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지암산에 묻혔지만 지금은 묘의 흔적을 찾지못해 안타까워....<아침세상강원>

*방송: 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앵커: 박경수 부장
*출연: 권혁진 소장(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방송시간: 2017년 3월 9일(목) 8:30 ~ 8:55
*방송주파수: 춘천 FM 100.1 MHz, 속초 93.5 MHz, 강릉 104.3 MHz

 

[다음은 방송 전문입니다]

 

*박경수 앵커:

목요일에는 강원도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숨결을 따라가보지요.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과 함께 합니다. 권혁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혁진 소장:

네 안녕하세요

 

삼한골의 전경

*박경수 앵커:

지난 2주 동안은 석파령의 역사를 짚어봤습니다. 석파령은 ‘유배와 은둔’의 역사와 함께 우리 근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춘천의병 아리랑’의 한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죠. 그런데 어쩌면 지금 우리 정국이 ‘석파령’에 서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박영수 특검의 눈물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던데요. 소장님은 어떠셨어요?

▶권혁진 소장:

박영수 특검은 "한정된 수사 기간과, 주요 수사 대상의 비협조 등으로 특검 수사는 절반에 그쳤다"며 아쉬움을 내비쳤고, "특검 수사 핵심 대상은 국가권력이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된 국정농단과, 우리 사회의 고질적 부패고리인 정경유착"이라며 "국정농단의 사실이 밝혀져야 새로운 소통과 화합의 미래를 이룩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절반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수사가 아쉬웠기 때문에 만감이 교차한 것 같고,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박경수 앵커:

우리가 운명의 한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내일로 예정돼있습니다. 여론조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국민여론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있구요. 헌재의 결정, 어떤 자세로 받아들여야할까요?

▶권혁진 소장: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행하여도 얻지 못하거든 자기 자신에게서 잘못을 구할 것이니(行有不得者皆反求諸己), 자신의 몸이 바르면 천하가 돌아올 것이다" 《논어》에는 "군자는 허물을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허물을 남에게서 구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를 반구저기(反求諸己)라고 하는데 이런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수 앵커:

알겠습니다. 차분하고도 담담하게 새로운 리더쉽을 준비해야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구한말 외세에 온몸으로 맞섰던 분이죠. ‘홍재학(洪在鶴, 1848~1881)’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역사속에서 배웠지만 34살에 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합니다. 어찌된 사연인지부터 얘기를 해주시죠.

▶권혁진 소장:

1880년에 조정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책략』을 전국의 유생에게 배포하고, 이듬해 전국의 유생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홍재학 선생의 상소문이 가장 과격하였습니다. 그는 상소문에서 당시 개화정책에 앞장섰던 신하뿐만 아니라 국왕까지도 서슴없이 비판하였고, 결국 이 상소로 위정자들의 격분을 사서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박경수 앵커:

문제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는 지 궁금해지는데요?

▶권혁진 소장:

『조선책략』은 청나라 사람 황준헌(黃遵憲)이 지었는데, 러시아 남하정책에 대한 대비책으로 조선은 청나라와 친하며 일본과 결속을 맺고 미국과 연맹을 맺는 외교정책을 수립할 것과,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책을 쓸 것 등을 주장했습니다. 유림은 이 책이 나라를 개방하고 외국 물건을 따라야할 것을 주장한 사악한 책으로 규정하고, 책을 국내에 반입하고 보급한 김홍집 처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박경수 앵커:

더군다가 그런 내용의 책을 전국 유생들에게 일방적으로 배포했던게 사단이었네요. 국정교과서가 생각나는군요?(웃음)

▶권혁진 소장:

조선책략은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自强)을 강조한 점 등에서 취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입장이 아닌 청나라 입장에서 본 전략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널리 협조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일본과 결속을 맺으라는 것에 대한 반발이 심했습니다. 일방적인 정책은 언제나 물의를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춘천 북중면(現 신북읍 장본리)에서 권혁진 소장

*박경수 앵커:

홍재학이 참형을 당한게 1881년, 당시 34살의 젊은 나이였어요. 고종의 잘못까지 지적한 용기는 어디서 나왔다고 봐야하나요? 역시 화서 이항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비롯됐다고 봐야겠죠?

▶권혁진 소장:

홍재학 선생은 이항로 선생을 섬겼고, 김평묵 선생과 유중교 선생에게서 배웠습니다. 화서학파의 적통을 이은 분들에게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홍재학 선생은 화서학파 안에서 공부하며, 화서학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긴 지행합일(知行合一)도 이러한 학풍 아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홍재학의 묘지명을 쓴 분이 김평묵이더라구요. 홍재학 형제와의 인연이 깊었던 모양입니다. 흔적들이 많이 있지요?

