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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선임기자     
출연 :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
방송 : 11월 10일(일요일) 저녁 6시(BBS 라디오)


김봉래 : 네.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요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 정도로 성장한 문화 강국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발 맞춰서 우리 한국불교도요, 세계불교와 함께 호흡하고 나아가서 세계 불교계를 이끌 수 있는 그런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 이 시간에는요, 한국 현대불교사에 큰 자취를 남기신 성철 큰스님의 제자로서 성철 큰스님의 유지를 잇고 전하는 데 주력하고 계신 분 모시고, 국제포교와 관련한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사찰이죠, 달마사에서 법문을 하고 돌아오신 백년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과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네. 오늘 백년불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원택스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원택스님 : 네.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봉래 : 네. 스님 요즘 근황 어떠신지 간단히 말씀해주실까요.

원택스님 : 저는 주거지는 해인사 백련암인데 또 부주거지는 부산 중앙동에 있는 고심정사, 거기에 회주로 있으면서 포교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또 세 번째는 총무원의 민추본 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상근직이 아니더라고요 비상근직이니까 월급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월화만 왔다 갔다 하기로 하고 이렇게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북쪽에 문이 다 닫혀 있으니까 제가 주변분들 보기 대단히 송구하게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활동을 못하고.

김봉래 : 네. 어쨌든 우리는 남북문제가 잘 풀려야만이 안보뿐 아니라 또 경제문제 그 밖에 또 한민족으로서 정신문화까지 이렇게 모든 게 잘 술술 풀려나갈 것 같은데요. 지금 오늘 원택스님 모신 것은 국제포교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 국제포교사회 회원들과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 한국 사찰이죠, 달마사 순례를 하시고 또 법문까지 하고 오셨는데, 이 러시아 달마사는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우리 성철 큰스님의 제자죠, 원명스님, 원명스님이 국제포교의 원력으로 세운 여러 해외 사찰들 가운데 한 곳인데요, 이번 순례법회 일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셨는지요.

원택스님 : 저희들 10월 4일 날은 가는 날이 되어가지고 오후 1시 30분에 인천공항에서 출발을 해서 모스크바까지 시차는 6시간이라 하는데, 비행기는 한 9시간 조금 더 걸려서 모스크바 시간으로 그 날 오후 4시 30분에 도착하더라고요. 그래서 도착해서 달마사는 그날 바로 가지 못하고 숙소에서 이런 저런 다음 일정을 가지고 그렇게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10월 5일 날 아침 일찍 달마사 가는 줄 알았는데, 오전 일찍에는 사람들이 모일 수가 없어서 오후 세시 반부터 행사를 가지기로 하고 그 시간에 러시아 정교의 본산인 세르기예프 포사드 수도원을 견학 간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이 왕복이 160km 인데, 길은 뭐 4차선, 6차선 이런 넓은데, 곳곳이 수리한다고 해서 멈춰 서 있는, 그런 길이 막힌 곳이 많아가지고 돌아오기는 3시까지 돌아온다 했는데 한 4시 30분이나 되어서 돌아오다 보니까 3시 30분에서 5시까지 여러 가지 이제 연등 만들기라든지 이런 것을 같이 러시아인들하고 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못하고 그 분들만 우선 지도를 받아서 하면서 그게 좀 아쉬웠다는 생각이 들고.

김봉래 : 아. 같이 하려고 했는데 이제 같이 못하게 되었군요.

원택스님 : 예. 한 30분 정도만 겨우 같이 앉아 있어서 하게 되었고, 그리고 5시부터 이제 법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집을 이제 뭐 상상만하고 아파트라고해서 얼마나 큰 아파트인가 했는데, 그것은 러시아에서는 뭐 그런대로 큰 아파트에 속한다고 하는데.

김봉래 : 아. 몇 평정도?

원택스님 : 그게 우리 평수로 실내 평수로 하면 한 30~40평, 그래도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김봉래 : 아. 러시아에서는. 한국에서는 그렇게 큰 것은 아닙니다.

