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호 미술관장
권정호 미술관장

출연: 권정호 미술관장

진행: 박수경 아나운서

방송: BBS 대구불교방송 그대곁에서’ (24.03.15 방송)

(대구 FM 94.5Mhz,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16:0016:50)

 

박수경 : 매주 금요일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 인사를 만납니다.

대구에 제1호 사립미술관이 탄생했습니다.동구 신천동에 개관한 권정호미술관인데요권정호미술관은 지역을 대표하는 권정호 작가가 수 년간 준비한 전문 미술 공간입니다지역에 첫 사립미술관, 의미가 남다릅니다권정호 미술관장님 모시고 자세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안녕하세요

권정호 관장 : 안녕하세요

박수경 : 네 반갑습니다. 이제 작가이자 관장님이신데요권정호 미술관이 개관한 지 오늘로 며칠째인가요?

권정호 관장 : 16일째입니다.

박수경 : 네 지난달에 개관을 하신 거네요. 요즘은 어떠신가요?
오픈하고 난 다음에 많은 분들 께서 찾으시나요?

권정호 관장 : 많은 작가들이 관심 있어서 오시고 또 이제 한국사립미술관협회라든지 한국박물관협회에도 등록사립미술관 회원관으로 등록했습니다.

박수경 : 네  최초 사립미술관이 가지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권정호 관장 : 대구시에서 하는 미술관이 하나 있고 그 이외에는 사립미술관으로서 저희가 처음입니다

미술관이라고 그러면 일반적으로 교육과 문화 이런 부분에 공적인 투자와 전시로 이루어지는 그런 공간입니다.

박수경 : 그렇군요.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라는 건 그만큼 사립미술관을 건립하기 쉽지 않다라는 그런 의미이기도 할 텐데요미술관 건립을 준비하시면서 관장님께서 가장 또 힘들었던 점은 어떤 점이 있을까요?

권정호 관장 : 먼저 이 미술관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제일 어렵죠.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까요과거에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만든 것과는 차이가 많지요.

엘리베이터를 새로 열어서 상하층을 움직일 수도 있도록 만들었고 또, 그 속에 전시 공간을 만들고 교육 공간도 만들고 수장고도 만들고 이렇게 공간 구성하는 데 여러 가지 힘듬 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일은 한 작가가 이런 시설을 만들 때는 여러 가지 비용이 많이 들죠. 그런 점이 정말 어려움이 많습니다.

박수경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건립을 하셨는데요. 문화예술 도시를 표방하는 대구가 사립미술관 건립 등에 있어서 지역 예술계 지원이 좀 미흡한 이유가 있다면요?

권정호 관장 : 미흡하다 하기보다는 시가 경험이 없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이제까지는 시를 중심으로 한 시립미술관이 있었지 사립미술관에 대한 경험이 없는 거죠.

그만큼 대구 지역 작가가 많이 커 있고 또 작가들이 많이 활동을 해서 작품도 많이 갖고 있는데 그걸 이용해서 이제 사립미술관이 이제 등장하는데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지원이라든지 이런 부분이 앞으로 해야 되겠지만 문화예술진흥원에서 또는 조례에서 이미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라도 실제로는 이걸 운영을 안 해봤기 때문에 5년마다 조례에 시가 계획을 세우고 지원도 하고 육성도 해야 되는 겁니다.

아직 그런 기구가 없어서 아직 안 했는 걸로 저는 알고 있어요.

이제 이 미술관이 등장함으로 해서 교육과 시민이 즐기고 또 작가 작품이 소장되고 또 전시도 이루어지고 연구도 이루어지는 기구로서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요이런 어려움에 대해서 시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그게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수경 : 어쨌든 첫 사립미술관이 개관을 했으니까요. 앞으로 지원이 확대되는 등 변화가 좀 있었으면 합니다
권정호 화백이자 관장님의 개인전이 개관전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요전시 제목을 보니까 낙원과 죽음이네요. 어떤 전시인가요?

권정호 관장 : 저는 1944년생입니다. 어릴때 대구 가까이 칠곡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6.25 동란도 거쳤고 또 어려운 우리 경제 사정 속에 교육도 했고 또 그럼으로 해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도 많았고 병원에서 생명이 죽고 나가고 이런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쇼킹하게 느꼈던 것들이 제 머릿속에 남아 있고 또 시대적으로 쇼킹한 것들이 머릿속에 뿐만 아니라 항상 그것이 연상이 되고 또 그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회 일이라든지 이런 게 우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바꿔 말하면 동란에 사람이 죽고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우리 발전하며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어가는 그런 과정속에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그런 어려움을 겪은 그런 내용이 전부 다 하나의 그 내용으로서 작용하는 거죠.

