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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뉴스와 사람들] 박원자 작가 “대원 장경호 거사는 기업 일구며 마음의 힘 증명... 불교 및 사회 위한 좋은 모델로 널리 알리자”
김봉래 기자 | 승인 2020.06.01 12:33

 

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박원자 작가

방송 : 2020년 5월31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충격을 몰고 온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죠. 고통을 넘어서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고통이 있다면 어느 하나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인데요. 개인의 인격완성과 더불어서 다 함께 행복한 세상 불국토를 건설해나가는 보살도야말로 우리 불교가 제시하는 인생 항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보살도는 그저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에서 도려낼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 이 시간에는요, 불자 실업인으로서 30억 원이 넘는 정재를 사회에 회향해서 현대 한국불교 발전에 초석을 다지신 대원 장경호 거사님의 평전을 정리하신 분이시죠. 박원자 작가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김봉래 : 예.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박원자 작가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박원자 작가님 안녕하세요.

 

박원자 : 네. 안녕하세요.

 

김봉래 : 네. 요즘 코로나 사태로 다들 힘들어 하는데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요.

 

박원자 : 저는 주로 글을 도서관에서 써요.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런데 요즘에는 이제 도서관에도 못 가고 그래서 집에서 작업하는데 그냥 오히려 더 조촐하고 저를 돌아보기도 하고 번다하지 않아서 괜찮은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봉래 : 대원 장경호 거사님의 평전을 정리하신 분으로 제가 소개를 해드렸는데 그 외에도 뭐 수많은 책을 내셨죠.

 

박원자 : 아유 뭐 수많은 책은 아닌데, 그래도 좀 여러 권 냈죠.

 

김봉래 : 제가 기억나는 게 설정스님.

 

박원자 : 네. <어떻게 살 것인가>.

 

김봉래 ; 그 책도 있었고 제가 관심 갔고 있는 108배 어떻게 할 것인가.

 

박원자 ; <내 인생을 바꾼 108배>

 

김봉래 : 아. 내 인생을 바꾼 108배.

 

박원자 : 제목이 그렇게. 한 2년 쯤 됐어요. 최근에 나온 게 그렇고. 그 전에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책이 나왔었는데 그 책이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많은 분들이 그 책으로 저를 생각을 하는 대표적인 책이라고 그럴까.

 

김봉래 : 인생을 낭비한 죄. 굉장히 무서운데요. 어떤 내용이었죠?

 

박원자 : 그것은 제가 스님들 평전이나 일대기, 그리고 또 <나의 행자시절>, 해인지에 한 15년 정도 연재를 했잖아요. 스님들을 찾아뵈면서 나눈 이야기 중에 혼자 듣기에 너무나 아까웠던 인생을 물었던 이야기 그런 것을 정리해서 낸 책이에요.

 

김봉래 : 그래서 사실은 오늘 현대 한국불교사의 유마거사다. 이 땅의 유마거사다 라고 불리는 대원 장경호 거사님의 이야기를 여쭙고 싶어서 모시게 됐는데, 장경호 거사님하고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요.

 

박원자 : 거사님께서 1975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아마 30년 쯤 됐을 때, 30년 기념으로 장경호 거사님 평전을 하나 내자 이렇게 이야기가 됐었나 봐요. 그래서 그 간행위원회에 속했던 한 분이 저한테 연락을 하셔서 책을 써줄 수 있느냐 그렇게 인연이 됐어요. 그런데 그 분이 동국대 계셨던 장휘옥 교수님, 그 분의 제자였거든요. 그러니까 그 분은 장휘옥 교수님께 저를 소개받은 거죠.

 

김봉래 : 그렇군요. 인연의 인연을 이어서 이 책이 나왔군요. 동국제강 창업주 장경호 평전, 책 제목은 <이 땅의 유마 대원 장경호 거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 한 15년 정도인 것 같은데요.

 

박원자 : 그렇죠. 2005년도에 출간이 됐으니까 벌써 15년이 됐네요.

 

김봉래 : 올해가 거사님이 입적하신 지 45주년이 되는 그런 해에요. 9월 9일이 기일이니까요. 마침 대한불교진흥원에서 불교문화에 간단히 소개를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한국불교가 제2의 도약을 이뤄나가는 어떤 전환기에 있다. 코로나 사태 전과 후가 뭔가 크게 달라지면서 우리가 거기에 대비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장경호 거사님의 삶을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뭔가 준비를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가지고 그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가지고 우리 작가님을 모셨는데요. 먼저 이 책을 쓰시면서 드신 어떤 소회가 있으실까요.