원택스님 :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 러시아 본토인들이 한 30명, 또 우리 한국인, 러시아에 사시는 한국인 불자들 한 30~40명 해가지고 60~70명이 모이니까 꽉 찬 그런 공간이 되었습니다.

김봉래 : 그리고 이제 법회 끝나고 나서 또 다른 지역도 좀 순례도 하셨고요.

원택스님 : 그래서 그 날 법회를 마치고 이제 좁은 곳이니까 거기서 저녁 대접을 못하니까 시내 우리 러시아 불자가 운영하는 한식당이 있더라고요, 그 한식당으로 옮겨서 한 70여 명 그 분들 저녁 대접을 하면서 정말 화기애애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러시아 순례에 국제포교사가 주축이 되어서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국제포교사회가 단체로 이렇게 해외 순례를 한 것은 처음이고 거기에 또 우리 원택스님이 법문을 해주신 아주 뜻 깊은 상황이었는데, 이번에 순례 법회를 다녀오셨을 때  감회가 크셨을 것 같아요.

원택스님 : 처음에는 저는 (원명)스님이 해외포교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해외 포교 하는 것 고생했다고만 들었고, 스님이 포교해 놓은 장소로서는 그 전에는 싱가포르의 연화사(연화원)에 다녀오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해인사, 우리 포교원이라는 이름으로 그 두 군데만 갔다 왔을 때는 그렇게 스님 떠나시고 물론 갔다 왔지만 옛날이라도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김봉래 : 네. 지금 말씀하시는 스님은 이제 우리 원택스님의 사형이신 원명스님을 이야기 하시는 거죠.

원택스님 : 예. 그렇습니다. 스님께서 모스크바의 가서 이제 풀고 하시는 것이 1997년인 것 같습니다.

김봉래 : 네. 20년, 22년 전.

원택스님 : 97년에 처음으로 가서 모스크바에 처음에 불자 가족을 찾으니까 다섯 가족을 그것을 참 밑자락으로 해서 그래서 이제 스님께서 모스크바 한 번씩 드나들면서 봄가을로 시간 날 때 드나들면서 그 분들을 지도하다가 2000년에 이제 지금 말씀드린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달마사라고 간판을 붙이고 이렇게 개원을 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들락날락 거리면서 2003년에는 청소년회도 만들어서 스님께서 그래서 정식 간판으로 단단히 이제 모스크바 포교에 정성을 쏟겠다고 결심을 하셨던가 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003년 9월 23일에 스님께서는 사제가 있는 원타스님 있는 청량사에서 열반에 드시게 됩니다. 지병이 계셨던 모양입니다. 우리들은 몰랐는데 스님은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그렇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번에 간 그 아파트의 법당을 만들을 때 스님이 어디서 자금을 모으셨든지 나름대로 자금을 좀 모으셔가지고 그 돈으로 뭐 모스크바 집값을 쉽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쉽게 아파트 하나 구할 수 있을까 했는데 그 자금이 모자랐을 때 우리 지금 국제포교사 회장하고 계신 김성림 보살님이 나머지는 도와주셔서 그래서 그 아파트를 해서 모스크바 법당을 만들었는데. 그 때는 사회주의 국가니까, 사회주의국가는 1년 이상 주거 경력이 있어야 소유권이 이전이 되는데 스님은 왔다 갔다 하시니까 소유권을 이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고, 또 우리 회장님도 거기 가서 머물러서 할 수도 없고 이래서 지금까지는 소유권이나 이런 것들이 좀 모호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현재는 거기서 우리 달마사의 지호천 거사님과 또 대비심 보살님 내외가 달마사를 관리 운영하고 있었는데, 17년이나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원택스님 : 이 집이 내 것이냐, 누구 것이냐 분간하기 전에 그 분들께서 러시아에 있는 우리 한국 불자들과 이 내외분이 앞에서 지금까지 법회를 이어오고 있는 그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렇게 정말 김성림 보살님도 가서 보고는 참 고맙다고 보살님을 얼싸 안고 인사를 한없이 올리더라고요.