거기에 제일 상징적인 것이 고등학교 때 병원에서 저희 형님하고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형님은 두개골을 보고 굉장히 의학적으로 처음이니깐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그런 머리의 구조를 알아야 ..하악골 상악골 하면서 알아야 예를 들면, 구조 속에 그 안에 인간의 골이라든지 여러 가지 신체의 그런 관계 속에 이 두개골이 갖고 있는 인간의 문화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DNA 구조라든지 여러 가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런 걸 과학적으로 생각했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저는 어릴 때 어려웠던 것과 전쟁과 이런 걸 보고 겪었고 병원에서 그런 두개골이 저에게는 심리적으로 죽음이라 하는 그런 것을 상징하게 되고 그 어려운 것의 상징물로서 머릿속에 존재했던 겁니다.

박수경 :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낙원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개관전으로 마련을 하셨는데요. 작품은 한 몇 점 정도 볼 수 있을까요?

권정호 관장 : 작품은 24점 정도 지금 걸려져 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공부를 하고 그 당시에 그렸던 작품들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데 그 작품을 가져오고 또 대구미술관에 있는 작품도 2점을 가져오고.. 이런 건 대작입니다.

그리고 이제 소품들 시대적으로 이렇게 70년대 초기부터 했던 작품들이 시대별로 특징이 다 다른 것들을 작품으로 구성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작품을 해 왔던 과정속에 그때가 어떤 식인가 하면 저로서는 그런 그 상처의 하나의 상징으로서 그렇게 삶에 대한 그런 두려움이라든지 또 제가 그 당시에는 병원을 하면서도 저는 몸이 좀 약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시대가 그때는 뭐 약도 잘 못 먹고 또 공부할 때 그 어려운 시대였잖아요.

그런 시대에 살면서 고통의 상징으로서 해왔던 것 등을 역사적으로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렇게 나열해 놓은 작품들이 주가 되면서 또, 치유에 대한 이야기 그런 고통이 결국 드러나야 거기에 치료 방법도 생기고, 우리가 가끔 사회적으로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도 그걸 숨기려 하고 예를 들면 가리려고 애를 쓰는데 드러내서 상처를 치유하고 그다음에 그걸 고치려 하면 드러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 우리의 아픔을 보여주는 그런 작품들로 이렇게 결국은 치유라고 할 수 있지요.

병원에서 의사가 치료를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어려웠던 그런 걸 우리 스스로가 보면서 우리가 느끼고 또 바꿔 나가고 그런 사회적인 교화 내지는 우리 문화를 시대적인 어떤 문화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을 해 왔어요.

그게 치유에 대한 이야기지 어떤 뭐 그로테스크하다 이런 거하고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박수경 : 그렇군요. 이 죽음과 또 치유 낙원 이런 부분에 대한 사유를 많이 오랫동안 해오신 것 같은데요. 전시 설명회 보니까 죽음을 통해서 낙원에 이를 수 없고 또 작품을 통해 작품 너머의 아름다운 삶을 상상할 수 있다라고 하셨는데요.좀 더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신다면요?

권정호 관장 : 예 우리가 우리 문화가 이렇게 발전해 오면서 상당히 그 시대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it 시대고 그런 시대지만 그전에는 손으로 만들고 이렇게 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 생활 양식도 달라졌고 패턴도 달라졌어요.

그런 내용들이 시간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또 이 우리 사회를 그대로 보여줌으로 해서 우리의 삶이 더 진솔하게 다가간다는 것 치유뿐만 아니라 진솔하게 다가가는 그 자체가 살기 위한 방법인데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낙원이에요.

사실은 낙원이라 하는 게 죽음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 하는 걸 앎으로 해서 그 생활이 아름답게 살아야 되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게 종교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대적인 어떤 흐름과 우리 역사의 변화 속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걸 우리가 문화라 그러잖아요.

이런 문화적인 이 시대의 변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또 어떤 것에 관심이 있었던 건지 , 그런 것 등에 대한 이야기가 삶에 대한 이야기고, 낙원에 대한 이야기고 우리의 현실에 대한 반성에 대한 이야기 지우고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수경 : 네 관장님께서 지금 설명해 주신 부분을 좀 떠올리면서 작품을 보면 많은 것들을 또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잠깐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관장님 작품의 시그니처가 두개골 이잖아요그만큼 오랜 기간 동안 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권정호 관장 : 그건 제가 어릴 때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도 그렇지만 몸이 많이 아팠어요. 포비아가 있었어요.

그 포비아라 하는 게 뭔가 하면 죽음에 대한 부정맥이 좀 심했고 제가 고등학교 때는 가을 겨울쯤 됐지 싶습니다.

기침을 하는데 피가 오르더라고요각혈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반년을 쉬었어요. 그런 경우가 있었고

대학교 때 이제 군에 갔다 와서 군에서 이군 사령부까지 실려왔어요.

왜 실려왔느냐 그때도 부정맥이 심했어요.

제가 전방 5군단 사령부의 비서실에 있었는데 항상 그 여러 가지 바쁜 일 가운데에 갑자기 부정맥이 심해서 그 병원에 갔더니 거기서 못 치료한다고 이군 사령부까지 불려왔어요.

