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완전한 행복을 구현해야"

오대산 월정사 주지 퇴우 정념스님. 월정사 설법당에서 1월 24일(음 12월 8일) 불기 2562년 부처님 되신 날(성도재일)을 맞아 정념 스님에게 깨달음과 성도재일의 의미에 관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깨달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성도재일(成道齋日)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정념스님) 우리 중생의 삶은 자기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올바르지 못합니다. 이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왜곡된 존재론, 객관 세계에 대해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고통이 일어납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바르게 보고 객관 세계에 대한 올바른 견해, 올바른 이해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에고(Ego)가 해체되고 세상과 함께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올바른 관계의 정립, 회복입니다. 자기와 객관세계에 대한 왜곡된 존재관에 의해 분리된 삶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데, 나와 세계가 있는 그대로 연기적 관계로 이뤄져 있다는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계와 맺고 있는 인연이라는 관계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객관 세계 역시 ‘나’와 인연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통찰을 체득해서 ‘나’와 세계를 함께 더불어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자각입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세상을 동체심(同體心)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세상과 공존하고 상생을 이루며,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붓다가 되신 날이 성도재일입니다. 성도재일은 바로 나의 존재가 지닌 실상(實相), 즉 인연에 의해 이뤄져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철저하게 깨달으신 날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세상 속에서 동체심(同體心)을 구현하신 날이 성도재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하심으로 일생동안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그 길에서 잠시도 쉼 없이 수행을 하시면서 모든 생명을 위해 법을 설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육신의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라고 한다면, 성도재일은 정신적 완성을 통해서 진정한 붓다가 되신 날이고, 나와 더불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확연하게 설파하신 그런 날이 성도재일입니다. 성도재일을 기해서 진정한 불교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인연으로 이뤄졌다는 깨달음이 완성된 날이고, 연기를 명확히 자각하고 중생을 위해서 가르침을 펴게 된 것이기 때문에 성도재일은 진정한 불교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이후에도 수많은 선사들, 선지식들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설파하셨는데, 21세기를 사는 우리 중생들에게 깨달음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그 깨달음을 통해서 어떻게 행복을 이룰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정념스님) 부처님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조사님들, 깨달음을 이뤄내신 수많은 불제자들이 있어왔습니다. 출가자는 물론이고 재가자에게도 깨달음은 있어왔습니다. 누구라도 존재에 대한 이법(理法)을 명료(明了)하게 통찰하고 그 깨달음을 온 몸으로 증득(證得)하면 그것이 깨달음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방편으로 세상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역대 조사님들과 선지식들께서는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 즉 연기(緣起)의 교법(敎法)·무아(無我)·항상 치우침이 없는 중도(中道)의 정견(正見) 속에서 모두가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설파해 오셨습니다.

세상은 항상 쉼 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금구직설(金口直說)입니다. 중생들은 바로 이런 변화 속에서 문명을 일궈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중생들은 이른 바 정보문명 또는 4차 산업이라는 시대를 일궈가고 있습니다. 4차 산업이라는 것은 물론 기술(技術)의 발달입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기술, 술(術)을 통해 완전한 행복을 증득할 수는 없습니다.

중생들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등 육신의 틀이라는 한계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존재이면서, 바로 그 때문에 더 많은 희구심(希求心)을 품게 됩니다.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이면(裏面)까지 볼 수 있게 되기를 희구합니다. 귀를 통해 직접 듣는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소리 없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간적으로 한계를 지닌 육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공간을 더 확대해서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가고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지닌 마음이나 정신적 영역까지 읽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영역의 희구, 바람들은 기술로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행복은 오로지 깨달음 즉 정각(正覺)을 통해서 번뇌를 다 여의고, 죽음과 삶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통찰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날 4차 산업은 우리가 일궈온 다양한 기술을 통해서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소리를 듣고 시공을 초월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있고, 더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혁명은 초연결(超連結), 초지능(超知能)의 사회를 실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 고통에서의 진정한 행복· 해방, 진정한 우리 사회의 평화 이런 것들은 정각을 통해서 자타가 함께 성불하는 그런 세계를 통해서만이 구현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깨달음이 이뤄지지 않으면 평화롭고 완성된 세계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이후에 인도의 대중들은 실제로 삶이 바뀌고, 행복해졌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역시 지금의 내 삶, 지금 내가 속해 있는 환경, 이런 속에서 행복해 지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념스님) 우리가 희구(希求)하는 욕망, 과도한 탐(貪)·진(瞋)·치(痴) 즉 갈애(渴愛)· 탐욕의 마음· 어리석은 마음· 분노의 마음 이런 것들이 자기를 태우고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행복을 구한다든지 하는 마음을 전환해야 합니다.

희구하는 마음은 결국 자기, 근원적으로는 자기라는 에고(Ego) 의식, 자기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이라는 이 집착을 절복(折伏)하고 해체하지 않으면 어떤 하나의 물질을 이루고 성취해서 희구하는 마음이 채워진다고 해도 완벽하게 충족된 행복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로부터의 해방 즉 삼독심(三毒心)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럴 때 생사의 문제에서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이른 바 모든 것에서 방하착(放下著)하는 마음 즉 일종의 무심(無心)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것도, 자기 앞에 닥쳐오는 수많은 인연도 모두 저 하늘의 구름이 지나가듯이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 깨어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되면 재물, 권력, 명예, 오욕락(五欲樂) 어떤 것에도 취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자기만을 위해 희구하는 마음이 온 세상을 향해, 수많은 중생을 위해 회향하는 마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일체 중생이 열심히 수행하고 열심히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와 세상이 항상 평화롭고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가는 가장 올바른 길입니다.

불자들이 깨달음을 향해 다가가고 참된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실천, 보살행이 바른 길이겠군요.

정념스님)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으로 의식주랄까 이런 것도 갖추어야합니다. 그런 영역을 위해서는 재보시(財報施)를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재보시만으로는 ‘너’와 ‘나’의 관계· 대중 모두가 평화로운 상생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보시(法報施)를 실천하면 됩니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실천하고 상대방을 다 인정하고 배려하고 수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법보시입니다. 모두가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법보시를 실천하면 됩니다.

또 모든 생명이 지닌 공포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무외시(無畏施) 역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보살행입니다. 이 무외시는 결국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음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에 대한 근원을 통찰하고 체득해서 죽음과 삶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성현들께서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고 설하셨듯이 어디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 분노하거나 집착하거나 탐욕을 일으키는 그런 마음은 다 그대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권력이나 명예, 오욕락에 구애되지 않고 스스로 세상을 위해 두루 자기를 쓸 수 있는 주인으로서의 삶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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