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 피해보상 이뤄져야

● 출 연 : 정영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사무처장

● 진 행 : 김상진 부산 BBS 방송부장

● 프로그램; 부산BBS ‘라디오830 목요인터뷰’

● 방송일시: 2019년 10월17일 목요일 오전8시30분

앵커) 어제 부마민주항쟁 4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국가기념일 지정 이후 첫 기념식이었는데요, 감회가 어떠셨습니까?

답) 국가에서 부마민주항쟁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항쟁후 40년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기념식을 했다는 것은 부마민주항쟁 참가자, 관련자들의 경우 굉장히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행사였지요. 대통령님의 진정성 있는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와 항쟁 당사자들에 대한 예우는 이들이 정말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것이 잘한 일이었구나 하고 느끼는 행사였다고 봅니다.

앵커) 그동안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으셨는데요, 어땠습니까?

답) 네, 부산과 경남 시민들을 비롯하여 전국민의 열망 속에서 마침내 지난달에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민과 관이 함께 협력했는데요. 작년 9월, 부산과 경남의 지자체와 관련 단체가 국가기념일 일자를 10월 16일로 합의했고,작년 10월에는,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범국민추진위원회’가 출범하여 부산과 경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로 서명운동을 진행해 올해 4월까지 약 60만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부산시민들의 열망과 지지가 있었기에 부마민주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이 가능했습니다.부산시민들께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앵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답)가장 큰 것은 민간에서 자발적 주도적으로 진행하던 기념식을 국가와 해당 지자체가 저희 재단과 부마민주항쟁관련단체,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기념한다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번같이 대통령님이 참석하시어 국가 공식행사로 만들었다는 것은 큰 성과 일 것입니다. 또한 참가자들은 이것 때문에 범죄자처럼 살았는데 이제는 국가에서 인정한 자랑스런 역사 현장에 있었다는 자긍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앵커) 올해가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인데요, 이와 관련해 어떤 행사들이 마련돼 있습니까?

답) 이제 행사는 시민과 함께 그리는 걸게그림, 상황재현공연, 전국마당극한마당, 청년원탁대토론, 민주대동큰잔치, 부마민주항쟁표석 제작과 제막식, KBS부마민주항쟁 40주년 경축음악회 등 대부분 행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행사는 부마민주항쟁국제학술대회가 오늘은 창원에서 내일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립니다. 부마1979 유신의 심장을 쏘다라는 이름의 아카이브 순회전시가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리고 있구요, 11월에서 12월까지는 경기도 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실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부마민주음악제가 11월에, 부마민주영화제가 역시 11월에 열리는데 이들 행사는 마산에서 열리게 됩니다.

앵커) 그렇다면 청취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마민주항쟁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정치, 경제적 배경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1970년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유신 헌법을 제정해 억압한 것이 크지요.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는 정권 연장을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헌법을 고치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 폭압적 통제사회를 만듭니다. 이것은 필경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부마민주항쟁인데.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항한 수없는 시도. 부마민주항쟁에 임박해서는 대구에서도 계명대생들 2~3천명이 시위를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결국 부마민주항쟁으로 표출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유신독재정권의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경제적 배경은 부산과 마산은 신발, 섬유 등 경공업 비중이 높아 불황에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제품들은 돈이 없으면 먼저 줄이니까요. 부산은 아니지만 대표적 사례가 YH여공사건입니다. 가발공장인데, 가발이 팔리지 않고,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문제가 발생하자 폐업하고, 여공들이 들고 일어나지요. 이걸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당에서 농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공권력을 동원해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경숙이라는 노동자가 사망하게 되지요. 이 사건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학생들이 만든 선언문에도 중요하게 적혀 있어요. 그리고 부가가치세 도입 등도 국민들을 어렵게 했습니다. 이런 정치, 경제적 사건들이 겹치면서 부산대에서 먼저 시작하고 수많은 시민, 노동자들이 합세하자, 독재정권에서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마산으로 확대되자 부산에 계엄령을 내리고, 마산에는 위수령이라는 것을 내려 우선 봉합하려 하지만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끝장나게 됩니다.

