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 동해, 우뚝 솟은 금강산

장엄하고 빼어난 산세 천하제일이라

수없이 많은 도량과 사원 있으나

그 가운데 으뜸은 건봉사라네

신령스러운 땅 기운 얻으니 걸림 없이 도(道)에 이르고

수행하는 이들 신심 깊으니 스스로 깨달음 이루도다

하늘 바람타고 법우(法雨) 내리니

상서롭고 보배로운 꽃잎(분다리화;芬陀利華), 찬란하기 그지없다

사그라지던 강원(講院)의 종소리 다시 널리 울려 퍼지고

꺼져가던 선원(禪院)의 등불, 붉게 타 오르네

아! 그대여 잘 헤아려 보게나

온 우주 저 허공, 한없는 공덕이 어떠한지

         - 〈법우경원설립비(法雨經院設立碑)〉

건봉사로 향해 가는 길 사명대사 동상 옆으로 부도밭이 있다. 본래 1,000여기가 넘게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50여기의 부도와 12기의 비(碑)만 남아 있다.

천년을 훌쩍 넘는 고난과 고통의 역사 고비마다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제도(濟度)해 온 금강산 건봉사! 오늘날 건봉사에는 장구한 역사와 조선 제일가람(第一伽藍)이라는 사격(寺格)을 증명하는 많은 유산(遺産)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백성과 함께 지나 온 전란(戰亂)과 겁화(劫火)로 “황금 빛 햇살 머금던 봉황의 날개 같은 전각과 누각”은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어도, 텅 빈 자취들이 아련한 세월을 보여주고 있어도, 건봉사에 면면히 흐르는 장엄하고 가슴 저민 자취들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건봉사로 들어서는 길, 사명대사 상(像) 옆 너른 들에서 부도와 스님들의 행적, 수행을 기록한 비(碑)들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비록 건봉사 ‘본연(本緣)’을 이어오던 부도 “1,000여기 가운데” 50여기와 12기 비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건봉사에서 수행하며 중생을 제도하고 국가를 수호했던 스님들의 자취를 살피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목양당(牧羊堂), 송암당(松岩堂), 월봉대사(月峰大師), 운파당(雲坡堂) 등 스님들의 부도와 비가 자리하고 있다.

건봉사 부도밭에서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 비가 있다. 1851년 철종 2년, 벽오유총(碧梧侑聰) 화상이 개설한 제 4회 만일염불회를 기록한 〈건봉사만일연회연기비(乾鳳寺萬日蓮會緣起碑)〉다. 1904년 홍문관학사 조병필(趙秉弼)이 지은 비명(碑銘)에는 당시 동참한 “영수(永守), 윤선(潤宣), 금윤(錦允), 진각(眞覺) 스님 등이 1854년부터 1856년까지 3년 동안 정진하며 살아 있는 몸에서 사리 26매를 내어 놓아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담겨 있다. 이적(異蹟)이라고 가볍게 여기기도 하지만, 중생제도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본래 목표를 향한 간절한 발원(發願)과 치열한 구도 정진(精進)으로 현세에 극락정토를 구현 했던 그 신심(信心)을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하리라.

건봉사 불이문, 1920년 건립된 불이문은 6.25 전쟁 이전에 있었던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현판은 대가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다.

일제에 맞서 독립 항쟁을 이어가던 시기, 건봉사에는 주목해야 할 두 가지 불사(佛事)가 이뤄진다. 1920년 불이문(不二門)과 1936년 법우경원(法雨經院)을 세운 것이다.

건봉사 불이문은 6.25 전쟁 이전의 것으로는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로, 다른 사찰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양식으로 세워졌다. 동서남북 네 기둥 위에 가장 이상적인 구조라고 하는 팔작(八作) 지붕을 얹었고 네 귀퉁이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용머리로 장엄했다. 현판은 조선의 대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이 쓴 글씨다. 무엇보다 건봉사 불이문에는 보리심(菩提心)을 상징하는 금강저(金剛杵)가 새겨져 있다. 불이문을 통해 건봉사로 들어서 깨달음과 진리를 향한 물러서지 않는 굳건한 정진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리라.

