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 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진행 : 이병철 방송부장

●2024년 3월 20일(수)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장소 : BBS제주불교방송 / 제주시 임항로 14(덕산빌딩 4층)

●코너명 : 집중인터뷰

[이병철] 교회 피해가 많지 않았다, 이런 말씀으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좀 논란의 4.3에서 가장 논란의 핵심이 되는 게 이 서북청년단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서북청년단이 서북의, 당시 기독교 중심의 성향을 갖고 있었던 그 청년들이 또 반공 과제에 맞물려서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어떤 악랄함을 보였다는 이런 증언들이 좀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목사님 생각은 좀 어떠신지요?

[김인주] 현장에서 고초를 겪었던 혹은 희생당한 사람들, 혹은 또 그걸 직간접으로 목도하거나 이야기를 듣고서 참 아픔을 간직한 우리 도민들의 입장과 또 당시 토벌대로 구성되었던 군인, 경찰, 또 둘 다 아닌 이제 서북청년. 그것하고는 또 굉장히 이야기가 좀 결이 다르지 않냐는 생각이 일단 들고요.

왜냐하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군복을 입었든 안 입었든 간에 그냥 서북 말 쓴다, 서청이로구나,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그 악마적 존재가 그냥 바로 내 앞에 있구나 하는 절망감에 몸서리 쳤을 텐데 서북청년단 중에서 그런대로 능력 있다고 그럴까요? 좀 운이 좋은 사람들은 이제 경찰이나 군으로 변신했고. 그다음에 거기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혹은 또 그런 어떤 조직을 싫어하고, 자유스럽게 그냥 다니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또 서북청년단으로 제주도에 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그런 세 번째 그룹으로는 한 760명 정도가 제주를 거쳐 갔다고 말하고 그중에 3분의 2 정도는 결국 그 사람들 희생됐어요. 그러면 뭐 200~300명이 남았다는 이야기인데 그중에 대부분은 또 귀환하지 않았을까. 이 전쟁이 끝나면서. 또 제주도에 정착하신 분들도 두 자릿수 이상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마는 그 과정에서 서청 혹은 서청하고 연대하고 있는 군경, 그 사람들도 서청으로 보면 꽤 늘어나는데 그러지 아니하고 이제 사복을 입은.

그 그룹만 서청으로 볼 때에는 꽤 줄어든다는 그런 어려움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걸 서술할 때는 또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그런 것이 구분 없이 그냥 막 이렇게 혼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는.

[이병철] 그러시군요. 제가 개신교 신자들하고 서청 간의 연관을 좀 여쭤봤는데 서청의 그 성격에 대해서 말씀을 하셔서. 그 연관성에 대해서 한 말씀 좀 해 주신다면?

[김인주] 그래서 군경으로 이렇게 변신한, 그것이 자신의 어떤 평생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일단 공권력의 집행자로서 이렇게 변신한 거니까 서북청년 출신이더라도 또 다른 이제 어떤 평가의 기준이 있어야 된다고 보고, 그러지 아니하고 어떤 사적으로 별동대식으로 여기저기 막 자유롭게 또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사태를 파악하기도 하고, 대처하고 또 공격했던 그런 서청들 중에서는 비교적 또 개신교 신앙인들은 적지 않았냐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이병철] 그러면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님께서 서청과 관련해서 개신교에 책임이 좀 있다, 이런 얘기들이 좀 있어서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김인주] 한경직 목사라는 책이 1982년에 발간됐는데 김병희 목사가 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또 여러 가지로 정리한 그런 구성입니다만 거기에 한 꼭지에 그런 서청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었다. 나중에 다 장로가 되었다, 또 당시 시국 사건을 많이 해결했고 또 제주도로 내려가서 평정했다는 진술은 나오는데 그걸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저는 굉장히 과장된 자기표현이 아닌가.

[이병철] 과장됐다고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또 어디에 좀 있으신지요?

