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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죽음을 무릅쓰고 불교 말살 정책에 맞섰던 백곡 처능대사의 사상과 업적이 이 시대 불교계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호국불교’로 나라를 지켰던 불교가 전란 후에도 탄압의 대상이 된 점과 훼불에 맞선 처능대사의 상소 ‘간폐석교소’가 나온 배경 등을 살펴봅니다.

처능대사 기획 두 번째 순서 홍진호 기자입니다.

 

지난해 세종도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조선후기 불교사학사'의 저자 오경후 박사는 백곡 처능대사의 '간폐석교소'를 시대 상황 속에서 연구했습니다.

그는 ‘간폐석교소’가 나온 배경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전란 이후 주자학 이념을 앞세운 집권층의 불교 탄압 강화, 그리고 전란 후 무너진 조선의 국가 경제 상황에서 원인을 찾았습니다.

전란 후 부족한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해 불교가 무위도식과 오랑캐의 도라는 논리로 사찰의 토지 노비를 몰수했고 스님들을 강제노역에 내몰았습니다.

[오경후/ 동국대 박사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저자)]

“당시 17세기에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들 이 시기가 되면 자연재해가 극심하게 일어나고 재해로 전염병이 돌거나 전란으로 인해서 경작지가 황폐화 되는 사례들이 빈번해 지죠. 그래서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충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스님들을 대거 각종 부역에 동원하는 사례들이 일어납니다.”

당시 불교 수탈은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가장 혹독하게 진행돼 지방의 수령들이 나서서 스님들의 부역을 줄여달라고 호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경후/ 동국대 박사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저자)]

“때문에 지방의 수령들조차도 이 유서 깊은 사찰이 스님들의 부역으로 인해서 텅텅 비여서 뱀과 쥐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님들에 대한 부역을 경감시켜 달라는 상소문 까지 올리는 사례도...”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을 때 나온 ‘간폐석교소’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집권층의 언어로 불교존립의 필요성을 설파한 점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논어와 시경, 서경 등의 문헌을 사용했고, 신익성 등 당대의 대표 문인들과 교류하며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처능스님의 행적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했습니다.

[오경후/ 동국대 박사 (‘조선후기 불교사학사’ 저자)]

“처능 스님이 교류했던 신익성 등의 문집을 보면 처능스님의 흔적들을 적지 않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유학자들조차도 처능스님의 학문적 식견과 당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문학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살펴 볼 수 있다고 굉장히 칭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탠딩] 간폐석교소는 조선 후기 우리 불교의 실상을 정확히 전하는 역사적 사료인 동시에 시대를 가로질러 호법의 의미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게 하고 있습니다.

BBS NEWS 홍진호입니다.

(영상취재=남창오/ 영상편집=성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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