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천년고찰 봉정사에 경사가 났습니다. 귀한 손님이 20년 만에 찾아온 겁니다. 지난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다녀간 데 이어 이번에는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방문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조선 왕조는 직계 후손이 끝나 왕실 가족에 대한 특별한 느낌은 없습니다만 영국 왕실 가족의 재방문은 왠지 모를 신비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앤드루 왕자는 20년 전 어머니가 걸었던 길을 되짚으며 한국의 정취에 젖어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환대했던 우리 국민들도 그 때처럼 크게 반겼습니다.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봉정사를 찾았는데 아들도 천3백여 년 역사를 지닌 사찰에서 한국 문화의 진수를 체험했습니다. "가장 평화스러운 곳"이라며 "peaceful"을 연발했습니다.

대웅전의 단청과 국내 최고 목조건축물 극락전을 둘러보며 한국 불교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극락전에 들어갈 때는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발을 벗었습니다. 돌탑도 쌓았고 범종을 세 번 울리며 평화와 자비광명을 기원했습니다. 무엇보다 앤드루 왕자의 행보에서 눈길을 끈 것은 만나는 스님마다 합장으로 인사를 나눴다는 겁니다. 봉정사 회주 호성 스님과 주지 도륜 스님을 향해 두 손 고이 모으며 고개를 숙인 모습에선 진정성이 우러나왔습니다.

앤드루 왕자는 불자가 아닙니다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의사 표시로 상대방의 인사법을 따른 겁니다. 고개를 숙이거나 악수로만 인사한다고 스님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호의적이거나 관심있다는 뜻을 상대방에게 전하기 위한 하나의 몸짓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따라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동질감을 줘 편안함과 신뢰를 주는 심리기술을 '미러링 효과(Mirroring Effect)'라고 합니다.

이렇듯이 상대방의 인사를 따라하는 것을 굴종으로 여겨서도 안될 것입니다. 앤드루 왕자가 합장한다고 해서 우리 국민들이 영국 왕실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닙니다. 대영제국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불교 예법을 따라하는 모습에 호감도는 올라가고 그 사람의 면면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겁니다. 굴종과 존중을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앤드루 왕자의 합장이 필자에게 빛나보이는 이유는 부처님오신날에 불거진 한 정당 대표의 합장거부 논란이 유독 컸습니다. 앤드루 왕자가 한국인처럼 보이는 반면에 외국인처럼 보이는 한국인이 무척 낯설었습니다. 과거 공무원이었을 때는 합장 안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반대파도 아우러야 하는 정치인이 됐음에도 바뀌지 않은 행태는 불편했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안지킬 때 지적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앤드루 왕자는 영국 왕위 계승 서열 8위의 지도자급 인사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중시하는 영국 왕실 속에서 존중과 배려심도 싹트지 않았나 싶습니다.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지도자에 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상비하도록 노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병제인 영국에서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두드러기 같은 희귀병을 앓았어도 군대에 지원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합장과 관련한 그 정당 대표의 한마디가 귓전을 울립니다. "종교는 강요하는게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합장을 강요당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눈감아주기를 불교계에 강요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 나이와 관련한 우스갯 소리를 봤습니다. 50은 지천명이고 60은 이순이라 하는데 70세는 '길흉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무례가 되지 않는 나이며 대통령 이름을 그냥 불러도 괜찮은 나이'라고 합니다. 69세까지는 예의범절을 준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