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불교학술원은 지난 2016년 통도사 경봉스님 소장유물 조사과정에서,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이종욱 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필자가 서예와 인연을 맺었던 것은 7~8년 전이다. 매일이 마감인 기자생활이 더없이 힘들었던 무렵, 학부시절 동국대 선학과 교수 현각스님이 서예로 마음을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서예작가이기도 한 동해사암연합회 회장인 천태종 만리사 주지 경천스님 등의 추천 등을 거쳐 조계사 인근 서실에서 1년 정도 안진경체를 배웠고, 이후 방배동에 있는 무산 허회태 선생의 서실에서 짧게나마 붓을 잡았다.

젊은 시절 미대입시를 준비했기에 자신했지만, 붓글씨를 배우는 과정은 힘들었다. 선긋기부터 시작해서 한글자 씩 쌓이다 보니, 어느새 그 매력에 푹 빠졌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스트레스 또한 서실에서 글을 쓰다보면 정말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예전 친분 있던 스님들이 서예를 처음 배울 때 붓 귀신 들린다 했던 농담이 가슴에 와 닿았다. 서예는 화선지와 수직으로 닿으며 써내려 간다. 그 만큼 정교하고 예민해서 온 정신을 모아야 하고, 손맛이 남다르다. 불교학을 공부했기에 한자는 대학입학과 함께 숙명처럼 따라왔다. 앞서 언급했던 동국대 현각스님에게서 군 제대 후 중국 선종사를 배웠다. 엄한 스승은 수업 도중 한 학생을 지목해 책 속의 한문을 읽어보라 했다. 대답을 못한 학생은 수업 내내 서서 공부를 해야했다. 그 때는 이해를 못했지만, 불교학에서 한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였고, 아니 동북아시아가 서구의 라틴어 처럼 한문 문화권이기에 한문을 글자로써 공유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었기에 불가에서도 한문과 서예는 일상 그 자체였다. 선사들 또한 깨달음을 이룬 후 이를 시로 남겼다. 그러한 까닭에 경봉, 청담, 서옹, 서암, 월하, 혜암, 동헌스님 등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근현대 선사들 대부분이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다. 가깝게는 석주스님의 글씨가 매우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대의 석학으로 인정받았던 탄허스님은 뛰어난 한학 실력을 바탕으로 한 다수의 서예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스님 중에는 쌍계총림 방장 고산 스님의 서예가 이름 높으며, 봉은사 전 주지 원학스님, 현 조계종 호법부장 성효스님 또한 발군의 서예실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대 총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스님은 해인사 주지 시절 서예를 했다고 문손인 경국사 주지 경암스님에게서 들었다. 지관스님은 붓글씨를 가까이 하지는 않았으나 한학에 능했기에 서예가 가능했고, 총무원장 소임 시절 중국과 일본 스님들과 만나 글을 쓸 자리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붓을 잡았다. 현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또한 외빈이 예방을 하면 아끼는 다기의 나무 상자 표면에 한자를 적어 준다. 사석에서 서예를 배웠냐고 물어보았더니 속가 아버지가 지역에서 상을 당하면 만장을 써줄 정도로 붓글씨가 빼어났다고 말했다.

동국대 명예교수이자 대만에서 유학을 한, 현 동국대 이사 법산스님은 옛 스님들에게 붓글씨는 현재 젊은 사람들이 컴퓨터로 글을 쓰듯 일상생활의 일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은사인 경봉스님은 생전에 만해, 한암, 만공스님 등 고승들과 서신을 교류했고, 30대부터 평생 붓을 잡아 세 가마니 분량의 기록물을 남겼다. 요즘 SNS로 교류를 하듯이 붓글씨로 쓴 편지에 마음을 담아 전한 것이다. 경봉스님의 서예는 신필, 도필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났다고 하니, 양과 질 모두에서 서예하면 단연 경봉스님의 법명이 제일 앞자리에 오르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달 12일에 서예진흥법이 시행된다. 동북아시아 기록문화의 출발점이자, 마음이 드러난다고 해서 ‘심화’라고도 불리는 서예가 다시금 조명받기를 바란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마음을 밝히는 ‘선’과 차, 시, 서화를 하나라 여겼던 만큼, 서예진흥법 이후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 서실이 운영되었으면 한다. 세상이 물질문명을 향해 치달아 가고, 빠름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사찰에서 만큼은 묵향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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