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연 : 안종국 제주불교신문 기자

● 진 행 : 이병철 기자

● 2020년 3월 30일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코너명 : 한주간 교계뉴스

[앵커멘트] 제주4·3 72주년이 다가왔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토요일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가 제주불교4.3희생자 추모위령재를 봉행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행사를 대폭 축소한데 이어 위령재를 찾은 이들에게는 마스크도 선물로 증정했다고 합니다.

한 주간 제주불교 소식, 오늘도 제주불교신문의 안종국 기자를 전화로 연결해서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 기자님?

[안종국]안녕하세요?

[이병철]지난 토요일에 관음사에 제주불교 4·3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위령재가 봉행되었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지난 3월 28일 오후 2시, 제주관음사 설법전에서 제3회 제주관음사 4·3 추모·위령재가 봉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확산우려로 이날 행사는 관음사 본말사 스님들과 유관단체장 소수만이 참석하여 간소하게 치러졌습니다.

[이병철]아무래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각 종교집회를 금해달라는 당국의 요청도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안종국]그렇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비해서 관음사 본말사 스님들과 4·3희생과 관련된 유관단체장만을 초청하여 최소한의 내용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설법전에 차려진 재단에는 특히, 사찰을 사수하며 불교를 지켜내려 목숨까지 내 놓았던 16명의 스님과 4·3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한 분들의 위패가 봉안되었습니다.

추모위령재는 명종5타를 시작으로 삼귀의례와 한글 반야심경을 봉독에 이어 헌화순서로 이어졌는데요, 제23교구장 무소 허운 스님을 시작으로 본·말사 스님들과 제주특별자치도 의회 김태석 의장을 비롯해 4·3희생자 유관단체장 및 관음사 신도회와 화주단, 신행단체장들의 순서로 헌화가 이어졌습니다.

[이병철]허운 스님의 추도사는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안종국]허운 스님은 추도사를 통해 “전 세계가 코로나19확산으로 각종 모임이 제한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 행사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심하다가 줄이고 줄여서 봉행하기로 했는데, 오실 분들은 다 오셔서 기쁘면서도 죄송한 마음이다. 빨리 이 사태가 종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라고 서두 인사를 하였고요,

“오늘은 72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4·3사건의 희생자를 추념하는 날로서, 이곳 관음사는 4·3의 역사의 현장으로 유적들이 많은 곳이다. 그리고 제주 전역의 수많은 4·3희생자 속에는 스님들이 있었고, 많은 피해 중에 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까지 희생자들과 함께 하신 스님들이 이곳 제주 관음사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추모·위령재를 봉행하는 것은 그 피해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병철]제주불교계의 반성과 함께 20대 국회에서 제주4·3특별법이 처리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죠?

[안종국]그렇습니다. 4·3 72주년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움직임은 미약하기만 하다고 하면서, 제주4·3특별법은 국회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주4·3의 허다한 피해를 입은 불교계도 총체적 진실을 밝혀야 하는 당사자로 역할과 책임 매우 크다고 하면서, 새로 구성될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도록 총무원과 협의하여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병철]제주4·3에 대한 불교계의 노력을 주문하는 이유도 밝혔죠?

[안종국]그렇습니다. 불교계의 4·3피해도 정부와 국회에서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진정한 화해와 치유는 총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진실이 밝혀지고 화합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사회의 전체 분열과 증오를 치유하는데 중요한 이정표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대로 우리가 바로 알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희생자들에게 올릴 한송이 국화꽃을 바치는 이유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병철]4·3희생자유족회에서도 인사말을 하셨죠?

[안종국]네. 강학진 부회장은 인사말에서 “제주4·3으로 근대불교 활동을 주도하신 제주 스님들이 대거 희생되고 제주불교 전반에 엄청난 손실이 발생해 역사의 아픈 상처를 안겼다. 오늘 제주4·3으로 희생된 스님들과 불자들의 영혼을 기리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통해 상생과 화해의 정신으로 4·3평화의 꽃을 피우리라 확신한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병철]관음사 신도회 윤두호 수석부회장이 조사를 하셨죠?