김봉래 : 그런 상황을 볼수록 사실은 국제포교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우리 원명스님이 더욱 그리울 수밖에 없는데, 아까도 말씀하셨습니다만 러시아 달마사 외에도 아까 싱가포르 연화사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쪽도 상황이 비슷한가요?

원택스님 : 그래서 지금 스님께서는 출가한 연한이 33년 되었는데, 그것을 일생을 분석해보면 19살인가 20살에 대구 능인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백련암으로 출가를 하시고요, 그래서 백련암에서 행자 보내고 1~2년 참선을 하고 있다가 73년 쯤 큰 절 선방으로 가셔서 10여년 동안 선방에만 주로 이래 탐방하면서 정진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스님께서는 나머지 20년은, 33년의 출가 이력 가운데 20년은 해외 포교를 위해서 보내셨다고 이제 그렇게 통계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싱가포르 연화사(연화원), 연화사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으면서 그것은 울산 대혜심 보살님이 비용을 대면서 지금도 포교활동을 도와주시고.

김봉래 : 네. 96년에 개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택스님 : 하여튼 제일 먼저 싱가포르에서 개원이 되었다고 그러고, 그 다음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해인사, 거기에는 저희들 문도들이 죽 도와주다가 한 10여 년은 못가고 있으니까 거사님들이 거기는 인도네시아는 회교국이니까 또 그 지역에 살지 않으면 절의 유지 관리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는 이제 법인으로 등록을 했고 그렇게 되니까 스님의 역할은 1년에 가서라도 기도나 봐주고 이래 오니까 좀 야하게 표현해서 월급쟁이 스님밖에 안 되는 그런 위치로 법인을 만들어지니까 스님들이 갈 흥미를 못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제 자기들 중심으로 그렇게 인연 닿는 대로  스님을 모시고 가서 보는 정도, 그리고 도네츠크 정각사, 우크라이나 불심사, 이런 곳들이 이제 스님의 자국만 남아있는 곳입니다, 활동은 못하고.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정각사는 지금 법웅스님, 이번에 활안 큰스님께서 오늘, 어제 49재를 올렸는데. 거기 맏상좌 되는 법웅스님이 지금 대신 해제 때 타슈겐트의 정각사를 갔다 왔다 하면서 포교를 열심히 하시고 계시고, 그리고 이제 키르키스탄의 보리사라든지 그것도 이제는 뭐 지금 흔적도 없지요.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원명사는 스님의 상좌 방글라데시 일보라고, 일보라는 그 스님은 우리 원명스님 지원을 받아서 거기서 절을 짓고 해서 포교를 지금 상당히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그것은 그대로 하고 있고, 그 다음에 네팔에 붓다부미절이 있는데, 거기서도 뭐 상좌들이 이번에 불사를 한다고 우리 백련암에 화주를 하러 왔습니다. 한 20억 불사를 할 거라고. 그렇게 활동을 하고 있고. 그리고 러시아, 이번에 갔던 달마사, 또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강화도에 연등국제선원 그것은 지금까지 저렇게 유지, 발전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연등국제선원은 지금 굉장히 발전을 했죠. 템플스테이도 아주.

원택스님 : 지금 절 짓는다고 해당 주지가 욕을 보고 있습니다.

김봉래 : 서래선원을 지금 짓고 있죠. 보면은 어쨌든 원명스님이 뿌려 놓은 씨앗이 곳곳에 인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하는 쪽에 좀 방점을 두고 싶은데, 이게 사실은 원명스님이 그 큰스님인 성철 큰스님의 제자로서 선방수좌로 살다가 어느 인연 속에서 국제포교 쪽으로 어떤 큰 흐름을 이제 옮기셨지 않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과연 성철 큰스님께서 선수행만 하지 말고 이렇게 멀리 내다보시면서 국제포교의 전진 기지에  원명스님을 보내셨던 그런 어떤, 이런 게 굉장히 궁금해요.

