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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구의 북악산자락] ‘롱패딩’ 열풍에 어른거리는 촛불과 태극기
이현구 기자 | 승인 2017.11.26 12:24
   
 

  중국 출장길에 우울한 문자가 왔습니다. 집 근처 백화점 매장 이름이 찍힌 고액의 카드결제 문자 2건. “결국 샀구나...” 탄식이 터져나왔습니다. 사춘기 두 아이의 ‘롱패딩’ 구입 작전이 아빠가 손쓸 틈 없는 시점에 기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등골 브레이커’ 학부모 대열에 들지 않으려했던 노력이 허사가 되자 허탈감이 밀려왔습니다. 출장을 마치고 집 현관에 들어서면서 “롱패딩 어떤 거 샀는지 보기나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물건이 집에 없었습니다. 재고 품절로 돈부터 줘놓고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12월 중순에나 받을 수 있는 것을. 속으로 기회다 싶어 “롱 패딩 그거 분명 1년 뒤면 부끄러워서 밖에 못입고 나갈거다”라고 교환을 제안했다가 아내에게 “제발 영감같은 소리 그만하라”는 힐난만 들었습니다. 쿨(cool)하지 못한 아빠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시커먼 외투 속에서 뒤뚱거리는 딸아이 둘의 펭귄같은 모습을 계속 떠올리며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날 TV에는 가성비 높다는 ‘평창 롱패딩’ 2차 판매분을 구입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롯데백화점 본점 앞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뉴스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최근 2년 간 출입처 일정과 회사의 배려 속에 세계 곳곳을 다녔습니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각 나라 도시 젊은이들의 옷입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에서는 멋쟁이 여성들의 하나같이 검소한 모습에 놀랐습니다.맹목적인 유행이란건 없었습니다. 세계 의류산업의 중심 뉴욕에 갔을때는 트레이닝복이 스트리트 패션으로 인기였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다양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는 전국에서 수학여행을 온 청소년들의 교복을 유심히 살폈는데, 대체로 펑퍼짐한 매무새었습니다. 새로 맞추자마자 치마단부터 고쳐서 끌어올리는 대한민국 여중생들의 타이트한 교복을 언급하자 가이드는 “대부분 크게 맞춰서 3년씩 입는다”고 했습니다. 대형 화장품 매장이 중고생들의 나들이 코스가 돼버린지 오래고, 운동화 수준에 머물렀던 청소년들의 ‘잇 아이템’이 ‘노스페이스 파카 열풍’을 시작으로 ‘캐나다구스’니 ‘디스커버리’니 매년 품목을 달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패션 유행은 정말 신드롬 또는 광기로 표현될 수 밖에 없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등골이 부서진다”고 한숨쉬는 어른들이 더 문제입니다. 대부분 군중심리와 맹목적 유행이 뭔지조차 몰랐던 ‘주입식’ 인생이었습니다. 이들 어른들의 지금 인생에서도 잘못하면 왕따가 된다는 집단 심리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합니다. 젊은이들의 최신 트렌드에 ‘아재’를 넘어 ‘꼰대’처럼 슬기롭지 못하게 반응하는 제 자신도 솔직히 ‘군중심리’ 혹은 ‘모방심리’에 늘 동요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휘발성 강한 군중심리, 모방심리는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 속에서 종종 폭발했습니다. 주로 세상을 흔든 거리의 함성 속에 존재했습니다.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광장에서 거대한 시민 행동을 떠받쳤습니다. 때로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처럼 편향적 집단 광기로 변질돼 그릇된 결과도 낳았습니다. 문제는 합리적 생각과 주체적 결정이 들어설 공간이 없는 군중심리 사이로 정치적 여론몰이와 경제적 마케팅이 파고든다는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 ‘댓글’입니다. 휴대폰 포털이나 SNS가 언론의 핵심 플랫폼이 돼버린 요즘 국민들은 각종 주요 기사에 딸린 댓글을 보며 즉각적인 여론을 확인합니다. 주말 영화를 선택할 때는 예매 사이트의 평점과 댓글 확인이 필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력들의 주도면밀한 여론화 기술에 우리 국민들은 ‘롱패딩’ 유행에 편승하듯 어느새 집단적 분위기를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 파동과 네이버의 배치 순위 논란에서 보듯 ‘군중 심리’는 정치적 목표에 휘둘리곤 하는 취약한 대상입니다. 1년 전 광장을 수놓으며 무능하고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은 사상 최대의 자발적 시민 참여로 이뤄졌지만 그 과정에서 진실을 찾고 여론을 투영하는 언론 스스로 집단적 여론몰이에 휘둘리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온갖 잘못된 정보로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했던 이른바 ‘태극기’ 열풍이 순수하고 자발적인 시민참여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해마다 겨울철이면 반복되는 광기어린 패션 열풍 속에서 대한민국을 둘로 갈라놓았던 촛불과 태극기의 대결이 어른거리며 떠오른 이유입니다.

   극단적 품귀 현상을 보인 ‘평창 롱패딩’의 생산업체 신성통상의 회장이 서강대 재학시절 연극서클에서 활동했고 당시 그의 단짝이 문재인 정부의 ‘문화권력’으로 꼽히는 배우 문성근씨란 기사가 났습니다. 노무현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감독이 97년 ‘초록물고기’를 만들 때 그가 30억원을 투자했던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롱패딩이 지난해 겨울 그 추웠던 광화문 광장 100만 인파 사이에서 유행하지 않았다는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만일 그때 롱패딩이 유행했더면 젊은이들이 한결 따뜻하게 촛불을 들었을 것이란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운동장이 아니라 광장에서 롱패딩을 나란히 걸쳐입고 대오를 이루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우스꽝스럽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왕 구입한 우리집 두 아이의 롱패딩이 좀 더 일찍 집에 도착해서 따뜻한 겨울나기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조기 축구회에서 몇 년 전 단체로 지급한 롱패딩을 쑥스러워서 운동할 때도 못입고 나갈 것 같습니다. 지금껏 너절하게 늘어놓은 말들은 어쩌면 고가의 롱패딩을 ‘시원하게’ 사주지 못하는 가난한 아빠의 푸념일지도 모릅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이현구 기자  awakefish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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