앵커) 처장님은 부마항쟁 당시를 기억하시는가요?

답)부마민주항쟁 당시 저는 부산 서면쪽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면에 대한극장이라는 큰 극장이 있는데 그 큰처에 탱크가 주둔하고 있어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은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는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가 남포동으로 진출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참가하여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부대가 시청주변을 둘러싸고 서면, 남포동을 비롯한 시내 쪽에 탱크를 앞세워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부산대학교 등 각 대학 앞에도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었지요.

앵커) 그런데 부마민주항쟁 시작일을 두고 약간의 갈등이 있었는데요, 어떻게 정리됐습니까?

답) 10여 년전부터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기념일에 대한 이견이 부산과 마산에 각 있어와서 합의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관계로 국가기기념일 추진이 번번이 무산되었지요. 2018년 부마진상규명위에서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진상보고서를 발표한다고 하면서 그것에 불만을 부마관련단체에서 제기하게 됩니다. 이 보고서는 그동안 부마진상규명위원들의 면면에서 제대로 된 것이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들 뉴라이트 출신 위원들이었으니까요. 물론 보고서 내용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부실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적극 협력하게 되고, 40주년이 되는 이번에는 국가기념일을 지정하자는데 공감하고, 극적으로 10월 16일로 지정하자는 의견으로 취합됩니다. 지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보니 행정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서로 조금씩 양보해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해 같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앵커) 부마민주항쟁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지금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답) 관련자 보상은 현재 부마진상규명위에서 참가자 신고 접수를 받고 있습니다. 일정정도 보상을 받은 분들도 있는데, 너무 작아서 생활비에도 도움이 안된다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부마관련법의 문제도 있습니다. 부마의 특성상 10일이상 구금된 분들이 거의 없는데, 30일 이상된 사람들에게만 생활비 등 보상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혜택을 받는 분들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현재 법개정을 추진 중에 있구요. 이와 별도로 민주유공자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앵커) 부마민주항쟁이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부마항쟁의 의의를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과정 속에서 살펴보면요. 먼저, 부마민주항쟁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일반시민이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선 대규모 시민항쟁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10·26으로 인한 박정희 사망은, 부마항쟁 진압에 대한 지배층 내부분열로 일어난 일인 거죠. 셋째, 부마민주항쟁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정신의 물꼬를 열었습니다. 부마항쟁의 10월 정신은 다음해 광주의 5월 정신으로 이어졌고, 87년 6월항쟁으로 계승되어 이 땅에서 군부독재를 영원히 몰아내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인해 문재인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을 4·19처럼 헌법전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죠.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대한민국 헌법적 가치로 기리기를 희망합니다.

앵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이 다른 민주화운동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답)부마민주항쟁은 부산에서 시작, 마산까지 확산되고 경남까지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단초를 제공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 시기 전국적 확산이 안된 것이지요. 또다른 군부독재가 들어서면서 서울의 봄,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지만서도요. 그리고 무혈혁명이라고 할까요. 거의 사망자가 없습니다. 자꾸 부산, 마산의 항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문제고요. 사실 부마민주항쟁 이전에 많은 유신독재에 항거한 투쟁들이 있어왔는데, 부마에서 폭발한 것이고, 이후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었음에도 저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안타가운 사실입니다.

앵커) 부마민주항쟁과 40년이 지난 현재 촛불집회를 비교한다면?

답)사실 비슷한 측면도 많이 있는 것 같네요. 희생자가 거의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대학생으로 시작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점차 규모가 늘어나 공권력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도 있습니다.

앵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지난해 설립됐는데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답) 2018년 8월 22일 발기인 100여명 참여해 설립되었습니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주항쟁 정신을 기념, 계승하여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말입니다. 올해는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과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통해 민주, 인권, 평화의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알리려는데 사업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앵커) 끝으로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해 청취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부산,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부산 시민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이 이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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