할까요?

-오늘도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이어지겠습니다. 한국전쟁 피란수도 당시 신문 기록 등을 살펴보면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경우 일본인 납골묘 자리에 터를 잡았다는 특별한 장소적 상황도 있었지만 그 환경이 너무도 열악했다는 기록들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1952년 6월 28일자 부산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피란민들 가운데 행려병자 숫자가 꽤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 가족들과 떨어져서 홀로 피란을 내려오신 분들이 혼자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끝내는 차디찬 길거리에 쓰러지게 된 행려병자들, 그들은 죽은 후에도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으니 공공기관에서 이들 시신을 수거해서 공동묘지에 가매장을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생한 시신들을 일반적인 장례 절차처럼 관에 넣거나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마니 등으로 감싸서 가매장을 했다 합니다.

1951년 10월부터 52년 6월까지 8개월 동안 부산진, 초량, 영도를 제외한 부산시내 행려 사망자 수가 240명에 달했다고 나타납니다. 이들 행려병자 시신을 가매장 한 곳이 초량동 뒷산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바로 위쪽 등지인데 특히 아미동 뒷산의 경우 매장 장소가 협소해서 이중으로 쌓여 매장되기도 했다 합니다. 이러다보니 비가 오면 곳곳에 사체와 뼈가 노출되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답니다. 당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심지어 개가 얕게 매장된 사체를 파먹는 일이 많아서 아미동 공동묘지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개를 키우는 것을 금하기 까지 했다고 해요. 특히 시신을 깊이 묻지 못하다보니 사체가 노출되기도 해서 비가 내리면 이 시신에 고였던 물이 흘러내려 주민들의 식수로 되어 있는 우물까지 오염시켰다 합니다.

1952년 7월 당시 비석문화마을 주변에 100여호 정도 피란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거지요. 이런 상황에서 상상조차 섬뜩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상상조차 섬뜩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

-이제 막 아침드시고 출근길에서 이 방송을 들으시는 청취자 분들에게는 죄송한 내용입니다만 작년에 서구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 동네이야기 채록 수업 중에 한 분이 현지 주민들을 통해 채록한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큰 비가 지나가고 날이 맑게 개인 날 아미동 피란민 주민 한 분이 소 뼈를 구해왔다며 곰탕을 해먹자고 이웃들을 불렀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물을 떠 와서는 이 뼈를 깨끗이 씻고 있는데 연세가 드신 한 분이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다가 뼈를 가져온 사람에게 물어 봤답니다. “이 뼈가 어디서 생긴거냐”고~. 인근에 도축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육점도 없는데 이상한 생각이 드셨던 거지요.

그러자 이 뼈를 가져온 사람이“저 아래 냇가에서 주워왔다”는 거예요. 이 어르신이 이 뼈를 살펴보시더니 “이 사람아! 이게 사람 뼈지, 어디 소뼈냐?”면서 당장 산에 가서 묻어주라고 호통을 치셨답니다. 아마 사람의 대퇴부 뼈가 굵으니까 소뼈로 보고 주워 왔던 것이겠지요.

앞에 말씀드렸던 하루에도 수 명씩 발생하는 행려 사망자 시신을 이곳에 아무렇게나 묻었던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할 뻔 했던 상황에 이르게 한 겁니다. 

1951년 10월 동광동 영선고갯길 주변 산비탈의 피란민 가옥들(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민족적 비극 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오신 분들의 애절한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인 것같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인데도 당국에서는 행려 사망자들 공동묘지를 그대로 유지했었는가요?

-당시 이 일대 원주민들 조차 그들의 식수원 오염이 심각하니까 다들 나서서 시에 항의 방문을 하기도 했다는데 당국에서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는 신문 기사는 나오는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미동 주민들 가운데 나오는 증언 가운데 하나가 이 공동묘지에 가끔 밤중에 사람 시신 수 구씩 묻고 가는 차량들이 있었다는데 아마 보도연맹 관련 처형자들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당시 언론 내용을 살펴보면 아마 행려 사망자들 시신을 묻은 것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묘지 인근에 자리잡을 수 밖에 없었던 피란민들의 절박했던 주거 문제가 당시 부산 곳곳에서 나타났었다고 소개를 지난 해 방송 때 한번하셨죠?

-작년 11월에 한국전쟁 피란시기 주거난을 이야기하면서 몇몇 마을들을 소개드렸는데 초량동 산복도로 위에 자리한 금수사 옆에 이바구캠프라는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마을 이 일대도 원래 공동묘지였던 곳이었는데 피란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지금의 마을로 이어져 오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좌천동 증산 동남쪽 아래 주택지도 과거 공동묘지였던 곳이고, 영도 흰여울마을 역시 공동묘지 아래 산자락 벼랑 위에 드문드문 묘지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은 곳이고, 시기는 늦은 곳이지만 문현동 벽화마을도 역시 공동묘지 터에 1960년대 이후 형성된 마을입니다. 

하필 이런 공동묘지에 거처를 마련하게된 까닭이 특별히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동묘지의 경우 대부분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배수가 잘되는 곳이면서 금잔디라 부르는 토종 잔디가 자라고 있어서 땅 위로 올라오는 냉기를 어느 정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조건이다 보니 당장 비바람을 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런 곳이라도 자리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현재 아미동, 감천 일대 지도(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묘지 주인, 그러니까 누워계신 분들의 가족들과의 마찰도 만만치 않을텐데?

-저도 이런 부분들이 궁금했는데 소위 하꼬방이라 부르던 판자집이나 움막집들이 겨우 2~3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봉분을 깍아서 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닌 봉분과 봉분 사이에 집을 짓는 겁니다. 그리고 공동묘지 대부분이 개인 땅이 아닌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소유이다 보니 공공용지에 묘를 마련한 사람도 묘를 훼손한 것이 아닌데다 워낙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저 묵인하는 정도였다 합니다. 그 대신 묘옆에 자리한 피란민들이 묘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거나 수시로 잔디를 깍아 주기도 해서 오히려 성묘하러 온 분들이 먹을 것 등을 별도로 싸서 갖다주기도 했다 합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