그래서 다시 또 원대 복귀까지 한 그런 기억이 있고 그뿐만 아니라 이제 이 죽음에 대한 그런 두려움이라 하는 게 그런 게 생각날 뿐만 아니라..

박수경 : 직접 경험을 좀많이 하신 거네요.

권정호 관장 : 그런데 이게 이제 표현하는 방법으로서도 가능한 게 우리가 예를 들면 참는다든지 인내한다든지 이렇게 하려고 하면 이를 꽉 다물어야 되잖아요.

그 두개골에서 이를 다무는 그런 표현이라든지 억압에 대한 견뎌내는 인내에 대한 거 그런 게 두개골 속에 표현되고 이를 통해서 이빨이라든지 그다음에 두개골의 형상이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사회적인 현상을 그 속에 담으려고 했는 거예요.

그게 지금 현대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해골들, 87년도에 만들었는데 그전에 제가 미국에 가서 한국을 생각했다고 외국 가서 공부하다 보면 한국에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이라든지 뭐 그런 것 등이 자주 기억이 나고 향수죠.

그런 거에 대해서 보다 보니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 하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 작품을 했던 게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고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도 하고 이랬어요.

그래서 억압이라든지 실존이라든지 그다음에 얼이라든지 우리의 얼이라 하면 우리는 두개골을 그냥 두개골이라 하는데 그 형상에 따라서는 얼골이라 하는 말을 사용해요.

얼굴과 골 그게 이제 이 껍질을 벗기고 나면 뼈가 나오는데 그 뼈의 형상에 따라서 이 앞에 얼굴 면이 관계가 되거든요.

이게 좀 그래서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는 것 그걸 왜 또 실제로 작용했냐 하면 제가 뉴욕에 있으면서 내셔널 박물관에 갔을 때 뉴기니아 사람들이 뼈를 가지고 이용해서 작품을 많이 만들었더라고요.

제가 내셔널 박물관뿐만 아니라 한국관에 제가 모델로 한국의 문화에 대한 걸 알리는 그런 문화 모델로 지금도 소장돼 있어요.

말하자면 문화라 하는 게 시대에 따라서 해왔던 것 등이 관계돼 있는데 살아오는 과정속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문화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문화적이고 작품이라 하는 것이 그런 상징과 그런 것 등이 남아서 우리의 새로운 문화가 되고 새로운 하나의 작품이 되고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에는 삶에 대한 이야기죠.결국은

실존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살 거냐 억압 받으면서 견뎌내면서 사는 거와 또는 살아가는 과정속에 어려움이라든지 그런 게 사람에 대한 생각이죠.

그런 거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그런 모양이 된 거예요.

그거 뭐 특별히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런 게 하나의 상징이 되고 , 많이 그리다 보니까 또 그게 하나의 상징이 된거죠

박수경 : 그렇군요. 권정호 미술관에 이제 가면 관장님의 시그니처 작품을 볼 수 있다라는 말씀이시죠? 이 방송 듣고 나서 미술관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실 것 같거든요. 권정호 미술관 위치를 좀 알려주세요.

권정호 관장 : 대구시 동부로 67번지에 있습니다.

신천역에서 동대구역 쪽으로 한 3분 거리 대로변에 있습니다. 찾기가 쉽습니다.

박수경 : 네 꼭 한번 가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방송 듣고 계신 청취자 여러분들 그리고 대구 시민들에게 권정호 미술관이 어떤 미술관으로 인식되고 싶으신지 여쭤보겠습니다.?

권정호 관장 : 제가 64년도에 공부를 해서 70년도에 이제 말하자면 처음으로 군에 갔다 와서 작품을 하면서 만든 그런 써클이 대구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빠르게 만든 거였고, 그다음에 미국에 갔다 와서 한국에 있는 세계적 작가 전수천이라든지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을 탄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라든지 그다음에 부산에 또 허황 전주에 유휴열이라든지 광주 우제길이라든지 이런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들하고 대구에는 이명미라든지 남춘모라든지 이런 작가들 같이 써클을 만들어서 대구대학교 졸업생들하고도 같이 이렇게 서클을 만들어서 전국 운동을 했어요.

그게 그 당시에 상당히 빠른 미술사적으로 빠른 그런 역할을 했는 겁니다.그래서 그런 역사하고 관계돼 있는 거죠.

그런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운동의 전반적인 내용이 관계돼 있는 그런 미술관을 만들고 싶은데 그게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 한 현대 미술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권정호라 해서  그 작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미술을 보여주면서 그때에 해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라든지 그다음에 그런 여러 가지 내용 들을 현대적인 미술관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박수경 : 네 관장님 앞으로도 이 권정호 미술관이 더욱더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 인터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지금까지 지역 첫 사립미술관인 권정호 미술관 설립 소식 알아봤고요권정호 미술관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권정호 관장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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