 

박원자 : 너무 많았어요. 제가 이 분을 생전에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려고 하면 이 분에 대한 모든 조사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생전에 못 봬서 이 분을 아는 분들의 증언을 듣고 여러 자료를 보면서 아 이 분은 우리가 보통 대승보살의 삶을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완성시키는 정말 어떤 선지식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고, 저 개인적으로는 수행에 대한 확신 그런 것을 이 분의 삶을 통해서 느꼈어요. 그리고 이제 많은 분들이 이 분에 대해서 증언을 했는데 정말 훌륭하신 분으로 어떤 분도 뭐 부정적인 말씀을 하신 분이 없었고, 정말 우리 불교 거사님들 중에서 최고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봉래 : 그래서 이 땅의 유마거사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재가불자로서 하나의 좋은 모델이 되는 그런 경우인데, 사실은 수행의 의미가 이렇게 사회적인 실천과 이렇게 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우, 이렇게 커다란 자취를 남기고 또 후세에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는 어떤 실질적인 결과를 보여주신 분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장경호 거사님의 어떤 됨됨이 이런 것을 오늘 집중적으로 알아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그 분이 어떻게 그런 원력을 젊은 날에 세울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요.

 

박원자 : 이 분이 1899년도에 태어나셔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1975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이 분이 살았던 그 시대는 일제시대였잖아요. 그래서 그 어떤 젊은 날에 나라를 빼앗긴 청년의 울분 같은 것도 있으셨을 거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고민들을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겠지만 이 분도 하셨을 것 같아요.

 

김봉래 : 3.1 운동에도 동참했다는 기록이 돼 있지 않습니까.

 

박원자 ; 예. 학교 다닐 때 적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주셨다고 하고.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이 분이 17세 때 막내 동생을 잃었다고 해요. 그러니까 갑자기 이제 동생을 잃으면서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셨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그 때 이제 어떻게 정말 살아야 될 것인가, 내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찾다가 절에 가가지고 그 때 당시 구하스님 법문을 들었다고 해요. 통도사. 이 분이 부산 분이었기 때문에

 

김봉래 : 그렇죠. 부산 동래.

 

박원자 : 예. 거기 가까운 절에 가서 이제 듣고. 그런데 그 전에는 할머니가 불교이셔서 손자를 데리고 늘 통도사나 절에 다닐 때 할머니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아마 그 동생의 죽음을 앞두고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때 할머니와 다니던 절을 생각을 했을 거고 그 다음에 구하스님 법문 들으면서 어떤 탈출구 이런 것을 불교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런 것이 처음 인연이 된 것 같아요. 깊게는.

 

김봉래 : 그러니까요. 저도 읽어봤습니다만 대원 거사님께서 그런 말하자면 사회를 위해서도 큰 일을 해야 되겠다는 그런 원력을 세우게 된 그런 인연이 궁금해요.

 

박원자 : 이러셨다고 해요. 스물일곱 그렇게 불교를 만나셔서 이 분이 굉장히 수행을 적극적으로 하셨어요. 화두를 받고 금강산에도 가서 여러 선지식들도 만나고 굉장히 화두를 놓지 않고 있으시다가 선어록도 많이 읽으셨다고 해요. 젊었을 때.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게 27살에 통도사 보광전으로 3개월 안거를 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쓰면서도 놀라웠던 게 그 때 당시 직장인이었고 27살에 아이들도 있고 한 가장이면서 직장인이 3개월을 모든 것을 멈추고 안거를 들어간다는 것은 이 분이 이미 얼마나 수행에 깊이 들어갔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 분이 3개월을 거기서 안거를 나고 해제되던 날 통도사 법당에서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서원을 했다고 해요. 제가 이제 기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 일단 그리고 나서 그 이윤을 국가의 은혜, 그 다음에 불교의 은혜를 갚는데 쓰겠다, 이렇게 서원을 세웠다고 해요. 그래서 그 때 그 서원을 세우고 계속 사업에 매진하시고 수행도 겸하시고 이러면서 이 분이 결정적으로 32살에 가마니 장사부터 시작을 하세요. 그 때 그래가지고 굉장히 많이 동국제강이 지금의 기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그런 모티브가 6.25전쟁이 나잖아요. 1950년에. 그 때 이 분이 바로 직전에 못장사를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몇 년 전에 못장사를 시작을 했는데 몇 년 후에 전쟁이 났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했잖아요. 그러면 판잣집을 지어야 하는데 못은 필수였잖아요. 그래서 이 분이 예기치 않게 엄청난 돈을 버신 거죠. 그런데 이제 놀라운 게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감동을 받았던 게 그 때 벌써 50년대면 이 분이 50대 초반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많은 벌써 이미 부를 축적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 중이고 돈을 그렇게 벌었는데도 그 때 당시 수행을 놓치지 않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효봉스님이 그 때 당시 부산으로 금정사 거기로 피난을 오셨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거기를 찾아가서 수행을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그렇게 수행의 끈을 놓지 않으셨고 깊은 서원을 세웠고 또 기업을 세우면서 회항을 하게 되시지 않았나.

