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사냥’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 우선 송창식의 노래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영화 고래사냥’도 떠오른다. 남자들이라면 학창 시절에 어른이 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수술도 떠올릴 것이다.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냈다면 학교 앞 술집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을때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고래사냥’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도 꽤 많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고래사냥’은 아주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필자는 아주 어릴때부터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세상사는 진솔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때로는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싶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소설가는 되고 싶으면서도 정작 책 읽는 일은 소홀히 했다. 활자로 된 책보다는 영상 언어에 더 친근감을 느겨 오랫동안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몹시 당황하게 된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 책도 제대로 읽지 않아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지나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꽤 수준이 있어 보이고 어려운 내용의 책 이름을 들먹이며 고상한 척하는 위인도 못 된다.

그래도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을 꼽는다면  故 최인호 작가의 ‘고래사냥’을 꼽는다. 사실 고래사냥은 책보다 영화로 먼저 만났다. 1984년 어느 날, 중학교 3학년이던 필자는 친척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청량리 오스카 극장(아쉽게도 지금은 없어짐)의 대형 간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창호 감독 연출에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주연의 영화 고래사냥의 상영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혼자 극장에 들어갔다. 당시 동경했던 대학 생활을 영화를 통해서나마 엿보고 싶었던 마음도 강했던 것 같다. 소문대로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줬다. 2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내내 때로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때로운 눈시울을 붉히기를 반복했다. 극장을 나오자 마치 자유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거리를 이러저리 쏘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나니 최인호의 원작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입시를 앞둔 중 3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원작 소설을 바로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고입 연합고사를 무사히(?) 치른 뒤 그해 초겨울에 소설 고래사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고래사냥의 주인공 병태는 서울의 모 대학 철학과 3학년으로 작고 병약한 몸에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데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소심한 대학생이다.(당시에는 소설이든 영화든 주인공인 대학생은 대개 철학과였다)

숱한 방황과 괴로움 속에 대학생활을 하던 병태는 학교와 집을 나와 뜬금없이 고래를 잡겠다며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 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민우’(안성기)다. 그는 집도 없는 부랑자로 거지 생활을 하지만 조금도 초라해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고궁이나 동물원에 몰래 들어가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고층 빌딩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세면과 면도까지 하는 민우의 모습에서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유인의 삶이 오히려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병태는 민우의 생활에 빠져들면서 자유를 만끽하게 되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사는 법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두 사람은 사창가에 팔려온 벙어리 처녀 춘자(이미숙)를 구출해 고향까지 데려다주기로 하고 긴 여정에 오른다.

이 소설의 제목은 왜 고래사냥일까 ? 소설에서 병태는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벙어리 창녀 춘자가 80년대 군사 독재 시절 억압받던 민중을 상징한다면 고래는 민중해방이라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심한 대학생 병태가 말한 고래는 숨막히는 제도권과 기성 질서를 거부한다는 의미와 함께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순수와 이상향, 진정한 삶의 자유와 해방을 뜻하는 것이라고 본다.

고래사냥이라는 소설을 읽고 난 직후에는 학교와 집을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기존의 제도와 질서,우리 사회의 엄숙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감도 커졌다. 강산이 세 번이 바뀐 지금도 필자는 참된 자유와 진정한 마음의 해방을 꿈꾼다. 10대 시절이나 50대를 눈앞에 둔 지금이나 정해진 규율이나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여전히 강렬하다. 그러나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시대는 왔지만 병태가 그토록 찾으려했던 고래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진게 아닌가 싶다. 고래사냥 노래 가사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기 때문이 아닐까 ?

우리에게 고래를 잡으라고 외쳤던 최인호 씨는 지난 2천 8년 침샘암에 걸려 투병 끝에 2013년 6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 시대의 청년 작가 최인호 씨는 떠났지만 남아있는 우리들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야 한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앞서고 돈과 권력이면 무슨 짓을 해도 다 되는 세상에서 고래가 숨을 쉬고 살기는 너무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올 여름에는 모처럼 동해 바다를 보러 가야겠다. 잃어버린 고래의 흔적이라도 찾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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