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 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진행 : 이병철 방송부장

●2024년 3월 20일(수)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장소 : BBS제주불교방송 / 제주시 임항로 14(덕산빌딩 4층)

●코너명 : 집중인터뷰

[이병철] 네,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 올해가 4.3 76주년 해입니다. 4.3 주간을 맞이해 종교인에게 4.3을 듣는 시간, 마련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특별히 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님 모시고 4.3 76주년의 지난 이야기 들어보려고 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김인주] 예, 반갑습니다. 김인주입니다.

[이병철] 그 발걸음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이렇게 BBS 불교방송에 직접 이렇게 출연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김인주] 관계자 여러분, 참 감사드리고 우리 또 청취자 여러분들도 신앙에 상관없이 또 우리가 같이 공유해야 할 그런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병철] 예, 맞습니다. 그 당시 이념에 매몰된 시대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종교를 뛰어넘어서요. 이제 목사님 저희 BBS에 찾아주셨는데 우선 그래도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인사 간단히 좀.

[김인주] 예, 저도 제주에 유배 왔던 유배인의 후손으로 제주에서 태어났고 한경면 고산리, 거기가 고향입니다. 성장은 한림읍 귀덕, 그리고 남원읍 신례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 마치고 그다음에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또 이제 우리 종교적인 소명을 갖고 신학교에 가서 이제 목사가 되었고. 또 독일에서 교회사, 역사 연구를 한 10년 정도 한 다음에 제주에 다시 온 것이 한 20년 됐습니다.

다시 제주 고향으로 올 때에는 뭐 그렇게 큰 관심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는데 역사를 연구했던 그 방법이나 그 능력이 이렇게 결합하면서 제주 근대의 역사나 제주 역사, 또 4.3도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래서 현재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병철] 지난 10월에 기독교 자체적으로 세미나도 좀 있었고, 그전에 제주도의회 4.3 특위와 이제 송재호 의원님과 동시에 같이 종교인 4.3 피해와 관련해서 세미나가 있었지 않습니까? 목사님께서 기독교를 대표하셔서 토론자로 좀 나셨고. 그래서 특별하게 모시게 됐었는데 그러면 지난 10월에 개신교 제주 4.3 관련 심포지엄이 있어서 그때 직접 발제를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내용으로 좀 얘기를 하셨는지 그 얘기부터 좀 들어볼까요?

[김인주] 우선 세 가지를 좀 지적하고 싶은데요. 하나는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이 반공 정책을 꾸준히, 이제 1차 대전 때부터 2차 대전 거치고 또 한국전쟁 때 더 심해졌죠. 메카스로부터 부르는 그런 빨갱이 사냥도 정계에서 혹은 또 관공서, 문화계, 예술계까지 아주 그냥 집요하게 어려움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그런 환경 속에 4.3 사건, 혹은 4.3 연구가 혹은 또 이야기, 전승이 이루어졌으니까 상당히 왜곡됐다는 게 하나고. 또 하나는 1930년에 이미 이제 모슬포의 청년들이, 사회주의 청년들이 모슬포 교회를 가서 예배를 방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게 이제 4.3 때 하고도 꽤 관련이 깊은 이은방 선생하고 강문석 청년하고 주동했는데 그래서 그런 이 불의의 사태 때문에 서로 상처를 받고 또 일부 가해자로서 벌금을 낸다든지, 혹은 구류를 산다든지, 그런 정도의 큰 사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어떤 잠재적인 적개심을 갖고서 18년 뒤에 이제 4.3을 만나게 됐으니까 전체 개신교의 입장, 그리고 어떤 입산자, 무장대에 대한 공포감, 적개심이 꽤 컸던 것 같습니다.

[이병철] 이미 1930년대 제주도 안에서도 이 같은 이념 대립이 좀 있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게 해서 종교계까지 확산되는 그런 게 있었다는 말씀이시잖아요. 종교가 이념으로서 대립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부분이 4.3을 겪으면서 그런 것이 표면화됐고. 이런 부분들이 지난번 심포지엄에서 회개라든지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얘기들이 나왔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개신교 차원에서 4.3에 대한 연구 좀 더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목소리도 좀 나왔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좀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김인주] 참 안타까운 일은 이제 4.3 지난 지 70~80년 돼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 극우 신앙인들이죠. 그들 중심으로 반공주의가 계속 강화되고, 현재까지는 선거 앞두고서는 더 심해지는 그런 양상도 보입니다마는 시대를 뛰어넘어서 혈연하고 상관없이 그때 토벌대의 입장을 지지하는 그런 성향의 담론들이 교회에 굉장히 많이 퍼져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4.3을 건드리거나 언급하기도 참 두려워했고. 조속히 다 돌아가셔서 정리되기를 바라는 그런 느낌도 은연중에 들었는데, 그래서 한 30년, 50년, 70년, 그렇게 지난 다음에야 이걸 들여다보고 또 정리하고 하다 보니까 부족한 점도 많고, 왜곡된 부분도 많고, 아쉬운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병철] 독일에서 역사 전공을 하셨다고 그러셔서요. 또 이제 향토 사학자로 활동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기독교가 항일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그런 것도 밝혀내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마는.

[김인주] 예, 1919년 기미년 3월에 이제 서울에서 내려온 이 학생의 어떤 자료 제공, 혹은 제언에 의해서 조천을 중심으로 해서 크게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 14명의 동지 가운데는 크리스천도 끼어 있었고 김해 김씨 집 하나의 그런 가문의 거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마는, 그리고 그것이 또 다 이렇게 체포되고, 또 실형을 언도받고 하는 가운데서 또 상해 임시정부가 우리가 무장 자원하겠다, 한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들이 다 1인당 2원씩 거둬서 우리한테 좀 군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육지에서는 그 반응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큰돈 낸 사람도 있고 그러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지 못했는데 제주도에서는 그때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4,550명이 만 원을 모아서 전달했어요. 그게 나중에 탄로 나고, 또 이게 고초를 겪으면서 결국 옥에서 이렇게 순국하신 분도 계시고, 아마 사라봉에 있는 조봉호 독립투사 그분이 바로 그 주역이었거든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옥사하는 그런 결과를 낳았는데 그때 만 원이라는 돈을 지금 환산하면 물가로 참 복잡한 계산입니다마는 수억대에 저는 한 20억 정도. 큰돈이 아닌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병철] 그랬었군요. 3.1운동에, 그 조천만세운동에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참여했었다. 그러면 좀 본격적으로 이제 4.3 얘기 한번 해볼까 싶은데요. 4.3 당시 기독교 피해, 어떤 상황이었던지, 이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이 한 말씀해 주신다면?

사실 제주도에는 기독교가 그렇게 많이 퍼져 있거나 전도되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4.3 당시에는.

[김인주] 네, 신자들 세워보면 천 명 정도 아닐까. 아이들까지 세면 조금 더 되고.

[이병철] 뿌리를 내린 상황은 아니었다고 볼 수가 있겠네요.

[김인주] 대부분 이제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또 이제 미국 선교사들의 간접적 영향에 의해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거사 같은 걸 굉장히 거부하는 그런 입장이 일관되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이 피해를 입거나 또 이렇게 고초를 겪는 일은 굉장히 좀 적었습니다. (2부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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