 

김봉래 : 그래서 평생 정월 초하루 불공을 하시면서 늘 감사와 당신의 염원을 점검하고 다지기도 하셨다, 그런 이야기도 이제 제가 읽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불심이 돈독했던 분이신데, 그러한 당신의 수행이 당신의 어떤 사업 영역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박원자 : 당연하죠. 왜냐하면 이 분이 왜 이렇게 이 분이 아까 말씀드린 그런 발원을 하고 이미 20년 후에 재계 경제 서열 5위 안에 들어요.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굴곡들이 있고 그랬겠어요. 그런데 그것을 이 분 스스로도 말씀하셨어요. 수행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안목도 넓어지고 이렇게 직관력도 발달하고 그러잖아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게. 그런 것으로 기업을 운영을 하셨던 거죠. 대표적인 예가 용호동에 이 분이 60대였어요. 그 때 용호동의 바닷가를 완전히 매립해서 공장을 세웠다고 해요. 철강회사를. 그런데 그 때 당시에 재계에서는 다 동국제강은 끝이 났구나. 왜냐하면 그렇게 큰 20만 평이었다는데 거기에다가 철강회사를 세우면 수요가 그렇게 많지 않았대요. 그래서 그 규모를 세워두면 반은 쉬고 반은 생산해야 하는 그런 것으로 가야되는데 너무 무모하다, 힘들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 이 분이 이제 한 거예요. 어떤 안목이 있고 직관력이 있으셨겠죠. 그런데 이 분이 그런 것을 수행을 해서도 얻으셨겠지만 복인이라고 할까 그런 것도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반은 쉬고 반은 돌려야 될 그런 상황에서 월남전이 터진 거예요. 그러니까 엄청난 철강이 그 쪽으로 수출하게 됐고.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이후에는 새마을운동 그게 벌어져가지고 그 때 건설붐이 일고 하니까 이 분이 못이라든가 철강 자재라든가 이런 게 굉장히 필요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런 안목들이 저는 수행의 힘에서 오는 게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 거죠. 사업에 안목이.

 

김봉래 : 그러니까 지혜와 복덕이 구족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을 표현하는데 거사님도 그런 두 가지가 잘 아울러 갖춰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박원자 : 그렇죠. 그것이 저는 깊은 수행과 어떤 마음의 힘에 대한 확신, 이런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수행도 하셨고 또 그게 현실하고 연결이 되지 않았나. 이 분의 평생 좌우명이 ‘자아를 발견하여 지상에 극락낙원을 건설하자’ 이런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자아를 발견한다는 게 수행이잖아요. 수행에서 오는 거잖아요. 그리고 수행에서 와서 자아를 발견해야 그것이 곧 개인에도 그렇고 사회에도 그렇고 지상낙원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이 분이 중요시 했던 것은 수행이었어요.

 

김봉래 :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 사실은 우리가 이제 뭐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어떤 바탕이 없이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마음공부가 충분히 갖춰져야 만이 자연스럽게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되는데,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마음바탕, 아까 마음의 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부분을 주목하지 않고 마치 모래위에서 성을 쌓듯이 그 성을 요구하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 면에서 대원 장경호 거사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모델을 제시했고 그것을 성공시켜 내보였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거든요.

 

박원자 : 그렇죠. 이 분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참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잖아요. 거기서의 자아는. 그래서 이 분의 그 어떤 확신은 젊어서부터 수행을 굉장히 깊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마음, 나의 본래 면목, 그것을 또 참 나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영원한 생명이라고도 하잖아요. 그것의 발견 없이는 모든 것은 사상누각이다 이렇게 보신 분이예요.