원택스님 : 지금 이래 말씀하시듯이 스님께서 국제포교 이것을 느끼시고 원명이 네가 나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제 원명스님 당신의 ‘사람이 좋다’라는 자기 책에 자술해놓은 것을 보면 선방에 한 10년쯤 앉아 있고 선방 공부에도 깊은 맛을 들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도암이라고 저는 듣고 있는데, 머릿속에 화두는 어디 날아가 버리고 난데 없이 영어 단어가 와글와글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오는데 미치겠더라는 겁니다.

김봉래 : 네. 저도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만.

원택스님 :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할까 스님 혼자 그 10년 동안 들고 오던 그 참 잘되던 깊은 화두는 어디 가 버리고 이렇게 난데없는 영어 단어가 쏟아져 들어와 사람을 괴롭히고, 한 철 다 지내고 나서는 이렇게 해서는 화두 공부도 안 되고 왜 이리 참 영어 단어만 내가 영어 잘하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들어 오냐 생각하니까, 그 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이제 참선은 이만큼 열심히 했으면 이제 영어 배워서 해외 포교로 나가라는 어떤  부처님 암시인가 하는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자신을 가지고 해제하고 백련암에 와서 큰스님한테 말씀을 올리는데, 이게 말하자면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큰스님께서는 해제 때마다 오면 화두 잘 잡아라, 참선 잘 되어서 도인되어라, 지금 도인 없잖아, 이런 말씀...

김봉래 : 그렇게 당부를 하시는데, 정작

원택스님 : 이렇게 받고 있는데 정작 와서.

김봉래 : 본인은 이제.

원택스님 : 본인은 화두 안 되거든요. 그 말씀을 어떻게 꺼낼까. 하여튼 뭐 스님께 쫓겨 나가든지 내동댕이쳐지든지 말씀은 드린다 하고 용기를 내서 스님께 그렇게 이래 영어가 너무 맴돌아서, 제가 전생에, 흔히 불교는 제일 하기 쉬운 핑계가 전생 아닙니까.

김봉래 : 네. 인연.

원택스님 : 전생에 제가 뭔가 큰 일에 원을 세웠던 모양인데, 그것이 영어로써 우리 한국 불교를 세계에 포교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 스님 제가 국제포교 하러 영어를 새롭게 배우는 그런 암시를 받고, 제게 허락해주시면 제가 국제포교를 해서 한국불교를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게 스님께서 온갖 야단을 다 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네가 이렇게 화두가 날아가 버리고 영어만 맴돈다고 이래 하시면서 그러면 그 길로 가야지, 이러면서 쉽게 야단도 안치시고, 그러면 국제포교사 네 원대로 해봐라, 그러면 그게 네 말마따나 전생에 업인 것 같으면 화두보다 더 잘하지 않겠나, 이렇게 해서 너무나 결정을 쉽게 큰스님께서 해주셔서 그렇게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하십니다. 그런데 영어 배우는 이것이 스님께는 이만 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연스님 하고 처음에는 같이 스리랑카 불교대학에 가서 영어도 배우고 불교학도 배우고 하는데, 우리 원명스님 입이 짧았던지 도저히 스리랑카에서 카레밥을 먹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이래저래 억지로라도 참고 지낸다고 했는데도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음식이 안 맞아서. 한국에 돌아오니 강습소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하려고 해보니까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집중이 안 됩니다. 집중이 안 되고 또 우리 스님이 그것을 하러 갔을 때는, 영어 배우러 세계 포교하러 간다고 했을 때 큰스님 특명을 받고 스리랑카 간다 했으니 보살님들이 있는 성의 없는 성의 해가지고 학비를 마련해서 주실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공부 다 마치지 못하고 들어오니까 그 보살님들이, 보살님들이 스님에게 그런 눈치를 줬겠습니까마는 스님은 보살님들 쳐다보기가 민망해서 그래서 런던으로 갔다고 합니다. 미국이 아닌 영국 본토 발음을 배우고 온다고. 거기 가서 런던 가서 거지 생활과 같이 참 일생 일대 밥도 굶고 그래 하고 거지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 때 영어 배우러 다녔다. 그 때 마침 태국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무진 비구니를 그 가난한 시절에 거지 시절에 런던 거리에서 만나니까, 그래서 둘이는 기본 영어는 통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왔냐, 한국에서 왔다. 뭐하냐, 영어 배우러 왔다. 그럼 지금 어느 절에 있느냐. 뭐 어느 절에 있지도 못하고 지금 거주도 못하고 거지처럼 산다. 무슨 소리냐, 태국 절이 있지 않느냐. 태국 절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니까 내가 소개해주마, 이래가지고 스님 한 2, 3년 영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게 되고, 무진스님도 한국의 어느 스님보다도 우리 원명스님이 영어를 잘하는 스님이 되었다고 저한테 자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 인연으로 원명스님이 국제포교의 장을 또 새로운 장을 열어갔던 일화가 되겠습니다. 이번에 러시아 가서도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면서 참 감회가 새롭고 동참한 국제포교사 또 여러 현지 교민들께 이런 저런 당부를 하셨을 것 같아요. 법문을 통해서.

