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1946년 의암 묘소 참배 "나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요"

*방송: 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앵커: 박경수 부장
*출연: 권혁진 소장 (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방송시간: 2016년 12월 15일(목) 8:30 ~ 8:55
*방송주파수: 춘천 FM 100.1 MHz, 속초 93.5 MHz, 강릉 104.3 MHz

 

[다음은 방송 전문입니다]

 

*박경수 앵커(이하 박 앵커)

: 목요일에는 강원도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숨결을 따라가보지요.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과 함께 합니다.

 

*박 앵커

:권혁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혁진 소장(이하 권 소장)

:네 안녕하세요

 

유인석 선생과 의병들(의암공원 조각)

*박 앵커

:지난주에는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새겼지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킨 뒤 촛불집회의 성격은 그야말로 축제였습니다. 서울 광화문에 많은 분들이 나와 축포를 쏘기도 했는데, 강원도는 어땠나요?

*권 소장

:강원도도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뒤인 10일 오후 강원도 내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춘천의 경우 새누리당 김진태 국회의원 사무실 앞에서 대통령 즉각 퇴진 및 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시민 1천여 명이 참가해서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

 

*박 앵커

:우리가 지난주 방송이 끝난 뒤 국사봉을 다녀온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아주 시의적절한 유적지를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떠셨어요?

*권 소장

:저도 국사봉에 직접 올라가니 백여 년 전 선비들의 울분과 절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국사봉 망제탑에 새겨진 시 중에서 “삼천리 온 나라가 눈물 뿌리자( 一灑三千疆), 귀신도 함께 눈물 흘리는구나(鬼神亦爲淚)”라는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왜 치욕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다시 생각하고,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겠다고 반성한 시간이었습니다.

 

*박 앵커

:저도 그 구절이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어제(14일) 알아본 것처럼, 이제 제도적으로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결정이죠, 이른 시일안에 대통령 탄핵을 최종 확정지어주길 기대해보구요.

오늘은 구한말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독립군 대통령’으로 불렸던 분이죠, 의암 유인석 선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인석 선생이 춘천 가정리에서 태어나셨더라구요?

*권 소장

:의암 유인석 선생은 춘천시 남면 가정리가 고향이십니다. 가정보건진료소 맞은편 골짜기인 여우내골에서 1842년 1월 27일에 태어나셨고, 74세인 1915년 1월 29일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1년 후인 1936년 3월 10일에 고향으로 이장되셨습니다.

 

*박 앵커

:효심이 상당히 깊었던 모양이죠? 기록에 남아있다고 하던데....

*권 소장

:1939년에 문인인 이정규(李正奎)가 작성한 행장에 유년시절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종일 베를 짜느라고 허기진 기색이 있으면, 자세히 살펴보다가 콩을 구하여 볶아서 올렸다고 합니다. 부친이 병환을 앓으시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자 강가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마침 어부가 지나가다가 사연을 물어보고 기특하게 여겨 메기 한 마리를 주어 부친께 공양하였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많은 일화가 있지만 시간 관계상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박 앵커

:아무래도 유인석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화서 이항로 선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암’이라는 호도 이항로 선생이 붙여주셨다면서요?

*권 소장

:14세 때 선생은 친척인 유중선의 양자로 입양되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자잠 마을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양증조부인 유영오(柳榮五)는 화서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만나본 후 학문과 인품에 감동하였습니다. 이후 교류하면서 자제들과 인척 아이들을 화서 문하에서 공부시켰고, 유인석 선생도 1855년 3월부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화서 선생은 학생 유인석의 인품을 칭찬하며 의암(毅庵)이란 호를 지어주셨습다.

 

*박 앵커

:춘천에는 의암호도 있고, 의암공원도 있는데, 다 유인석 선생과 관련이 있는건가요?

*권 소장

:동음이의어라서 혼동하시는 분도 있는데요, 의암호는 옷바위[衣巖]란 의미로 의암댐 부근에 있는 바위에서 유래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옷바위[衣巖]를 옻 칠자인 칠암(漆巖)으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의암공원은 공원 가운데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동상이 서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인석 선생의 호인 의암(毅庵)이 맞습니다.

 

유인석 선생 동상 설명을 읽고 있는 권혁진 소장

*박 앵커

:강원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유인석 선생과 신사임당을 꼽는다고 하던데...그래서 의암공원이 만들어진거군요. 그럼 의암 유인석 선생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에 나서게되는 계기가 있었나요?