 

김봉래 : 자녀들에게도 그런 말씀을 주시면서 경책하면서 2세에게 물려주고 자연스럽게 해서 오늘날의 동국제강까지 크게 발전한, 2세 3세까지 오게 되는 그런 게 되는데, 그 분의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 불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으로 생활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되듯이 저희들도 그렇게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원자 : 맞아요. 잘 보신 것 같아요. 그 분이 주장했던 것도 그것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참 나를 찾는 것.

 

김봉래 : 그래서 거기에 보면 불이(不二)의 경영철학, 그 부분이 또 주목을 받는 것 같아요.

 

박원자 : 예. 왜냐하면 우리가 다 불성이라는 마음, 아까 말한 ‘참 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모든 생명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평등한 거잖아요. 그래서 이 분이 다 그런 불성을 갖고 있고 ‘참 나’의 바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이로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이분이 자녀들한테 이 동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동국의 주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해요. 그것은 불이의 철학에서 나온 거죠. 그렇게 경영을 했기 때문에 저는 동국제강이 크게 일어섰고 국가에 큰 도움이 되는 기업으로 서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바탕이 그랬기 때문에 이 분의...

 

김봉래 : 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을 불교적인 시각으로 보면, 불교권 내에서 해석을 해보면, 불교가 대중화하고 생활화하고 현대화하는 초석을 놓고 길을 열었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박원자 : 그렇죠.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에서도 그랬겠지만 그 시대의 우리 불교가 그것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고, 그리고 이 분의 생각도 수행이 어떤 삶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겼고, 그러려고 하면 불교가 무엇인지를 사람들한테 알려야 되잖아요.

 

김봉래 : 그렇죠.

 

박원자 : 교육의 중요성을 이 분이 굉장히 느낀 분이예요. 그래서 보통은 우리가 그 당시 60년대 70년대 이 때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 해도 우리가 산 속에 있는 절에 들어가야 하고 어떻게 보면 수행이라는 게 수행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사람들이 불교를 정확히 알아야 된다. 이런 것에 빨리 이제 생각을 하셔서 처음에는 불서를 보급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셨어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방송도 해야 한다. 그리고 참선방도 세웠고 대원정사도 그렇게 해서 선 거거든요.

 

김봉래 : 그렇죠. 대원회, 대원정사. 특히 197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교양대학이죠, 불교교양대학 대원불교대학이 세워졌죠.

 

박원자 : 그런 게 교육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산 속에서 불교가 도시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수행을 하고 이래야 바뀔 수 있고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이뤄질 수 있다, 이렇게 보신 차원에서 대원정사도 설립하셨고, 참선 그 때 당시에 대원정사 안에 참선방을 크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그 때 아주 유명한 선지식.

 

김봉래 : 시민선방.

 

박워나 : 예. 시민선방을 만들어서 해안선사를 모셔서 초대 선원장으로 법문 듣게 하고 24시간 개방해서 참선하게 하시고.

 

김봉래 : 누구나 와서.

 

박원자 : 네. 그게 모티브가 되어서 뒤에 시민선방이 많이 생겼죠.

 

김봉래 : 제가 듣기로는 불교대학도 무료로 수강생들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박원자 : 예. 무료로 하고 오히려 저녁을 못 먹고 온 사람들에게는 밥을 해서 먹이고.

 

김봉래 : 오늘날도 사실은 그런 하나의 모델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박원자 : 요즘 그런 데 많이 있지 않나요.

 

김봉래 : 무료로... 어쨌든 저희 불교방송이 있는 마포 본사 사옥 1층에 오면 거사님의 상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에 이제 간단한 설명이 되어 있거든요. 여기도 보면 박정희 대통령에게 30억 원이 넘는 정재를 불교 중흥을 위해 써 달라 이렇게 쾌척을 했다, 이렇게 적시가 되어있고, 이것이 한국불교 증흥과 BBS 불교방송의 모태가 되는 재단법인 대한불교진흥원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박원자 : 제가 이 분의 평전을 쓰면서 또 하나 감동했던, 크게 감동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거든요. 이 분이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시다가 타계를 맞게 되시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회향을 할 것인가 깊게 고민하셨겠죠. 그 때 당시 둘째 아드님인 스웨덴 대사이셨던 장상문 그 분께 뒷일을 너한테 부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고. 다음은 개인 또 사유의 재산이 있으셨겠죠, 그게 30억이었다고 해요 그 때. 지금으로 따지면 수천억 원. 그런데 그것을 보통 분 같으면 자식들이나 누구에게 써 달라고 했을 텐데 이 분은 직접 그 때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한테 편지를 썼다고 해요. 직접 써서 본인이 불자이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국가의 은혜와 부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내가 이것을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다가 대통령께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재산을 하나도 유실시키지 말고 불교 재단을 만들어서 꼭 불교 발전에 써 달라, 이렇게 장문의 편지를 쓰세요. 그런데 굉장히 명문이에요. 그거 읽어보면. 그렇게 해서 증언하신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유언하고 돌아가시고 쾌척한지 한 달 만에 대한불교진흥원이라는 법인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대통령이 직접 사람을 불러서 이것은 꼭 이렇게 써야 된다 해가지고 재단을 만든 게 지금의 대한불교진흥원이예요. 그래서 저는 그것 쓰면서도 이 분이 불교에 대한 신심과 확신 이런 게 깊고 또 수행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정말 참 나를 발견해서 부처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확신이 없었으면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 보는 거죠.