[김인주] 글쎄요. 이제 불교는 그런 면에서 좀 정직한지 모르지만 개신교에서 특별히 이제 그 큰 설교자들인 경우에는 역사를 주관하고 대한민국이 움직인다, 내가 기도하면 다 통한다는 식의 좀 과신하는 그런 면이 있어요.

[이병철] 그러니까 저도 자료를 좀 보니까 한경직 목사님께서 이 공산주의를 굉장히 또 싫어했겠죠. 또 싫어했기 때문에 이 ‘괴물’이라는 표현을 썼고 또 그런 설교를 듣는 청년들은 없어져야 될 대상들, 제주도민들은 당연히 없어져야 될 대상들이기 때문에 어떤 서청에서의 행동이 그렇게 악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렇게 또 판단하신 분들이 좀 계셔서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요? 목사님 생각에.

[김인주] 일단 말씀하신 그 표현은 한경직 목사의 고유 표현은 아니고 이미 미국 교회가 그런 식의 구조를 하고 있었어요. 세계 역사의 흐름, 또 현재 이 난국을 그렇게 이제 공산주의라는 악마가 등장하면서 세계를 어지럽힌다는 생각을 가졌던 건데 그것을 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건 문제가 크죠. 그리고 또 이제 우리 아이들이.

[이병철] 그럼 목사님께서는 또 어떻게 해석하시고 계시는지요?

[김인주] 현재도 비슷한 국면이지 않나 생각이 드는 것이 예를 들면 광화문에 혹은 또 여기 모여서 보수집회를 갖는 그 사람들이 개신교적인 성격을 굉장히 크게 띄기도 해요. 또 일부 이제 목회자나 또 기독교 리더들이 거기 등장하기도 하고. 또 모인 사람 중에서 많은 수가 비율이 굉장히 신앙인들이 높긴 할 텐데 전체적으로 교회를 그대로 옮겨놨다는 건 아니거든요.

물론 그 이해관계를 같이 한 사람들이 모이는 건데. 제가 볼 때는 한경직 목사나 서울 영락교회가 줄기차게 어떤 보수 정권을 지탱해 주는 그러한 입장을 취했다. 시국이 조금 좋아지면 그런대로 대정부 비판을 하다가도 간첩 사건을 만들거나 무슨 큰일이 터지면 또 일사불란하게 우리가 공산화가 안 된 것만 해도 참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부 입장을 지지하고 쫓아왔던 것이 결국 아직 내려오지 않냐는 생각이 들고요.

제주영락교회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4.3 사건 발발하고 한 3년 지나서 전쟁 첫해를 지나면서 1950년 말, 1951년 초에야 비로소 이제 교회가 시작됐거든요. 그래서 제주에 왔던 서청들하고 연관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대신 이제 여기 내려왔다가 살아남아서 제주에 정착한 사람들 중에서는 그 교인들이 몇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구성원이 그렇게 많다고 생각되지는 않고요. 또 하나는 전쟁 때에 서울 영락교회가 제주에 피난하러 왔는데 한림에 거주했어요. 한림하고 수원에 그러면서 이제 한림교회하고도 교류가 굉장히 있었는데 그들을 서청 잔류자들이 와서 인사했다든지, 교류했다든지 그런 흔적도 전혀 없거든요.

[이병철] 그 지금 한경직 목사의 말에 의하면 서북청년단 본인이 이렇게 어떤 활동 지시를 내린다든지 이런 설교를 통해서 어떤 이미지가 지금 씌워져 있는 상황이라서요.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없어져야 할 존재. 이런 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또 어느 한 집안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으면 어떤 부적 같은 역할을 했다.

[김인주] 그 이야기는 저도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이병철] 그래서 저도 4.3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가거나 이렇게 하다 보면 가끔가다 이런 얘기를 하면 서청과 관련된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런 얘기가 좀 나왔어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럼 목사님 생각은 좀 어떠신지요?