건봉사는 1936년 평창 출신의 이법우행(李法雨行) 보살의 보시로 백화암(白華庵)을 중수하고 경전을 수행하는 법우경원(法雨經院)을 세운다. 백화암은 “본래 사명대사가 주석하던 신령스러운 도량으로, 법의 꽃이 피어나고 법의 비가 내려 윤택하게하기 적합한 곳이며, 경전 강의뿐만 아니라 참선 수행을 하는 데에도 최상의 도량이다.” 이 때문에 설립 비명(碑銘)은 “사그라지던 강원(講院)의 종소리 다시 널리 울려 퍼지고 꺼져가던 선원(禪院)의 등불, 붉게 타 오른다.”고 찬탄한 것이다. 가장 엄혹하던 일제 강점기 불이문과 법우경원의 건립은 건봉사 본연(本緣)이 치열한 정진과 수행을 토대로 한 호국과 중생제도에 있음을 안팎으로 천명한 불사(佛事)였던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신 진신사리탑을 지키는 국군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6.25 전쟁 당시 건봉사는 1878년 대화재로 인한 전소(全燒)에 버금가는 아픔을 겪는다.

1951년 부처님 오신 날을 3일 앞둔 5월 10일(음력 4월 5일), 후퇴하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유엔군은 건봉사 일대를 폭격했다. 대웅전과 관음전, 봉서루, 만일원, 선원 등 15채의 전각이 소실된다. 이때 어실각(御室閣)도 불탔는데, 1878년 대화재 당시 어렵게 지켜냈던 오동향로(烏銅香爐), 절함도(折檻圖), 사명대사 철장(鐵杖), 국보 제 412호 《금니화엄경(金泥華嚴經)》 46권, 《법화경(法華經)》, 《원각경(圓覺經)》 등 많은 경론(經論)도 함께 사라졌다. 이후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건봉사는 전장의 한 가운데 있었다. 휴전 이후까지도 건봉사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같이 하며 팔상전, 낙서암, 극락전 등 모든 전각과 불 보살상, 탑, 부도, 비석, 역대 선승들의 진영(眞影) 등이 소실됐다. 6.25 전쟁을 지나며 건봉사는 6백 4십 여 칸 이상의 전각과 1,138점의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피해를 당했다.

광복 이후 전쟁을 지나 건봉사는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묶인다. 전쟁의 참화 후유를 그 어느 지역보다 혹독하게 겪으면서도 사격(寺格) 회복과 오늘날의 대 복원 불사를 준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3교구 본사 설악산 신흥사 중흥조인 ‘정호당 성준(晶湖堂聲準)’ 대선사께서는 1971년, 교구 본사를 당시 건봉사에서 신흥사로 이관한다. 신흥사와 건봉사의 중흥과 중창, 복원을 위한 백년대계를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사명대사 의승병 기념관에 전시된 건봉사 1차 복원 불사 조감, 모형으로 제작돼 있다.

1980년대까지 건봉사는 보안원(普眼院) 터 법당 건립(1965년) 천연보호구역 지정(1973년, 천연기념물 제 247호). 강원도 기념물 제 51호 지정(1982년), 불이문 지방문화재 제 35호 지정(1984년),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 회수, 전통사찰 등록(1988년) 등 내실을 기한다. 1989년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에서 벗어나며 적멸보궁, 대웅전, 진영각, 보제루, 만일원, 명부전, 제 6차 전국 염불 만일회 결사, 사명대사 기적비 발굴과 복원, 금강갑계 기념비 건립 등 천년 건봉사의 역사와 수행 자취를 오늘의 불교 역사에 새겨 가고 있다. 2002년에는 능파교(보물 제 1336호)와 백운교(보물 제 1337호)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됐다.