 

김봉래 : 그러니까 신심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정말 이것은 내 개인이 이룬 것이 아니고 연기법 내지는 인연법 속에서 사회 공동체의 어떤 관계성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그대로 회향한다, 그런 말씀이셨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평소에 미리미리 자녀분들에게도 해놓으셨던 거 아닌가요.

 

박원자 : 하셨겠죠. 하셨는데.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제 생각에는 불교가 중흥되는 일이 곧 국가의 발전이고 우리 개개인 하나가 다 부처가 되고 지상낙원을 이룩하는 길이다 라는 확신이 깊으셨기 때문에 모든 게 다 나오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고, 제가 이제 이 분의 평전을 쓸 때 이 분이 6남 5녀를 두셨어요. 그런데 이미 다른 분들은 다 작고를 하시고 5남과 6남이 살아계셨을 때였어요. 그래서 5남과 6남을 만났어요. 제가 그런데 2남이셨던 장상문 대사님 그 분이 이제 신심이 깊으셨고, 그 다음에 지금 5남이신 장상건 회장님이시죠. 동국산업 그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그 때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제가 참 감동 깊게 들은 게 5.16이 났을 때래요. 그러면 어쨌든 이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변화가 굉장히 영향을 미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를 찾았겠죠. 그 때는 일선에서 좀 물러난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찾아서 막 수소문해서 찾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조계사 법당에서 참선을 하고 계시더래요. 그러면서 그 분이 하시던 말씀이 정말 아버지는 몸소 보여주었다. 어떻게 기업을 해야 되고 우리가 무엇을 좇아가야 할지. 그래서 아마 그런 것을 보셨기 때문에 그 장상건 회장님도 지금 제가 알기로는 굉장히 아버지 뒤를 이어서 오늘날 황룡원인가 거기도 지으셔서 불교로 회향하는 데 앞장서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그런 게 아마 장경호 거사님께서 말씀도 말씀이지만 몸으로 몸소 다 보였기 때문에 자녀분들도 다 그런 것을 익히고 배우지 않았나, 또 실천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봉래 : 그렇죠. 그래서 둘째 아드님이시죠. 상자 문자, 장상문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님이 저희 BBS불교방송 초대 사장님으로서 불교방송의 기초를 놔주셨고, 어쨌든 그렇게 해서 거사님의 원력이 이어져서 오늘날의 이제 대한불교진흥원 또 BBS 불교방송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마침 올해가 불교방송도 설립된 지 30주년이 된 해거든요. 그래서 저희들도 글로벌한 미디어로 거듭나야 되는데, 방송환경이 매우 열악하게 되고 있거든요. 방송산업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이 앞으로 장경호 거사님의 그런 큰 뜻을 펼쳐나가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될 텐데요, 불교방송에 대해서 거는 기대랄까 주문이랄까 그런 게 있으시면 말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원자 : 제가 감히 제 개인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실 것은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장경호 거사님께서 사실은 불교방송이 이제 돌아가시고 나서 이게 1991년에 개국을 했잖아요.

 

김봉래 : 예. 1990년에.

 

박원자 : 그러니까 돌아가시기 15년 만에 세워진 건데, 살아계실 때 이미 어떤 말씀을 하셨나하면 방송국을 세워야 한다, 그러니까 포교를 하는데 방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신 거죠.

 

김봉래 : 매우 효율적이죠.