[김인주] 그 당시에 어떤 천주교도 마찬가지거든요. 천주교는 피해자가 거의 없잖아요. 미군하고 통화할 수 있는, 그리고 영어권에서 온 선교사들이 꽤 있었고 개신교가 이들을 이렇게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교회로 오시면 살아남는다는 선전은 꽤 했던 것 같아요. 목사님의 설교 활동도 그게 주 내용이었고.

[이병철] 그런 역할들이 그러면 이제 목사님의 설교라든지 그런 걸 통해서 집안에 이렇게 십자가라든지, 성경이라든지 갖고 있을 때 어떤 부적 역할을, 아무튼 피해 없는, 그런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다고도.

[김인주] 크리스천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증거물이니까요.

[이병철] 그래서 서청의 피해를 덜 당하고, 고문을 덜 당하고 그런 증언들이 나왔었기 때문에.

[김인주]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고 봅니다.

[이병철] 그래서 제가 좀 여쭤봤습니다. 좀 무례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면 다음으로 좀 넘어가 볼까요? 사실 그러면 이제 결국은 목사님 생각으로는 이제 이와 같은 4.3과 관련된 종교별 진상 규명 좀 더 더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것 같으신데, 어떤 부분에 좀 더 진상 규명이 필요해 보인다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김인주] 드러나지 않고 숨은 이야기도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개신교와 일관되게 모두 토벌대나 미군 측에 섰던 건 아니고 그 당시에 또 식자층으로서 젊은이들은 입산하거나 동조했던 사람들도 조금 있지 않을까, 숫자를 이렇게 많이 잡을 수는 없더라도 그런 사람들 역시 희생되고, 나중에는 잊혀지거나 혹은 함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됐을 것 같아요.

[이병철] 그러시겠죠.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가 좀 더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고요. 시간이 좀 많지 않아서 목사님 모시기가 쉽지 않아서요. 이게 요즘 가장 핫 이슈라서 이거 하나 좀 여쭤보고 가야 될 것 같아서요. 사실 요즘 건국전쟁, 굉장히 이슈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제주도민들 4.3의 원인, 그 원인 중심에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이 있다,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인주] 글쎄요. 그 보수적인 그런 입장에서는 이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또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진압의 일환이라고 퉁쳐서 넘어가려고 그러는데 애민 사상이라고 그럴까요? 사람도 못지않게 국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굉장히 간과하지 않나. 사람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고요. 국가라는 방패가 없으면, 껍질이 없으면 우리가 또 다 위험에 바로 노출되지 않습니까?

국가도 자기 구성원 중에 일부지만 그렇게 생각이 안 맞는다고 제외하고, 탄압하게 되면 그게 정상 국가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싫어하는 국가들이 대부분 그런 국가들인데 우리도 그쪽을 닮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고. 건국전쟁은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감상자들이 많이 지지하든 반대하든, 하는 이야기가 이승만의 어떤 선한 부분, 또 정의로웠던 부분, 또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이렇게 보여주는 거는 다큐로서의 어떤 기본적인 자세로 조금 문제가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들고요.

[이병철] 그러니까 선택이 가장 문제인데 결국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4.3이라는, 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추는 그런 부분에 분명 반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인주]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강대교를 끊고 피신했다는 것을, 굉장히 공격받아 왔으니까 그 그림 자료가 잘못됐다고 설명해서 대동강 철교를 그냥 걸어놓고 한 장으로 설명한 게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넘어가려고 그러는데 중요한 건 다시 서울로 수복한 다음에 서울에 남아 있던, 어쩔 수 없이 저쪽에다 그냥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생존했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압박하고, 이렇게 가혹하게 다루는지 그건 또 설명이 안 되잖아요. 그걸 과감하게 품었으면 그런대로 뭐 우리 지도자로 평가받을 수 있을 터인데 그런 데서 너무나도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아서 설명을 못할 것 같아요. 제가 볼 때에는.

[이병철] 알겠습니다. 오늘 목사님 모시면서 사실은 목사님이 아니라 어떤 역사학자를 모신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마는 오늘 이렇게 모시게 돼서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영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님과 4.3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오늘 이렇게 나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김인주] 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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