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남자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다섯수레 책은 읽어야 마땅하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남긴 시의 한 토막입니다. 다독(多讀)을 권장하는 이 구절을 어린 시절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숱하게 들었습니다. 아마 교과서나 참고서에서도 봤을 겁니다. 어떻게든 제자들 책보는 습관 좀 들이려고 이 고사성어를 입에 붙이고 다닌 선생님도 기억합니다. 나름 제게는 서재에 대한 열망과 지적 욕심을 키워준 ‘키워드’였습니다. 얼마 전 한창 사춘기인 중학교 2학년 딸 아이에게 ‘남아수독오거서’를 우리말로 풀어주며 슬쩍 물어봤습니다. 들어본 적 있냐고. 예상대로 금시초문이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자는 책 열심히 안봐도 된다는 얘기네”란 예리한(?) 멘트만 따라왔습니다. 본전도 못 건진 아이와의 대화 끝에 학부모로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결국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너희 학교는 방학 때 독후감 숙제도 안 내냐?”

 트럼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며칠 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백악관 8년을 버틴 힘은 잠들기 전 1시간의 독서”라고 털어놨습니다. 최고 결정권자로서 외로움에 빠졌을 때 링컨, 마틴 루서 킹, 간디, 넬슨 만델라 등의 저작물을 읽으며 연대감을 느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삶을 조망하면서 역사에 대한 안목과 낙관적인 견해를 얻었다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젊은 40대에 세계를 지휘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보여준 용기와 지혜, 유머는 풍부한 독서에서 나온 셈이었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며 최근 대통령의 도서 목록을 임기 중 처음 공개한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가 떠올랐습니다. 탄핵 소추안 국회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박 대통령이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을 읽고 있다고 넌지시 흘려 신선한(?) 뉴스를 만든 참모의 말을 저는 청와대 기자실에서 직접 들었습니다. 집무실 출근조차 매일 하지 않았다는 우리 대통령은 한결 한가해진 ‘유폐 생활’에 접어들어 비로소 독서의 시간이 생긴 건가요? 만약 미국의 오바마가 관저에서 밤 늦게까지 TV드라마 시청하는걸 즐겼다고 털어놨다면 어땠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잠시 해봤습니다.

 대권주자 지지율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책이 나온다는 소식에 지난 17일 득달같이 구입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묻는다'란 제목의 이 책은 출판사 주장대로라면 출고 1시간 30분만에 제 손 안에 들어왔습니다. 출판사가 보도용 책 200권을 들고 온다는 소식에 국회출입 후배에게 책값 17,000원을 쥐어주고 줄을 서도록 해서였습니다. 김영란법 때문인지 공직선거법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기사를 쓰기 위한 도서도 무상으로 주고받아서는 안되는 철칙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받아든 책은 손수 글을 써서 펴낸 책이 아니라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이란데서 “돈 주고 살만 가치가 있었을까?”하는 후회가 조금 밀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약간의 실망감 속에 책을 넘기며 대선주자 문재인의 삶과 비전을 파악하던 중 38페이지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불러놓고 다그치듯 소리내서 읽어줬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찾은 피난처가 책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무렵에는 아주 문닫을 시간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책걸상 정리하는 것 까지 도와주고 집에 돌아올 정도로 책에 빠졌습니다. 닥치는대로 읽었죠. 보통 아이들처럼 가끔은 야한 책도 읽었고요...” 이번에도 돌아온 말은 탐탁치 않았습니다. “문재인도 어릴 적에 야한 책 좋아했구나!”

 책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우리 아이들의 방학이 끝나갑니다.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두 딸 모두 이번 겨울방학 한달간 도서관 근처에도 한 번 가지 않았고, 교과서나 학원 교재를 제외한 책을 들고 앉은 모습도 전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녀석은 주말에도 공부를 쉬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일요일인 오늘도 밤 9시에 수학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차에 태워 데리고 왔습니다. 물론 이 아이들은 결코 잠들기 전에 위인전이나 소설, 역사책을 손에 쥐지 않습니다. 책 좀 보라는 아빠 엄마의 잔소리에는 힘이 빠진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독서를 매우 좋아하고 독서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국가 지도자가 공교육 속에서 아이들의 인식을 바꿔줬으면 하는 바람만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책을 보면서 잠드는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까요?/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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