2000년 대 들어 건봉사는 본격적인 복원 중창 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도후스님, 영도스님, 마근스님, 정현스님, 현담스님 등 2000년 이후 건봉사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들은 연구, 발굴, 복원을 위해 정진한다. 빠르지 않지만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으며 묵묵하게 조선 제일가람으로서의 사격을 회복하기 위한 불사를 진행하며, 건봉사 새 천년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건봉사 위치. 북으로 내금강이 보이고, 건봉사를 지나 설악산, 오대산이 이어진다.

건봉사는 금강산에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 허리 중앙에서 위로는 북쪽 금강을 아래로는 남쪽 금강과 설악산을 보고 있다. 정치 역사적으로는 남과 북의 가장 첨예한 대립 지역에 자리하고 있지만, 민족의 문화 그리고 불교 역사에서는 남과 북 모두의 유산을 아우르고 있는 도량이다.

금강산 건봉사는 창건부터 불·보살님의 가피와 선사님들의 수행과 발원·정진을 토대로 한 아미타 정토 도량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건봉사는 중생제도의 본원(本院)이다. 국가와 민족이 전란에 휩싸여 통한의 비극을 만났을 때 건봉사는 호국 성지로서 주저 없이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데 그 역량을 발휘해 왔다. 3.1 독립 만세 항쟁 100주년이 되는 2019년 기해년, 금강산 건봉사는 다시 민족 역사 한 가운데 서 있다. 남과 북을 둘러싼 정세의 변화와 시대 흐름은 건봉사가 이제 그 장구한 역사를 오늘과 앞날에 다시 구현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건봉사는 남과 북 평화가 구현될 도량이다. 건봉사 지난 천 오 백년 역사 전체는 부처님 가르침 실천을 토대로 한 모든 생명의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봉사가 기록할 새 천년 역사는 모든 생명이 갈등과 상쟁을 접고 평화와 행복으로 향해 가는 장엄한 불사(佛事)가 될 것이다.

건봉사 등공대. 등공대를 오르는 길이 열리는 날, 평화의 문도 함께 열리리라.

<금강미타(金剛彌陀) 순례길>

한국 불교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없는 장엄한 수행 정진의 결과인 등공대(騰空臺)는 그 평화를 향한 노정 중심에 있다. 건봉사는 “해동 정토종의 발상지”다. 정토왕생 수행의 과(果)인 “등공대는 천 년이 넘도록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폐허로 돌무더기로 있었으니 산천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등공대 건립으로 “감로봉 정상에 흰 달이 밝게 비추고 묘적(妙迹) 고개 마루에 맑은 바람 불게 되었다. 산도 빛나며 계곡을 흐르는 물도 그 청아함을 되찾았다.”〈건봉사소신대석탑신축기(乾鳳寺燒身臺石塔新築記)〉

등공대는 민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등공대가 자리한 감로봉은 군 작전 지역이고 통행이 제한돼 있다. 중생제도의 상징인 등공대는 갇혀 있다.

남북 평화시대는 등공대의 자유로운 출입으로부터 열릴 것이다.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한국불교의 성산(聖山) 금강산, 선사(先師)들의 깨달음을 향한 발원이 응축돼 있는 등공대를 묶고 있는 것은 전쟁의 후유(後遺)이자 민족의 비극이다.

불이문을 지나며 깨달음을 향한 굳건한 마음, 보리심(菩提心)을 내고, 연꽃 세계로 인도하는 능파교를 지난다. 발징 화상과 대중들이, 용허 석민 화상이, 벽오 대사와 스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등공대를 향해 <금강미타 순례길>을 따라 오른다. 등공대를 둘러 싸고 있는 전쟁의 후유가 치료되고 비극이 해원(解冤)된다. 감로봉 등공대로 오르는 길을 따라 ‘나무아미타불’이 남과 북으로 울려 퍼지고 금강산을 휘돌아 동해를 감싸고 남북 평화 시대를 향한 길이 보이고 상서로운 광채로 장엄한 평화의 문이 활짝 열리리라.

