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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동티베트를 다녀와서 ②] 세계를 향하는 티베트 불교
홍진호 기자 | 승인 2015.07.19 17:09
   
▲ 달라이라마로 대변되는 현대 티베트불교는 세계의 불교로 성장했다.


필자가 티베트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미국이었다. 2003년 이었던가? 조계종 총무원이 보내 준 출입기자 대상 미국 불교연수에서 였다. 9박 10일 간 미국 LA와 뉴욕의 한국 사찰과 불교대학, 젠 센터 등을 탐방했는데, 그때 미국 내에서 이미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를 제치고 주류로 자리 잡은 티베트 불교를 목격하게 됐다. 나라 잃은 민족의 불교가 오래 전 미국에 진출한 일본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미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었다. 미국 방문 당시 미국 UCLA에 근무하던 로버트 버스웰 교수를 만났는데, 티베트 불교를 향한 그의 칭찬은 한 참 동안 이어졌다. “티베트 스님들은 매우 똑똑하고 영어도 잘합니다.” 젊은 시절 송광사로 출가했던 그는 한국불교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었기에 줄줄이 이어지는 티베트 불교에 대한 그의 칭찬은 한국불교를 향한 애정어린 채찍으로 들렸다.
 
그 당시 미국 연수 때 영어를 단 한마디로 못했던 본 기자는 귀국하자마자 원어민 회화를 약 1년 동안 수강했다. 이후 외국인과의 대화와 인터뷰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고 원서를 부담 없이 보게 되자, 외국 사이트를 뒤지며 달라이라마에 대한 기사들을 탐독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달라이라마와 관련된 특집 다큐를 많이 제작했기에, 직, 간접적인 자료들도 상대적으로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10년 1년 동안 회사를 휴직하고 인도 여행길에 오르면서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때 필자는 인도 델리에서 약 12시간 밤 새워 버스를 타고 다람살라로 향했었다. 그리고 그때 다람살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사진과 영상이 아니라 실제 티베트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 지난 2010년 인도 여행중에 촬영한 다람살라의 티베트 사원


 그는 키가 매우 컸다. 목은 내 종아리만큼 두꺼웠고, 쭉 펴진 어깨는 당당했다. 그 옛날 중국 한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토번의 전사가 연상이 됐다. 작은 키에 나쁜 눈, 탈모까지 육체적으로 열성인자의 집합체인 기자에게 그 티베트인의 육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참 눈여겨서 자주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 티베트인과 인도인 버스 운전기사와 시비가 붙었다. 몇 마디 고성이 서로 오갔는데, 그 티베트 인의 당당한 목소리와 체격, 부릅뜬 눈으로 시비는 곧 잠잠 해졌다. 인도인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한번 하고는 초라하게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어떻게 보면 티베트인은 인도로 망명을 온, 나라 잃은 민족인데, 전혀 주눅 들지 알고 당당히 현지인들과 맞서는 그 기개에 더욱 반했다. 
 
이후 밤을 세워 달려 도착한 인도 다람살라는 그야말로 하늘 아래 천상이었다. 다람살라에 방문하기 전에 참 험하게 인도 전역을 돌아다녔는데, 서늘한 다람살라의 기후와 맛있는 티베트 음식, 독특하고 평화로운 다람살라의 분위기, 특히 게스트 하우스에서 한 눈에 보이던 설산은 감동 그 자체였다.
 
다람살라에는 티베트 스님들이 직접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와 음식점이 있다. 실컷 늦잠을 자고 당시 함께 인도여행을 했던 의사형님과 티베트 스님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자주 갔었는데, 그 때마다 음식점 한 쪽 구석 책상에서 다람살라에 놀러 온 서양인에게 1:1 영어수업을 받는 티베트 스님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티베트 불교가 영어로 미국 등 서구 전역에 활발히 티베트 불교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이러한 노력 때문 이었구나 정말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진각종과의 해외 취재에 동행하며, 네팔과 중국 승덕 등에 산재한 티베트 불교의 위용을 접할 수 가 있었다. 인도와 네팔 중국 곳곳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은 우리에게 낯설음의 대상이었던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가 현재 서구에 큰 울림을 줄 만큼의 깊은 역사와 저력이 있었음을 뒤늦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인은 우리에게 서안으로 잘 알려진 중국의 ‘산시’와 실크로드의 관문인 ‘간쑤’, 삼국지에서 유비가 세운 ‘촉나라’의 무대이자, 최근 큰 지진이 있었던 ‘쓰촨’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서부 변방, 그중에서도 고산지대에 사는 이민족 이었다. 존재감 없던 티베트족은 7세기에 이르러 중앙 티베트를 중심으로 토번이 생기면서 중국 서부지역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발전은 이에 앞서 각 개인과 부족은 강하지만, 국가단위의 통합이 어려웠던 유목민족을 티베트 33대 왕 손챈감포가 통합하고 통일국가를 세우면서 부터 티베트는 서서히 중국 중앙정부가 무시할 수 없는 무게감 있는 존재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손챈감포가 원했고, 또 티베트와 당나라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당시 당 태종은 문성공주를 감포 왕에게 시집보냈다. 양녀였지만 촉명 했던 문성공주는 이른바 양국의 우호관계의 상징으로서 큰 정치적 역할을 맡게 되었고 또 이를 잘 수행했다. 당시 티베트는 전쟁에는 능했으나, 이렇다한 문명과 문물은 없었는데, 문성공주가 그때 함께 데리고 간 주조, 제지 등의 기술자에 의해 티베트에 발달 된 중국문화가 전해졌다. 문성공주와 손챈감포 왕과의 결혼생활은 극히 짧은 것으로 전해지나, 문성공주는 치수와 의복 등 티베트의 발전을 위한 양국 간 가교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현재도 티베트의 수도 라싸 곳곳에 그녀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당시부터 티베트인들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믿게 되었다. 이역만리로 시집을 가면서 불상을 가지고 갈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성공주의 영향과 왕권강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송챈 감포왕의 노력으로 티베트불교는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손책감포 왕 사후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티베트는 약 400년 간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왕국의 몰락과 함께 티베트 불교도 침체기를 겪게 된다.