원택스님 : 그래서 거기 가니까 뭐 어려운 법문은 저도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이 분들한테는 그래도 한자를 써서는 안 될 것 같고 순수한 우리말로 좀 풀어서 간단하게 몇 말씀 드려야 안 되겠나 해서 늘 스님께서 하셨던 법문 중에서 하셨던 법문을 저도 그대로 적어가서 낭독을 했습니다.

김봉래 : 아. 아예 낭독을.

원택스님 : 그래서 이제 스님께서 큰 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계십니다. 마음이 부처다. 오직 자기 마음을 깨우쳐야 한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이 근본을 놓쳐 버리면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을 잘 계발하여야 한다. 자기 마음속의 무진장한 광맥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이니 그것을 잘 계발을 해야 되고 그것도 계발하기 위해서는 매일 모든 중생 행복하게 해주소서 하고 108배를 해라. 108배가 아무것도 아닌 수행이라도 108배를 매일 하게 되면 300하고 500배 하게 되고 1,000배도 하게 되고 3,000배도 하게 되고 다 자기를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소서 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해라.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깨우치고 성불하는 것이 불교에서 영원한 철칙이다. 내 마음을 깨우쳐야 한다는 성철 큰스님 당부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우리가 실천하고 동시에 원명스님의 못 다한 모스크바 불교 포교 원력을 이루도록 여기에 모이신 모든 사부대중들이 부처님 지혜의 눈을 갖추게 되기를 진심으로 이제 기원합니다 라고 저는 그렇게 법문을 했는데, 통역은 얼마나 잘 되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봉래 : 예. 아마 거기 참석한 분들이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철 큰 스님의 어떤 고구정녕한 가르침, 또 원명스님의 어떤 큰 뜻, 이런 것들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세계적으로 한국불교에 대한 기대감은 굉장히 높거든요. 해외에서 저도 국제포교사 활동도 하고 나가서 보면 굉장히 한국불교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높아요. 세계에는 대개 보면 남방불교가 우세하거든요. 한중일이 있습니다만 동양권에서는 한중일인데, 세계 전체로 가면 남방불교 내지는 티벳불교가 많이 우세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그런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 발표도 하고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놀라고 이런 대승불교의 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이 그렇게 고스란히 대승불교권에서 잘 전승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큰스님들께서 공동체를 잘 유지해서 동안거, 하안거 해가면서 꾸준히 이렇게 전통이 천년, 이천년 내려오는 것에서 대해서 굉장히 놀라고, 특히 이 간화선(看話禪)의 가능성에 대해서 굉장히 놀래요. 굉장히 폭발적이라고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도 간화선의 국제화 이런 것을 지향하고는 있습니다만 이제 조계종도 종단 개혁이 25년 이상 되어 온 상황에서 한국불교의 그 어떤 그 뭐랄까 잠재력, 그런 것을 어떻게 좀 더 공감대를 확산시켜나갈까, 그게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스님께서도 총무부장도 오래 하시고 종단 소임도 많이 보시고 하면서 종단 안팎에서 그런 가능성 이런 것을 좀 확인도 하시고, 어떤 면에서는 이런 것은 좀 아쉽다 이런 것도 느끼셨을 것 같은데, 스님 어떻게 우리가 나아가야 될지요.