건봉사는 금강산에 어울리는 고송들이 즐비했다. 6.25 전쟁 당시 모두 불에 탔으나, 현재 복원 중인 극락전 위쪽에 자리한 이 소나무만이 살아 남았다. 수령이 300년을 넘는다. 건봉사 새로운 천년을 지켜 줄 나무다.

<분단을 넘어 화합의 미래로>

건봉사가 자리한 고성 냉천리 일대는 미래를 담보하는 청년들, 우리 군 장병들이 지키고 있다. 그 청년들 사이로 금강산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느끼려는 사람들과 신심 가득한 참배객들이 오고간다. 화진포, 송지호, 통일전망대, 청간정, 아야진, 화진포와 금강산을 보고 느낀 사람들은 건봉사를 찾는다.

드넓은 도량에 자리한 전각과 보궁을 참배하고 나면 빈 터가 많음에 의아해 한다. 도량 곳곳에 세워진 설명을 보고 건봉사가 얼마나 대단한 도량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한다. 그리고 건봉사를 내밀하게 알아가게 되면 그리운 본향(本鄕)으로 자리하게 된다.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늘 그리운 대상이 된다. 그 그리움의 근원은 민족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전자에 새겨진 분단이다. 남과 북을 하나로 이어주는 도량이지만, 분단의 아픔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건봉사다.

건봉사는 선조들의 호국 정신을 계승해 온 도량이다. 소통의 소중함 가장 절실한 곳이다. 청소년과 군 장병, 어린이들은 건봉사에서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소통을 염원하게 되리라. 전쟁과 갈등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게 되리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과 사리탑이 자리한 적멸보궁

<화신불-진신 사리 가피로 이뤄지는 치유와 화합>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건봉사는 한국 불교 역사에서 가장 희유한 적멸보궁이다. 이처럼 성스러운 도량에 우리가 이르기까지 때로는 환희로운 때로는 더할 수 없이 아픈 천 오 백년 역사가 담겨 있다. 극락왕생을 이룬 불사(佛事)가 건봉사를 장엄했고, 천 육백년 한국 불교 수행 가풍을 이룬 선지식들이 주석하며 수행했다. 임금과 민초들을 품으며 조선 제일 가람의 사격을 일구었다. 왜란을 치르면서는 통한(痛恨)으로, 6.25 전쟁에서는 더할 수 없는 비극으로 도량 전체가 울고 또 울었다. 전쟁 후에는 분단으로 아파하면서도 새로운 천년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경자년(庚子年) 4월 어느 날,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건봉사 사부대중과 군 장병, 관광객과 참배객이 사명대사 기념관 앞 도량을 가득 메웠다. 유점사와 표충사, 신계사에서 온 북한 스님들도 함께 하고 있다. 본격적인 남북 평화시대를 맞이하고 미리 축하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불자들, 명상 수행자들도 있다.

수천을 넘는 대중은 적멸보궁을 향한 길 왼 편에 여법하게 복원한 극락전 새로 모신 부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 대중들은 한 마음으로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끝없이 염송한다. 금강계단과 치아사리 영아탑을 참배하고 내려와 만일염불원(萬日念佛院)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하며 지극한 신심으로 마음을 다진다. 벚꽃 화사한 건봉사 대웅전과 보제루, 능파교, 극락전, 저 아래 불이문까지 만등(萬燈)이 장엄한다. 대중들 모두 저마다 촛불 등을 들고 명상에 들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친견하고 함께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치솟아 오르던 그 벅찬 환희와 감동이 차분하게 다져진다.

장구한 건봉사 역사에서 가장 아팠을 70년 세월, 가슴 한 가운데 깊숙이 자리한 전쟁의 비극, 분단의 아픔, 헤어져 지낸 고통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구현된 또 다른 보궁, 적멸(寂滅)에서 눈 녹듯 사라진다. 금강산 건봉사 새 천년 역사는 평화와 치유, 화해와 평등으로 쓰여 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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