[안종국]그렇습니다. 관음사 신도회 윤두호 수석부회장은 조사를 통해 “삼가 2만4천442위 영령에게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지금 제주도 내 곳곳에는 순백의 왕벚꽃과 노란 유채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고 겨울 지나 봄이 왔으나 제주도의 봄, 우리 마음속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가슴을 울리는 말로 서두를 꺼냈는데요, 제주 4·3 72주년을 목전에 둔 우리는 가슴은 미어지고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다고 하면서, 굴욕의 역사, 아픈 비극의 역사를 극복하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을 보고 미소지을 날이 언제가 될지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관음사를 포함하여 수많은 불교사찰이 소실되고 16분 스님이 열반에 들었으며, 종교계 피해가 55퍼센트를 차지했는데도, 얼마 전 정부에서 추가진상보고서가 발간되었지만, 아쉽게도 종교계 피해 관련 사실은 아직 수록되지 않아서 매우 안타깝다고 한숨 어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병철]반가운 소식도 있네요. 제주 4·3희생자 고제선 스님 등 72년 만에 恨 풀게 됐다면서요?

[안종국]네. 제주 4·3당시 희생당한 서관음사의 고제선 스님과 보광사의 성명 미상 스님이 72년 만에 한을 풀게 됐습니다.

제주도는 지난 2018년 제주4·3희생자와 유족 추가신고에 접수된 제주읍 도평리 서관음사의 고제선 스님과 애월면 고내리 보광사의 성명 미상의 스님이 희생자와 유족으로 최종 인정됐다고 지난 27일 밝혔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7일 제25차 제주4·3중앙위원에서 ‘제주4·3희생자 및 유족 결정안’에서 심의.의결 됐습니다.

다만 제주도는 제주 한경면 고산리 은수사 고인봉 스님의 경우 4·3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지만 후유피해 등 세부 내용이 없기 때문에 불인정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한편 제주도는 추가 신청자 8천059명 가운데 7천696명이 희생자와 유족으로 최종 인정됐고, 불인정은 모두 363명입니다.

[이병철]그러면 본격적으로 제주불교에서 4·3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안종국]화산섬을 슬픔과 침묵으로 바꾼 4‧3의 광풍이 제주불교계도 엄청난 피해를 낳았지만, 그 피해를 완전히 밝히지 못하고, 지금도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37개 사찰이 강제매각, 전소, 법당 일부 소각, 불상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하고요, 희생된 승려도 현재 16명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승려 외 사찰 소속 인명피해도 있었다고 하는데, 가해자는 토벌대이며, 피해 시기는 제주4‧3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의 초토화작전 시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병철]사찰들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죠?

[안종국]사찰 건물의 피해는 1개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졌는데요, 37개 피해 사찰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소된 사찰은 18개소였습니다. 법당, 요사채, 객사 등 사찰 내의 건물을 모두 불태워졌고, 소각하였으나 일부만 탄 곳은 2개소입니다. 사용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파옥한 곳이 10개소로 지붕과 벽을 허물어 건물로써의 기능을 없애는 상태로 훼손하기도 하였고, 오랫동안 접근과 사용이 금지되면서 폐허가 된 곳이 4개소, 강제 매각 당한 곳이 1개소로 집계되었습니다. 전소시킨 후 토벌대 주둔소로 활용하거나 육군훈련소 숙영지로 혹은 면사무소로 사용되는 사찰도 있었습니다.

[이병철]관음사가 아무래도 가장 큰 피해를 입었죠?

[안종국]그렇습니다. 관음사는 무장대의 이세진이 승려인 관계로 무장대의 공격 교두보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관음사에 주둔하기도 했구요. 1949년 2월 12일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관음사전투로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법당을 비롯한 7동의 전각이 전소되었고 불상 등이 불태워졌습니다. 불상에 불을 지르니 멀쩡한 날씨에 벼락이 내리치는 일이 있어 혼비백산하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후 2연대 2대대의 주둔소가 되었습니다. 미군정 ‘G-2 보고서’ 등에 의하면 제2연대 제2대대 병력 800여명이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폐허가 된 관음사 경내에 주둔지를 구축하였다고 하는데요, 이때 토벌대 숙영지와 초소 등 27곳의 방어유적과 7백~8백미터의 돌담으로 제1, 제2 방어선을 겹겹이 구축하였던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병철]이외에도 사찰피해가 많았죠?