*권 소장

:1895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었습니다. 이때 선생은 모친상 중이었는데 강원도 원주 안창리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춘천을 비롯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제천의 의병은 청풍 단양 등지를 점령하면서 크게 승리했으나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에게 의병대장을 건의하자 효도도 중요하지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는 제자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1895년 12월 24일(음력) 영월읍에서 호좌의병대장이 되셨습니다.

 

*박 앵커

:당시에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의병활동을 독려하는 격문을 보냈다구요?

*권 소장

:호좌의병대장이 된 유인석 선생은 바로 전국의 모든 고을에 알리는 격문인 「격고팔도열읍」을 발송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아! 우리 팔도의 동포가 한꺼번에 다 죽게 되었는데, 차마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부친과 조부로부터 모두가 조선 오백 년의 백성인데, 어찌 우리나라와 우리 가문을 위한 한두 명의 의로운 선비도 없는 것입니까? 참담하고 슬픈 일입니다. ~~~~ 반드시 마음 깊이 새겨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서 한가지로 대의를 펼쳐야 합니다.” 결의에 찬 선생의 심정을 대변하는 글이라 하겠습니다.

 

*박 앵커

:그 후에 만주로 갔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되는데, 다시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을 가시게되더라구요? 1908년입니다. 그 당시에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지게되는거죠?

*권 소장

:1900년 7월(음력)에 귀국한 선생은 여러 지역 일대를 순회하며 강연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1907년에 전국 13도에서 의병이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문을 썼고, 그러던 중 음력 10월에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본가는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고 동생 유하석이 살해당하는 등 피해가 커서 결국, 1908년 음력 2월에 60여 명의 문인들과 함께 부산 동래로 이동하여 뱃길로 연해주로 떠나게 됩니다.

 

*박 앵커

:결국 1910년 국권이 일제로 넘어가던 무렵 연해주에서 의병군의 총대장인 ‘13도의군 도총재’가 되시네요?

*권 소장

:연해주 의병들은 10여 차례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의 대응이 심해졌습니다. 이에 의병들은 상호 간의 규칙과 조직 체계를 갖출 필요를 느꼈고, 선생은 의병대를 13도 의군으로 편성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의병들은 선생의 뜻에 동조하고 마침내 1910년 6월 21일에 대한 13도의군 도총재가 되었습니다.

 

*박 앵커

: 1915년 1월 29일에 중국에서 돌아가시는데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은 한시가 남아있죠? 소개를 좀 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권 소장

: 지병을 앓던 선생은 74세의 노구에도 학자의 본분을 잊지 않고 책을 집필하다가 1915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니다. 이 해 설날에 지은 시가 있는데,

오늘은 일흔에 넷을 더한 늙은이 / 今作七旬加四翁

한평생 어찌하여 일마다 허사(虛事)런고 / 一生何事事空空

남은 해가 얼마인지 알 수 없건만 / 不知餘有幾多歲

하늘이 열어놓는 큰 도를 보았으면. / 得見天開大道中

여기서 큰 도인 대도(大道)는 독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셨던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박 앵커

: 대도(大道)라는게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의미하네요. 돌아가신 지 20여년 후에 춘천 가정리로 이장되는데요. 해방 이후에는 김구 선생이 유인석 묘소를 참배하시기도 했죠?

*권 소장

: 74세인 1915년 1월 29일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21년 후인 1936년 3월 10일에 고향으로 이장되셨습니다. 1946년에 김구 선생께서 묘소에 “향불을 피우며 무한한 심사를 하소연하오니 영령께서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요"”라는 내용의 고유문을 낭독하고 참배하셨습니다.

 

유인석 동상에 참배한 박경수 앵커

*박 앵커

: 저도 방송이 끝나면 유인석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와야하지않을까 싶네요. 끝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의암 유인석 선생이 남겨준 메시지는 뭐라고 봐야할까요?

*권 소장

:서양과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면서 국내와 해외에서 초기 항일의병을 주도한 유인석 선생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서양의 세력을 배척하자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저는 유인석 선생의 지행합일의 삶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사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가 면면히 계속된 것은 지행합일과 같은 선비정신이 살아 내려온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의 지행합일의 삶은 우리에게 삶의 방법을 제시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박 앵커

: 의암 선생의 유지가 백범 선생으로 이어지는건데요. 의암, 백범 선생의 독립정신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뿌리내리기를 기대해봅니다. 앞으로 또 시련이 있을 수 있겠지만요....

*권 소장

: 오늘은 춘천 가정리에서 태어난 독립군 대통령 ‘의암 유인석 선생’의 역사를 짚어봤습니다.오늘 얘기 잘 들었습니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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