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몸이 무겁다. 해질 무렵 노을빛에 늘어진 그림자처럼 힘겹게 육신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는 기분이다.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은 것 같다는 부처님 말씀이 마흔 넷에 이르러서야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결혼하고 육아 때문에 몸을 돌볼 새 없었다는 핑계를 끊어내고자, 아파트 커뮤니티의 운동센터를 등록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정릉을 거닌다. BBS에 출연을 한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방송을 통해 추천했던 서울 왕릉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제 겨우 3~4번 2.5km의 정릉 둘레 길을 걸어 보았지만, 육체는 물론 정신적 만족감이 더 크다. 명리학자들은 풍수에 대해 잘 모르거든, 궁궐과 왕릉, 절 주변에 터를 잡으라고 추천을 하는데, 직접 가서 걸어보니 실감할 수 있다. 취재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사찰과 정원들을 수차례 가보았지만, 신의 정원이라 불리는 왕릉의 빼어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도심 한 가운데 무릉도원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즐기는 운동이 수영인데 번거로울 때가 많다. 자연을 느끼려면 등산이 제일 좋지만, 시간을 내기 힘들다. 돈암동 흥천사에서 5분 거리의 아파트에 살기에 흥천사를 지나 10분이면 정릉에 다다를 수 있다. 주말에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게 자연과 마주할 수 있다.

흥천사는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의 묘인 정릉을 수호하고 왕후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태조 6년 1397년에 창건됐다. 신덕왕후는 고려 권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서울과 고향에서 각각 부인을 두는 고려 풍습에 따라 태조의 ‘경처’가 되었으며 ‘향처’ 한씨가 조선건국 전에 죽자 첫 왕비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사냥에 나섰다가 우연히 신덕왕후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태조 5년에 신덕왕후가 죽자 상복을 입은 채 직접 능자리를 보려 다녔다고 전해진다.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지금의 서울 중구에 조성되었다가, 향처 한씨의 아들인 태종 즉위 이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의 사랑은 극진했다고 한다. 왕후가 병으로 위중할 때 스님 50명이 불공을 올렸고, 사후 흥천사는 능 뒤쪽에 170여 칸의 대찰로 창건됐다. 태조실록에는 태조가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로 거동했다고 기록 돼 있는 등 사찰이 크게 흥했으나, 이후 화재와 방화 등으로 쇠락하다, 정조 18년 1794년에 현재 자리로 이전됐다. 이후 흥천사는 고종 2년 1865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중창됐다. 지금도 당대의 명필로 불렸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이 현판으로 남아 있는 등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유교가 하지 못했던 죽음의 문제를 종교적으로 보듬은 것이 불교이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왕실은 사찰 중창에 앞장섰고, 불교를 탄압했던 왕들조차 말년에 이르러서는 친 불교적으로 변모했다. 왕 또한 생노병사를 겪는 인간이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화무실입홍'을 몸소 겪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왕릉 옆에 능침사찰이 존재 하듯이 유교의 나라 조선의 이면에는 불교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사찰을 지나 왕릉까지 켜켜이 쌓인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걷다보면 세상사 시름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정릉을 걷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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