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1,124명 의료진, 200만명 이상 전쟁 부상자와 민간인들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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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최근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오갈데 없는 피란민들이 당시 아미동 원주민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일본인 납골묘 일대에 천막 생활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우선 비바람을 피할 공간을 마련해야 그 다음으로 막노동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 소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치가 아니라는 표현처럼 공동묘지라도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아미동 원주민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던 묘지 주변이라도 택해야 했고 이곳에 천막을 치고 살다보니 차츰 넓은 주거공간이 필요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해방 이후 임자없는 땅, 즉 일본인 납골묘를 파헤쳐서 그 위에 하꼬방이라 부르던 허름한 집을 짓고 살게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뒤늦게 부산으로 피란을 오신 분들이 정부와 시에서 구호용으로 나누어 준 천막을 들고 아미동으로 와서 천막생활을 하다 이후 일본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자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 말씀이네요?

-네. 지난 시간 말미에 잠시 언급 드렸듯이 초기 아미동에 피란민 천막시설이 자리했던 곳이 현재 아미동 산상교회 일대였습니다. 즉 교회가 자리한 곳 주변과 도로 건너편 일대인데 교회 자리와 건너편 작은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곳 등에 약간 평지가 있었답니다. 이곳에서 천막생활을 한 것이 시작이었지요.

지금 산상교회 일대는 일제시기 부산지역 유력 일본인 가문의 납골묘였다고 하던데 어떤 가문인지? 

-이 산상교회 일대가 오이케츄스케(大池忠助)라는 사람인데, 일제시기 부산의 대표적인 일본인 자본가 4인방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미곡수출과 관련된 업종인 미곡부, 정미부, 해운부, 육송부, 농업, 창고업을 중심으로 큰 자산을 모았는데 일제시기 부산부 의원도 했던, 재산 뿐 아니라 정치적 입김도 막강했던 사람이었지요. 산상교회와 주변이 이 사람의 가족 납골묘 자리로 현재까지 확인된 아미동 일본인 납골묘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군용 천막을 치고 그 안에 10가구 정도가 들어가 살 수 있었는데, 산상교회 주변에도 천막집들이 여러 곳 들어섰다 합니다.

1950년 스웨덴 적십자병원을 준비 중인 부산상고 교정(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지난 시간에 올려주신 사진 가운데 스웨덴 대사관에서 제공했다는 사진이 한장 있는데,‘1952~3년경 아미동에서 바라본 비석문화마을과 부산항’이라는 사진이지요. 이 사진은 누가 촬영한 것이지, 그리고 1952~3년경이라는 년대 추정을 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먼저 아쉽게도 이 사진의 촬영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고 저도 스웨덴 대사관으로부터 카톡으로 사진을 받다보니 사진 파일이 작아서 세세한 부분을 조사하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9월 한국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의료기관을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었던 부산으로 파견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의료진 가운데 한 분이 촬영한 것입니다. 이 의료진 가운데‘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이라는 분은 1953년 6월부터 12월까지 이 병원의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다른 분과 달리 코닥칼라 슬라이드 필름으로 당시 부산을 기록한 사진을 많이 남겼는데 이 분이 촬영한 사진 가운데 아미동 뒷산인 아미산과 건너편 천마산 자락에서 부산항을 촬영한 칼라슬라이드 사진이 3장이 있어서 이 분의 사진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진의 촬영시기를 1953년 6월에서 8월 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산자락 주변의 풀들의 색상으로 보아서 그렇게 보이는데 특히 용두산 자락에 피란민 부락이 남아있는 것도 보입니다. 이 사진으로 추정해보면 결국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에 자리를 잡은 피란민들이 일본인 납골묘 자리를 허물고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1953년 하반기부터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7년 9월이었지요, 부산시에서‘서전병원-스웨덴 참전용사 눈으로 본 피란수도이야기’사진전이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개최되고 그 해 말에는 도록도 발행되면서 부산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한국전쟁 시기 스웨덴 야전병원의 활약상이 크게 부각되었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새삼 부각이 되었는지 미안한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전쟁 시기 우리나라에 의료지원을 온 나라가 이 스웨덴 외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5개입니다. 물론 전쟁 이후에 독일적십자 병원도 부산 서구 동대신로터리 옛 부산여자고등학교 교정에 자리를 하면서 전후 전재민과 시민들에 대한 의료구호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은 1,124명의 의료진이 57년까지 6년 6개월 동안 부산에 머물면서 200만명 이상의 전쟁 부상자와 민간인들을 치료했습니다. 이들의 눈부신 의료지원 활동에 대해 스웨덴 야전병원협회와 스웨덴 한국협회에서 1971년 10월에 서면의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정에  스웨덴 참전기념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비가 당시 학교 교정 내에 있어서 일반 시민들이 잘 알지 못하다가 롯데백화점 서면점이 옛 부산상고 부지에 세워지면서 지금은 롯데백화점 정문을 바라보는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2005년 9월에 지금과 같이 정비를 해놓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저 지나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만 보는 정도였는데 제주에서 의료활동을 하시는 의사 한 분이 마침 이 비를 눈여겨 보시곤 2년간 자료준비 끝에 지난 2010년 6월 대한의사학회 학회지에‘한국전쟁과 부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2016년 스웨덴의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한국전쟁 시기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활약상에 대한 자료수집과 촬영차 부산에 왔다가 남구청 공무원 한 분을 접촉하면서 그동안 그들이 수집한 자료들을 내보이면서 마침내 전시회와 도록 발행까지 이어지고 그로인해서 많은 시민들이 스웨덴 적십자야전병원의 의료구호활동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3년 부민산에서 내려다 본 부산시가__스웨덴참전병사 잉바르 스벤손(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아미동 비석마을 이야기를 하다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 활약상까지 이어졌는데 한국전쟁 이후에도 1957년까지 무려 4년 동안 더 남아서 의료구호활동을 했다는 것이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스웨덴적십자병원은 한국전쟁 시기 최대 규모, 최고 오랫동안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는데 그 뿐만 아니라 의료술 또한 최고였답니다. 1951년 3월에 발행된‘뉴욕 라이프지’에 부산의 부상병-서전병원에서 치료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지만, 일본이나 미국으로 후송될 정도로 중대하지 않는’이라는 표현으로 이 병원의 역할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구요. 나환자촌 의료활동, 우암동 피란민 수용소 의료활동에 이어 55년 5월부터 2년간 옛 부산수산대학교, 현 부경대학교 캠퍼스에서 후속 의료활동을 하면서 결핵퇴치사업 뿐 아니라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 개설에도 큰 역할을 했던 우리로서는 잊지 못할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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