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눈 감으면 생각난다. 비행기로 7시간, 버스로 12시간 걸리는 그곳, 인도 다람살라가 눈만 감으면 떠오른다. 아니 눈을 감으면 난 이미 그곳에 있다. 그때 35살의 나는 침대 하나 놓인 단출한 방에서, 삐걱대는 낡은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파란 하늘과 설산(雪山)만 바라보았다. 당시 달력 속 이국의 정취인줄만 알았던 설산은 내 눈과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설산이 파란 하늘을 넘지 못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늘이 실체가 없는 허공임을, 내가 아무리 커져도 설산이 되지 못함을, 어리석은 나는 설산을 보고 나서야 비로서 깨달았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 35살 때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1년 휴직하고 배낭하나 메고 인도로 떠났다.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다니다가 일주일간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머물렀었다. 인도현지에서 나처럼 인도로 배낭여행을 왔던 의사 1명과 비구니 스님 1명과 함께 머물며 다람살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티베트 스님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 우리나라의 수제비와 비슷한 ‘뗀뚝’을 먹고, 홍차에 우유를 부어 만든 ‘짜이’를 한 잔 마시고, 다람살라를 주변을 거닐면 마음이 그렇게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다. 때로는 설산만 멍하니 바라보거나, 티베트 사원에 그냥 머물거나, 또 때로는 한국인 배낭여행객들과 함께 차를 빌려 근처로 놀러갔다 오니, 1주일이 정말 눈 깜빡 할 사이에 지나갔다.

지난 1일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한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동생인 제쭌 빼마 여사를 인터뷰 한 후, 잠깐의 시간이 남아 다람살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나니, 봉인됐던 추억과 기억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제쭌 빼마의 통역을 맡았던 이미경 씨도 과거를 되새기는데 한 몫을 했다. 약 10년 전 전 직장에서 티베트의 가수 나왕케촉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미경 씨가 통역을 했었다.

제쭌 빼마의 인터뷰에 앞서 데스크로부터 그냥 휴대폰 번호만 받아서 전화를 했는데, 통화를 하고 나니 그 때 그 이미경 씨였다. 10년도 훨씬 전, 개인 차 이외에는 운전을 잘 못하는데 회사차를 몰고 힘겹게 인천 법명사에 가서 스케줄을 잡고 미팅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당시 캐나다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던 아들이 어느새 장성을 해서 졸업을 했다는 이야기 등도 카톡으로 나눴다.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제쭌 빼마와 영어로 인터뷰를 끝내고 난 후 이미경 씨가 나한테 “아니 영어를 할 줄 아세요?”라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약 10년 전 30대 초반일 때 내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영어를 못해서 나왕 케촉과의 의사소통은 물론 프로그램 제작에 참 애를 먹었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나는 내가 영어를 못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제쭌 빼마 여사와의 인터뷰 현장에서는 이미경 씨한테는 학원을 6개월 다니니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둘러 됐지만, 영어로 듣고, 말하고, 쓰기가 가능해 진 것은 수년이 걸렸다. 말은 6개월 하니 더듬더듬 하게 되었는데, 마음먹을 대로 구사하기가 힘들었다. 캐나다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친척 형한테 이야기 하니, 토플 공부를 해보라고 권했다. 이후 영미권 대학을 졸업한 원어민이 가르치는 종합반 수업을 6개월 듣고 나서 영어구사가 한결 수월해 졌다. 대학 졸업 후 글을 쓰고 먹고 살았는데, 언어가 다르기는 하지만 영작을 5문장부터 시작해서 한 페이지 이상으로 나아가기 까지 수많은 첨삭 지도를 받으며 스스로를 자책하곤 했다. 영어 문법이야 그렇다 쳐도, 글의 전체적인 구성이 논리적이지 못하는 등의 말을 들을 때 면, 과거 후배들의 기사를 질책했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쩨쭌 빼마 여사를 인터뷰하고 이미경 씨를 만나면서 잊었던 기억과 추억으로 즐거웠다. 지금 돌이켜 보니 어린나이에 영어도 못했으면서 나왕 케촉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대견하기도 했다. 35살 무렵, 한때 우리나라보다 외국인 친구들과 더 많이 만나서 놀고, 미국영화와 드라마, 뉴스만 보고, 책도 영서만 읽고, 영어로 장문의 일기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이직을 하고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영어를 말하고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몇 년 전에만 만났어도 쩨쭌 빼마 여사에게 다람살라에 대한 내 기분과 느낌을 생생히 전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느낌을 다 전하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마침 달라이라마방한추진위원회가 작년 8월 다람살라에 가서 찍은 다큐영화 ‘오 다람살라’의 시사회를 곧 연다고 한다. 다람살라에 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독특한 평화로움을 영상으로 어떻게 담아 냈을까 정말 궁금하다. 물론 다람살라에 직접 가보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다큐영화 ‘오 다람살라’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방한과 지구 한쪽에 우리와 다른 가치관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아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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