원택스님 : 우리 종단 전체 현실에 대해서 다양하게 분석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또 우리 선방에 앉아 계시는 선방수좌 스님들도 토로하는 고뇌를 보면 선방에서 요새 간화선에 대한 화두를 드는 사람들이 옛날에는 100%라고 하면 요새는 한 60%고, 그 중에 이제 남방에 갔다 온 사람들이 많이 섞이다 보니까 남방 위빠사나를 선전하고 이런 게 있어서 좀 선방 분위기가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오히려 마음을 깨우치려고 그러면 우리의 어떤 동북아 불교 전통은 어떻게 되었든 간에 화두를 깨우치고 화두를 참 오매일여 되도록 우리가 열심히 하는 끝에서 깨치는 것이지 그 노력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닌데, 요새는 그런 노력들이 헤이해지고 있는 현실, 또 그런데 대해서 수좌스님들도 많이 안타까워하고 계시고, 또 시내에 가면 언제 어디서 들어왔는지 남방불교도 버젓이 스님들이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이런 데에서 공식적으로 여기서 법회를 보고 하는 스님들이 뜻밖에 많이 늘었더라고요. 이래 많이 늘어서 이제는 우리 간화선의 전통, 조계종의 그런 모습들이 자꾸 한 구석이 무너져가는, 뭔가 갉아 먹히는 이런 참 위기의식을 느낀달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큰스님들께서 쌓아 놓은 간화선의 전통 또 그 속에서는 분명히 인도불교가 다 하지 못한 뛰어난 내용이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살려 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런 것을 자각해서 저희들이 화두를 드는 이것에서 남방 위빠사나나 사마타에서는 호흡법이다 해서 쉽게 접근이 되는데, 우리 화두 드는 것이 기본이 지금 너무 어렵게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화두해라. 화두 의미도 모르고 어째서 삼서근(麻三斤)이라 했는가만 하면 깨우친다고 하니까 정말 어떤 점에서 막연하지 않습니까.

김봉래 : 처음에 막연할 수 있죠.

원택스님 : 이것 막연한 것을 좀 남방처럼 조금만 그런 것을 차곡차곡 차례를 지어줘서 마침 화두를 들게 하는 그런 좀 앞의 선험적인 선의 어떤 친숙함 이런 것을 먼저 우리가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그런 또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김봉래 : 그렇습니다. 한국 불교는 어떻게 보면 통불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다양한 수행전통들이 다 들어 있거든요. 말씀하신 절 수행, 주력, 또 지금 참선 등 여러 가지가 다 있는데, 옛날 큰스님들도 보면 참선을 죽 근간으로 하시면서도 또 조석으로 염불도 하시고 이렇게 보조 수행을 같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한국불교가 그런 다양한 수행 방편을 이렇게 함께 해왔던 그런 의미를 우리가 되돌아본다면 지금의 남방불교도 또한 그런 큰 흐름 속에서 하나의 보조적인 수단으로서 얼마든지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큰 흐름은 간화선으로 가더라도 말이죠. 위치만 잘 지어주면 그것이 어떤 동양 전통의 간화선을 해나가는데 굉장히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불교의 아주 중차대한 과제가 놓여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데. 사실 백련불교문화재단은 바로 이러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어떻게 잘 계승해서 확산시켜 나갈까 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곳이잖아요, 스님. 어려움도 많으실 것 같아요.