이후 원나라 때,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를 벗어나 중국의 통일왕조인 원나라와 만주족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성장했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티베트불교의 고승 파스파를 중용해서 황제의 스승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중국 서부지방을 중심으로 중국 곳곳에 티베트불교가 확대된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티베트는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중국의 종주권 아래에서 티베트 불교의 환생자인 라마가 정치와 종교를 함께 관장하는 재정일치 통치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현재에도 사용되는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 또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가 그 당시 티베트불교의 지도자에게 부여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들어 영국과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은 티베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 하고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고 여전히 티베트는 중국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때 티베트는 오랜 중국의 지배에서 잠시 벗어나 중립을 지키고 독립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의 독립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49년 중국 전역을 장악한 중공군이 이듬해 티베트를 침공했다. 이후 1951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본격적인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됐다.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지배에 저항하였고, 1959년 대규모 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14대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
 

   
▲ 14대 달라이라마는 올해로 세납 80세를 맞이했다.


이후 전 세계를 돌며 티베트의 자치를 촉구하던 달라이라마는 지난 2011년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은퇴를 선언했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되던 티베트의 제정일치 전통을 그의 대에서 끝낸 것이다. 그의 사후 중국정부가 중국정부에 우호적인 환생자를 후계자로 내세우게 될 우려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현재 14대 달라이라마의 영향력은 세계적이다. 중국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비공개로 만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역대 미국 대통령은 그와 만나고, 달라이라마가 프랑스 등 서구지역에서 법회를 열며 수많은 서구인들이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모인다. 인도 다람살라와 일본에서 열리는 법회에는 한국불자들도 많이 건너가 법문을 듣는다. 달라이라마라는 티베트 불교의 정통성을 이은 수장으로서의 권위만을 가지고 현재의 위치와 영향력을 얻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간결하고 쉬운 법문과 법력으로 서구인들을 감화 시켰고, 이를 통해 현대 티베트불교를 전 세계에 각인 시켰다.
 
개인적으로 달라이라마를 친견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전 직장에서 다큐 촬영을 위해 다람살라에 갔던 PD들이 들려주는 달라이라마와의 일화는 놀라웠다. 세계적인 불교지도자가 한국에서 온 제작진 한명 한명을 기억하고, 만날 때 마다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건넨다는 것이다. 마치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말을 건네다는 달라이라마를 생각하며, 달라이라마와 현대 티베트 불교가 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올해로 달라이라마도 어느새 세납 여든 살에 접어들었다. 달라이라마는 정치적 은퇴를 선언하기 전에 중국 정부와 수차례 비공개로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티베트의 자치와 관련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최후의 수단으로 그는 정치적 은퇴를 감행 한 것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티베트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누구보다 달라이라마가 더욱 잘 알 고 있다. 그러하기에 달라이라마는 스스로 은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사후 벌어질 혼란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달라이라마. 정치가로서의 은퇴선언 후 미국의 유명 신문사와 갖은 인터뷰에서 그는 은퇴 선언을 한 후에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달라이라마가 정치적으로 은퇴를 하고, 현재의 티베트가 새로운 정치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티베트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소수민족과의 문제에 있어서 민감하고 철저한 중국정부가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현재의 티베트 지역은 원래 먼 옛날에는 해양 지대였다. 지각변동으로 바다 밑 지역이 융기하여 히말라야 고산지대가 되었는데, 바다 속 심해의 풍부한 광물자원이 티베트 고산지대에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한다. 중국정부로서는 티베트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티베트는 중국 당 태종이 문성공주를 시집을 보낼 때부터 중국 역대왕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티베트는 친디아로 불리며 중국과 함께 세계경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인도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티베트는 중국이 인도를 견제하는 데 있어서 지리적으로 군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특히 중국내에서 한 번 소수민족의 자치가 허용되면, 다른 소수민족의 자치요구가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기에, 더욱 철저히 종주권을 유지 할 것이다. 때로는 외교적 위험까지 감내하면서 말이다.
 
오래 전부터 중국 대륙에서 가장 황량한 변방 고산지대에서 살아온 티베트, 중국 역대왕조와의 오랜 인연은 현대에 이르러 악연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비극의 현대사는 티베트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비극의 현대사로 많은 것을 잃었기에, 부족하기에, 없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며 세계 곳곳에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서쪽의 감춰진 나라에서 독수리처럼 큰 날개 짓을 하며 세계를 향해 날아간 티베트불교가 본토에서도 다시 티베트 불교를 활짝 꽃피울 수 있을지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홍진호 기자 / jino413@dreamwiz.com

홍진호 기자  jino41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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