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부산역사'S Talker) "피란민 거주 용두산 일대도 큰 화재...이후 녹지 조성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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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 연 :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부산BBS가 진행하는 ‘부산역사'S Talker’ 시간입니다. 피란수도 시절 부산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님과 함께 합니다. 김한근 소장님 안녕하세요? 

용두산대화재 피해축대_부산호텔 뒤에서 공원으로는 오른쪽 담벽(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피란수도 시절과 관련한 부산지역 마을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용두산공원의 판자촌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일제강점기 용두산공원 조성과 신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는데 오늘도 용두산공원의 판자촌이야기를 이어가야죠?

-네, 용두산은 부산 중구 시내 중심가에 우뚝 솟아 동서(東西)로 구릉(丘陵)져 있는 산으로 현해탄(玄海灘)의 푸른 바다와 부산항(釜山港)의 시가지를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제시기에서 1990년대까지 부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곳인데 지금은 예전에 비해 그 명성이 다소 쇠퇴했지만 아직도 부산 원도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은 먼저 이 용두산이라는 이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옛부터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러왔고 일명 초량 소산(草梁 小山)이라고도 했던 곳입니다. 특히 조선 숙종 4년(1678년)에는 이 산을 중심으로한 약 10만평, 혹은 11만평 부지에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조선후기 한일양국의 무역과 외교의 현장으로 근대개항시기까지 약 200년 가까이 그 역할을 수행했던 공간입니다. 

특히 초량왜관 시절인 1771년, 조선 영조 47년 3월는 용두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당시 왜관의 왜인들이 총과 창으로 이를 잡았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으니 당시 이 일대 숲이 얼마나 우거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용두산의 남쪽자락 옛 로얄호텔 자리에는 초량왜관 시절  부산요(釜山窯)가 설치되어 일본막부에 진상하는 도자기와 왜관 거주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도자기가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리대로 원래 송현산, 초량 소산, 일본측 기록에 귀두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이 산이 용두산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입니다.

1875년 일본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자행하면서 결국 이듬해인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이 근대 개항되면서 부산항이 개항장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 이후 용두산을 중심으로 과거 초량왜관 지역이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었습니다.

용두산대화재 피해축대_용두산 체육공원 담벽(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이때 그러니까 1876년부터 78년까지 2년간 부산에 머물렀던 일본인 한학자 이시바타 사다(석번정, 石幡貞)라는 사람이 그가 조선을 둘러보고 귀국한 뒤 발행한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이라는 책을 통하여 마치 대마도 용이 대륙을 향해 오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곳을 용두산, 구 부산시청터에 있었던 호기산(呼崎山) 혹은 동산(東山)이라 불리우던 작은 동산을 용미산(龍尾山)이라 기록하면서 이후 용두산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이 산의 원래 명칭 가운데 귀두산(龜頭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소개드렸는데, 동구의 구봉산(龜峯山)이 거북의 몸통이라면 이 산은 머리에 해당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백두대간의 맥이 낙동정맥을 따라 이곳에 이르러 마침내 태평양을 향해 웅대한 향보를 준비하는 전통풍수적 의미가 한껏 담긴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지 7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용두산이라 부르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듣고보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네요. 해외 문화재 환수도 그렇지만 국내에 일제 잔재청산이라는 측면에서도 잘못된 지명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데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해 봐야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이 산자락에 무려 1,093채의 피란민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소개하셨는데 이 정도 규모면 하나의 동 규모로 생각되는데 언제 어떻게 철거되었죠 소장님?

-용두산 피란민 부락에 크게 세번에 걸친 화재가 발생합니다.

먼저 1951년 12월 5일 오후 1시 40분경 지금의 동주여자고등학교 주변에 형성된 피란민 부락에 불이 났습니다. 연탄 화로를 잘못 취급해서 일어난 이 불로 피란민 가옥 206호가 소실되고 213세대 1,126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는 신문 기사가 보입니다. 당시 이 불로 인하여 당국에서는 보수동 책방골목 뒤편 보수산과 용두산 주변의 피란민 가옥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이들 피란민들의 집단 항의와 더불어 엄동설한에 집단 이주할 수 있는 마땅한 대책이 없어서 일반적인 난민구호와 지원을 하는 것으로 그쳤다 합니다. 

용두산신위단 설립기도대회비_ 앞면(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1차 화재가 난 뒤 불과 한달 만인 1952년 1월 2일, 오후 6시 20분경 옛 동광초등학교 동남쪽 , 현재 용두산공영주차장 인근 피란민부락에서 풍로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30동이 전소되고 10동이 반파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두번째 화재는 피해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54년 12월 10일 새벽 4시경 지금 부산호텔 뒤편 피란민 가옥에서 발생한 세번째 용두산대화재가 엄청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불로 용두산 일대 피난민 판자촌 약 1,093채를 불태우면서 이재민 8,000여 명이 발생합니다. 용두산은 완전히 민둥산으로 만든 대화재였지요. 그래 시 당국에서는 화재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대청동 산자락과 영도 청학동 등으로 분산 이주시킵니다. 이 54년 12월 10일 발생한 세번째 화재로 인해 용두산 피란민 부락이 완전히 철거되게 됩니다. 

용두산 판자집 대화재 보도_부산일보 54.12.11(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용두산신위단 설립기도대회비_ 뒷면 수화예방 부적(제공:부경근대사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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