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는 특별히 정의로운가? 잘 모르겠다. ‘정운호 게이트’ 등으로 서초동이 완전히 도매금으로 넘어갔지만 그래도 기자는, 영화에서처럼 ‘법의 심장’을 노래하며 날마다 ‘사법정의’를 곱씹는 열혈검사들이 곳곳에서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수백 건의 사건을 주꾸미 소주 한 잔과 라꾸라꾸 침대에 의지해 처결하는 용기 있고 따뜻하고 공평하고 바른 검사들이 오늘도 재판정을 채우고 있다고 본다. 내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내 자식들이 살아갈 다음 세상이 최소한 이것보다는 낫게끔 ‘향기로운 꽃 한 송이는 피우고 간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검사들이 분명 아직 많을 것이다.

그런데 검사는 공무원이다. 기본적으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잠깐 머물렀다 가는 대통령에게, 그것도 정책이든 재정이든 일단 막히면 공무원들부터 마른 걸레 쥐어짜듯이 짜는 게 이 나라의 대통령들이었는데 충성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눈감고 귀 막은 채로 그때그때 자기 한 몸 먹고살기 바쁠 뿐이다. 더욱이 검사는 특별한 공무원이다. 이 사람이 죄가 있으니 처벌해달라고 유일하게 판사에게 요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언제까지나 지속성을 갖고 싶어 하고, 최고 권력의 유효기간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아마 현직 대통령에게 가장 빨리 다가가고 가장 먼저 도망치는 공무원 집단이 검사일 것이다.

또한 공무원만큼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집단도 없다. 관료의 가장 솔직한 민낯이고 숨길 수 없는 속성이다. 직업 정치인들과는 또 다른 권력의지고 정치적 야망이다. 바다 건너 세계의 대통령, 유엔 수장을 맡고 있는 분의 노욕(老慾)을 보라. 우리도 이제 존경할 만한 외교관 한 명쯤은 가질 때도 됐건만 단 한번도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대선 판’이라는 데가 정녕 어떤 곳인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그 불구덩이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사실 빗자루 들 힘만 있어도 한 자리 준다고 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여생을 바치겠다”는 게 공무원들 아닌가. 한 때 모래시계 검사였던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여당 대표 시절 “모든 율사들의 꿈은 대통령이 아니라 검찰총장”이라고 단언했다. 검사들에게 검찰총장은 그런 것이다. 혹여 “나는 검찰총장 같은 거 안 한다”고 장담하는 검사가 있다면 그건 아마 일찌감치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당장 시켜준다는 데 안할 검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기자는 특별히 정의로운가? 잘 모르겠다. 한 평 방 안에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기자라고 설치고 거들먹거릴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조지는 기사 한 꼭지와 광고 한 꼭지를 물물교환 하듯 바꿔먹는 사이비 기자들이 즐비한 시궁창 언론계가 됐지만, 그래도 기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어먹지 않는 맹수처럼, 여전히 깨어있고 날이 서 있는 기자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알려주고 전해주고 가르쳐 주고 바로잡아 주는 게 다 기자의 할 일이겠지만 그래도 역시 기자의 가장 주된 본능은 '정론직필(正論直筆)'이고 '비판'이라는 데 흔쾌히 동의하는 필봉(筆鋒)들이 우리 세계의 근간을 이룬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기자는 회사원이다. 기자 이전에 회사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언론사지만 분명 하나의 기업인 그 회사가 추구하는 이익에 봉사하고 가치에 따라야한다. 기자 자신이 소속된 언론사의 논조와 지향을 묵살하고 그 조직에 몸담고 있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 소속 언론사에서 그런 기자들을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기자에게 조계종단의 큰 스님들을 언제 어느 때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물론 기자들은 ‘특별한 회사원’이다. 국회의원들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듯이, 기자 개개인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기사로 가장 강력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자들이 기자를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 역시 회사의 방침과 사시(社是)의 종속물인 ‘데스킹(Desking)'이라는 성형을 반드시 거쳐야한다. 아니면 세상의 빛을 아예 볼 수 없다. 지난 세월 ‘편집의 독립권’을 놓고 벌어졌던 언론사 내부의 모든 갈등이 다 여기에서 비롯됐다.

오는 9월 시행되는 ‘김영란법’을 기자들 대부분은 ‘재앙’으로 취급한다. 맨 날 얻어먹고 다니는 기자들의 ‘거지근성’이자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일 뿐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은 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 너머도 봐야한다. 보다 투명하게 우리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입법 취지에 어떤 기자들이 반대하겠는가. 다만, 박봉의 기자들을 밥 한 숟가락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만들면, 가진 자들과 권력기관들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언론의 자유는 끝없이 추락하고 위축될 것이다. 11조 원의 경제적 손실 등등은 그 다음 얘기다. 언론은 공공기능을 하지만 공공기관이 아니다. 민간사업자 가운데 언론사만 적용대상으로 하는 것은 분명한 차별이다. 늘 못미덥고 부족하고 모자라 보여도 국민들의 마지막 보루는 그래도 언론이고 기자다. 다음 달쯤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판단이 내려진다고 한다. 언제나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정치적 판단을 일삼는 게 헌재라는 얘기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기자로서 믿고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검사와 기자는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공생(共生)해야 하나? 군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공통점은 있다. ‘오직 국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도 같이 쓴다. 여전히 담배를 많이 피고 소폭(소주와 맥주 혼합주)을 사랑하는 직업군이다. 우리 사회에서 거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가진 힘만큼 돈을 못 버는 사람들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정치인들만큼이나 언론에 신경 쓰는 게 검사들이고, 기자들도 그 어떤 취재원들보다 검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검사와 기자, 안 친한 게 좋다. 아니, 본질적으로 친해질 수도 없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친한 척 할 뿐이다. 같은 과(科)의 맹금류가 어찌 한 데 어울려 산단 말인가. 서로 경계를 긋고 늘 감시하며 밤낮으로 으르렁거려야지. 어쩌면 검사와 기자가 그렇게 물어뜯으며 살 떨리는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 사회는 ‘정의’를 논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워지고 건강하게 진일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회부장] [2016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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