▶권혁진 소장:

김평묵 선생과의 인연은 특별했는데, 서재의 이름을 지어주고 「여지당명(勵志堂銘)」이란 글도 지어주는데, 글에 의하면 홍재학 선생은 소양강의 북쪽인 장번(章樊)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발산리인데, 그곳에 위치한 삼한동을 함께 유람하고 13수의 한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박경수 앵커:

홍재학이 태어난 곳이 춘천 북중면이더라구요. 북중면은 지금 어디를 의미하나요?

▶권혁진 소장:

춘천 북중면(北中面)은 춘천을 중심으로 북쪽 중간에 위치했다 하여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신북읍에 속한 발산리, 장본리, 유포리, 천전리를 포함한 지역을 일컫습니다. 북중면에서도 장본리가 있던 지금의 발산리가 홍재학 선생이 꿈을 키우던 곳이었습니다.

 

*박경수 앵커:

짧은 삶,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셨는데...감옥에 갇힌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숱한 일화를 남기셨더라구요. 인상적인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해주세요.

▶권혁진 소장:

홍재학 선생은 상소를 올리기 위해 상경투쟁을 했는데 60여 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운 후 새벽에 나가 엎드렸다가 어두워야 물러났으며, 한여름 심한 더위에도 조금도 거르지 않고 밤에는 숙소에 와서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경전을 외웠다고 합니다.

사형장에 가려고 수레에 올라가서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나를 기대게 하지 말고 세워 놓아라. 군자는 서 있는 자세가 덕이 있게 보여야 한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칼도마에 엎드린 최후의 순간에 말하길, “내 머리를 똑바로 해라. 군자는 머리가 바라야 한다.”라고 하자 형벌을 집행하는 자는 칼을 던지고 오열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구층대 폭포

*박경수 앵커:

‘춘천이 낳은 구한말 최고의 의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춘천 서쪽 지암산에 묻히셨다고 하는데, 지금 흔적이 있나요?

▶권혁진 소장:

홍재학 선생의 영구가 춘천에 오자 상복을 입고 곡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그해 10월에 춘천 서쪽 지암산(支巖山)에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지암산이 어딘지,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혹시 청취자 중 아시는 분이 있으며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박경수 앵커:

워낙 추모의 분위기가 강해서였는지, 돌아가신 뒤 얼마 안돼서 곧 신원이 복원되더라구요? 언제 복원되나요?

▶권혁진 소장:

1881년에 돌아가셨는데, 고종 31년인 1894년 12월 27일에 총리대신과 여러 대신들이 죄명을 취소해야 할 사람과 벼슬을 회복시켜야 할 사람을 구분하여 보고하게 됩니다. 그때 죄명을 취소할 명단에 홍재학 선생이 포함되었고, 임금이 결재를 하여 복원되었습니다.

 

*박경수 앵커:

홍재학 선생의 혼이 위정척사를 내건 구한말 의병의 투혼으로 살아나가게 되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지요. 이 과정에서 순국하는 분들이 잇따르는데...홍재학 선생을 그리며 시를 지은 분이 있지요?

▶권혁진 소장:

이만도(李晩燾, 1842~1910)라는 분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1905년 한일합병이 단행되자 유서를 쓰고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순국한 분입니다. 홍재학을 그리며 지은 시가 눈길을 끕니다.

 

상소 올린 홍 절사의 모습을 내 그리나니 / 我懷擧幡洪節士

기둥에는 피 흐르고 수레 축이 부러졌네 / 柱血逬流折轘軌

오랑캐도 홍 절사의 의리 아는 마음 있어 / 虜人亦有義理心

충성심 장려하며 슬피 제문 지었다네 / 反奬危忠致哀誄

 

홍재학 선생의 절의를 드높인 시라고 하겠습니다.

 

박경수 앵커 (=삼한골에서, 앞으로는 산림청 숲길로 조성된다)

*박경수 앵커:

오늘은 구한말 온 몸으로 외세에 맞서다 34살 짧은 인생을 마친 의인, 홍재학 선생을 짚어봤습니다. 소장님! 다음주가 궁금해지는데, 아무래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이후 아이템을 선정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웃음)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권혁진 소장:

감사합니다

 

*박경수 앵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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