[안종국]그렇습니다. 법화사는 전소된 후 다시 법당과 요사채를 마련하였으나 1952년 2월부터 1953년 9월까지 육군훈련소 제3숙영지로 이용되어 사찰로써의 기능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선광사는 파옥시켰고 그 목재들은 나중에 남원중학교 건설에 이용되었습니다. 고관사는 1948년 11월 조천면사무소가 불에 타 업무를 볼 수 없게 되자 경찰이 총을 등에 들이대며 강제 매각 당했구요, 오라동 월정사도 당시에 전소되었습니다.

[이병철]제주4·3시기 스님들의 희생도 컸다고 하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제주불교계는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승려들의 피해가 사찰 건물의 피해 이상으로 치명적이었습니다.

현재 조사된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에서 16명의 스님이 알려져 있습니다. 피해 형태로 구분해 보면 총살 10명, 물에 수장 시킨 경우가 2명,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이 1명, 일본으로 도피한 분이 1명, 행방불명이 2명입니다. 가해자는 모두 토벌대입니다. 피해 시기는 사찰 피해와 유사한 시기인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에 걸쳐 많이 발생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여름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이병철]구체적으로 어떤 스님들이 어떻게 희생되셨나요?

[안종국]피해 승려를 개인별로 살펴보면, 먼저 이일선 스님은 1950년 예비검속되어 산지천 앞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고인봉 스님은 은수사 주지였는데, 1950년 이일선 스님이 예비검속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입적하였습니다.

고정선 스님은 수원사 주지로 1949년 봄, 경찰에 끌려가 고문 끝에 총살당했습니다.

이세진 스님은 1942년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는 등으로 불교의 경제적 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분인데, 도민들의 희생을 보고 분개하여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했습니다.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과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하며 활동하였다는 증언이 있는데, 1949년 초,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다가 일시 풀려났는데,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다시 잡혀가 산지 앞바다에서 수장당했습니다.

[이병철]무장대로 잡혔다가 조사 후 풀려났으나 다시 붙잡아 수장시켰다는 거죠?

[안종국]그렇습니다.

[이병철]계속 다른 스님들도 소개해 주시죠.

[안종국]고제선 스님은 서관음사 승려로 이세진의 상좌였는데, 토벌대의 서관음사 소각 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원문상 스님은 법화사에서 활동하였는데, 중문중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자이셨습니다. 그러다가 예비검속에서 잡혀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병철]금붕사의 이성봉 스님도 마을 주민을 숨겨줬다가 총살을 당했다면서요?

[안종국]그렇습니다. 이성봉 스님은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주민을 숨겨주었다고 하여 토벌대가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백인수 스님는 용장사 승려로 도평마을 집단 학살로 희생되었고, 신홍연 스님은 함덕리 마을 청년들을 숨겨주었다고 귤나무에 묶인 채 군인들이 마을 청년들에게 죽창을 들고 스님을 찌르게 하여 살해되었습니다.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는데 가부좌 상태로 굳어 있어서 시신을 펼 수가 없는 지경의 것을 상좌 김두전의 기도로 몸을 풀어 매장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병철]죽창으로 찌르고, 총살하고, 비참하기가 말할 수 없었군요?

[안종국]이외에도 원만암 승려였던 양홍기 스님은 홀로 절을 지키다 토벌대에게 총살당했고요, 단산사 승려인 강기규 스님도 단산사 경내에서 토벌대에 총살당했습니다.

김덕수 스님은 월정사 승려로 1948년 11월 13일 월정사에서 잡혀 나가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당했고, 김유신 스님은 북촌리 집단학살 당시인 1949년 1월 17일 마을주민 40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가을 애월리 보광사에 무장대가 다녀갔는지 여부를 조사하던 토벌대에게 보광사 경내에서 승려가 총살당했는데, 지금은 그 승려의 성명을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병철]제주불교 4·3피해가 엄청났군요?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진상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명예회복을 위한 그 어떤 활동도 드러나지 못했는데요?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제주불교계는 해결해 나갈 계획인가요?

[안종국]현재는 제주불교4·3희생자 추모위령재를 봉행하기 위한 추모사업회가 꾸려져 있는데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보면 됩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4·3기념사업회에서 불교계에 대한 부분이 배제되고 있었고, 제주불교계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의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불교계가 피해가 너무 커서 이를 수면 위로 부상할 힘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이병철]오늘 말씀 전해준 안종국 기자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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