원택스님 :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선 것도 다름 아니고 큰스님께서 1981년에 종정이 되시면서 그 전에 젊었을 때부터 봉암사 시절부터 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셨는데 세상이 알아주지를, 너무 늦게 또 스님 책도 늦게 냈지만, 1982년에 <선문정로>가 나오고 뭐 세상이 참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단어가, 그 전에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가 유일한 한국선의 전통처럼 왔는데, 그게 아니다, 돈오돈수가 정통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참 한국불교계가 벼락을 맞은 그렇게 이제 보조 연구하는 분들 참 모골이 송연했다 그럽니다. 감히 해인사에 계시는  스님이 750년 전의 국사를 비방하고 나오다니 이런 데 대해서 통분을 느꼈는데, 아직도 뭐 이런 이론은 돈오점수, 돈오돈수 이것은 아직도 뭐 대립 상태에 있다. 요새는 일각의 학자들께서는 성철스님도 옳은 말씀을 하셨고 보조스님도 우리 중생에 맞게 수행 길을 쉽게 말씀하셨으니까 돈오돈수의 바른 정신과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의) 바른 정신을 찾아내서 두 어른 스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를 깨쳐 가는 그런 합일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이제 이론들로 가까워지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김봉래 : 그렇죠. 그러니까 돈오돈수적인 수행이 필요한 분께는 돈오돈수적인 수행으로 나가는 게 좋겠고 또 돈오점수적인 수행이 맞는 분께는 그런 수행 방법이 더 효과가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좀 해보거든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중생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응병여약식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수행법이 있지만 자기한테 맞는 수행을 고르는 것 자체가 소중한 인연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염불이 맞는데 억지로 참선시키면 어렵듯이 자기에게 맞는 수행을 빨리 찾는 게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원택스님 : 자꾸 그런 노력들을 지금 많이 해야 되는데, 우선은 그런 이론적인 문제보다도 절집에 자꾸 인적이 끊어지니까, 스님들이 되는 사람들이 자꾸 줄어지고 있으니까, 그것부터도 참 초미의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있는 사람들이라도 빨리 열심히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빠른 길을 찾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많습니다.

김봉래 : 네. 뭐 우리 성철 큰스님처럼 한 분이 일당 천, 일당 만을 하시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백련불교문화재단 하시면서 또 어떤 포부 같은 것도 계시고 그럴 것 같습니다.

원택스님 : 글쎄, 이번에 원명스님 달마사 가서 하신 일은 이래 보고 느꼈지만 한 사람의 원력이 얼마나 큰 일을 달성할 수 있는지, 만일에 원명스님이 이렇게 다 오늘까지 십여 개 국의 포교원이 되었으면 참 최고의, 제2의 숭산스님이 되어 있을 거라는...

김봉래 : 그렇습니다.

원택스님 : 그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신 사형님이 너무 아쉽고, 앞으로도 우리 사형님과 같은 그런 원력을 세우는, 좀 국제포교에 한국불교를 앞장서서 알리는 그런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김봉래 : 네. 우리 백련불교문화재단을 이끄는 우리 원택스님께서 그 중심에 계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고요. 이제 마무리하는 선에서 한국 언론계에 부탁하고 싶은 말씀, 다른 부분은 굉장히 많이 선진 분야로 많이 가고 있습니다, 아까 경제 부분도 세계 10위권, 요새 정신적으로도 한류 문화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형편인데, 사실은 정치권이 굉장히 열악하고 특히 언론들도 굉장히 제대로 정론을 펼치기가 어렵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혹시 불교방송 같은 불교 매체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 계신가요.

원택스님 : 그동안에 참 BBS나 BTN 두 방송국이 제일 선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방송이 없던 그런 시대와 지금 두 방송이 있는 시대는 정말 우리 신도님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못하는 그런 어떤 쉬운 법문, 또 주변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우리 신도님들이 쉽게 많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드리는, 스님들이 못하는 그런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예. 오늘 원택스님 모시고 귀한 시간 가져봤습니다.

여러분 오늘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과 함께 한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선구자 한 분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선구자의 큰 뜻을 이어가는 것은 온전히 남은 우리들의 몫이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로 정법의 원력을 더욱 다져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일요일 저녁 시간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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