 

박원자 : 그래서 굉장히 노력을 하셨어요. 방송국을 세우려고. 제가 그것도 이제 직접 증언으로 들었는데, 그러면서 그 때 하신 말씀이 라디오에서 목탁 소리가 나오고, 그 때는 아무도 이런 상상을 못했을 때잖아요, 스님들의 법문을 라디오만 틀면 언제 어디서나 있는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방송국을 세워야 된다. 이래서 사실은 대원정사가 남산에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 방송국을 세우시려고 관계자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스케줄을 만들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 때는 너무 선진적이셨던 거지.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시다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돌아가신 거예요. 이 분이. 그러니까 만약에 살아계셨으면 아마 살아생전에 저는 조금 더 일찍 방송국이 서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고 성수스님에 말씀에 의하면 이 분이 굉장히 매머드 불교, 뭐라고 그럴까 아까 지상낙원 같은 불국토, 그런 것을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을 만들고 싶어 하셨대요. 그래서 뭐 대학교, 병원, 뭐 또 이런 방송국, 은행 이렇게 해가지고 완전히 하나의 그런 것을 세우고 싶어 하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굉장히 불교중흥을 시키고 중생 교화와 포교를 위해서 오로지 그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김봉래 : 어쨌든 불교방송도 30년이 지났지만 이제 새로운 도약을 해야 될 그런 시기거든요. 그래서 저희들에게 주문하실 말씀 한 말씀 있으시면 짧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원자 : 글쎄요. 요즘에는 너무 바뀌니까요. 이런 뭔가를 모색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어떤 것이 될지, 방송 고유의 어떤 것이 있겠지만 그것을 모티브로 또 다른 것으로 이 세계를 열어 갈 그런 것을 콘텐츠 개발을 계속 해야 되지 않을까. 제가 구체적인 것은 말씀 못 드리겠지만. 어떤 게 좋을까요.

 

김봉래 : 그래서 저는 장경호 거사님 같은 이런 경우를 너무 모르고 있잖아요, 이렇게 개인 수행과 이런 사회적 실천이 이렇게 중도적으로 잘 조화된 그런 케이스를 찾기 어렵거든요. 거의 유일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경호 거사님이 돋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박원자 : 아까 말씀하신 질문에 혹시 이게 또 부합되는 대답일지 모르겠는데 장경호 거사님 같은 분이 지금 말씀하신 대로 굉장히 그 어떤 수행과 회향을 굉장히 완성시킨 분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 청년들한테 이 분의 삶이 굉장히 이렇게 좀 알려지기를 원해요. 그래서 어떤 젊은 날의 발원이 그리고 마음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정말 마음먹기에 따라서 내 삶이 바뀔 수 있고 그리고 내가 정말 무한한 힘을 지녔다는 이 마음, 자성, 이것을 발견해서 쓰는 것이 얼마나 큼 힘을 발휘하는지 이것을 이 분이 보여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분만 하게 잘 살아오신 불자, 이런 분을 찾기 어려워서 이 분의 삶을 잘 조명을 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다큐나, 방송국에서 또 아니면 요즘에는 유튜브 같은 것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보는데, 그런 거라든가, 요새는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매체가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이 분의 삶을 조명해서 불교방송에서 앞서서 다뤄주시면 굉장히 포교에도 좋고 개인의 삶에서도 힘을 얻지 않을까, 이 분의 삶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봉래 : 예. 어느덧 시간이 다 지나고 있는데요. 향후 계획 그리고 또 마무리 말씀 겸해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원자 : 조금 아까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도 글만 쓰던 사람인데 요즘에는 많이 바뀌었잖아요. 책 보는 분들도 이제 많이 줄었고 그래서 제가 그동안 스님들을 뵙고 수행에 대한 확신 그리고 또 제가 미력하나마 해온 어떤 그런 것, 수행이라든가 불교에 대한 그런 것들을 제가 갖고 있는 콘텐츠 개발을 어떻게 책 말고 할 수 있나 이런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조금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내면 좋겠다. 포교가 될 수도 있고 저 개인적인 보람일 수도 있고 해서 그런 것을 좀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김봉래 : 예.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스튜디오까지 직접 나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원자 :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박원자 작가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마음의 힘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부처님을 생명으로 살아있는 법신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에서 바로 그 지점에서 대원 거사의 인생에 일대 전환이 펼쳐졌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대중불교 운동의 선구자였던 대원 거사의 큰 뜻을 계승해서 우리 모두 한국불교의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 가야겠다, 이루어 나아가야겠다 다짐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봉래 기자  kbrbu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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