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아침저널 제주】

⚈ 출    연: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 진    행: 김종광 기자 
⚈ 연    출: 안지예 기자
⚈ 방송일시: 2024년 3월 14일(목)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아침 8시 30분~9시
            (제주FM 94.9MHZ 서귀포 FM 100.5MHZ)
⚈ 장    소: BBS제주불교방송/ 제주시 임항로 14(덕산빌딩 4층)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김종광] 네, 올해가 4.3 76주년입니다. 4.3 추념식을 이제 한 20여 일 남겨두고 있는데요. 4.3 주간을 맞이해 오늘은 특별히 양조훈 전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님 모시고 4.3에 관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양조훈] 네, 안녕하세요.

[김종광] 우선 청취자 여러분들께 인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조훈] 4.3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먼저 4.3은 여러분 알다시피 참으로 이제 불행한 역사였죠. 많은 희생이 있었고요. 더군다나 반세기 동안 이념적 누명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많은 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제 4.3은 당당한 역사로 재조명하는 시점에 오게 됐는데요.

금년 4.3의 표어가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라고 하죠. 이 표어에서 보여주듯이 뭔가 이제는 밝은 기운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4.3은 이제 고난을 딛고 인권과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광] 네, 2018년 2월부터 2022년 1월까지 4.3평화재단 6대, 7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는데요. 그때를 되돌아볼 때 좀 기억에 오래 남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으실까요?

[양조훈] 평화재단 차원에서 미국의 책임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점, 그런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요. 먼저 조사반을 구성해서 미국에 있는 4.3 자료 수집을 이제 본격적으로 추진을 했습니다.

또 그 뉴욕 한복판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4.3 인권 심포지엄을 이제 대대적으로 좀 크게 규모 있게 개최했는데 그때 이제 관음사 허운 주지 스님께서도 함께 참석하셔서 행사를 같이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계의 힘을 모아서 4.3 특별법을 전면 개정하는 것을 서로 이제 이뤄낸 것. 이거 상당히 좀 특이한 일인데, 특히 그 특별법 개정으로 희생자들에게 국가 보상을 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재심을 통해서 수형인의 명예회복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튼 거. 이런 거에 대해서는 지금도 보람으로 느낍니다.

[김종광] 특별법 개정이라든지 아까 말씀 주신 재심 수횽인 명예회복, 이런 부분에 굉장히 이사님께서 힘써 오신 것 같은데요. 아까도 이제 수형인의 재심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요즘 사형, 무기징역 받는 수형 희생자들까지 이제 무죄 판결을 받는 모습을 보면 좀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의미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신다면?

[양조훈]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4.3 당시 사형 무기징역 15년, 7년, 이런 징역형을 받는 사람들이 현재 속속 무죄 판결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더군다나 직권 재심이라고 해서 국가가 앞장서서 그들에게 무죄 판결을 지금 현재 요구하는 것이죠. 즉 검찰이 무죄 구형하면 판사는 무죄 판결을 하고 있다는 그런 현상이죠. 현재 무죄 판결 받은 숫자만 1천 400여 명에 이르고 있고, 이 추세라면 아마도 한 3천여 명의 수형 희생자들이 무죄 판결될 것으로 이제 보고 있는데요. 이런 사법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건 다른 나라 과거사 해결 역사와 비교할 때도 매우 드문 사례이고 또 4.3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모델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4.3 당시 재판이 얼마나 무도했고, 엉터리 재판이었는지 그것을 이제 뒤늦게나마 실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죠.

[김종광] 어쨌든 사법적 정의가 이제 우리 재심 수형인 재판에 이런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렇게 좀 이해하면 될 부분이겠군요. 그리고 또 이사장님께서는 이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작성의 실무 책임도 맡으셨지만 그 이전에는 언론인으로서 4.3의 진상 규명을 위해 취재하셨죠? 신문 기자 시절에는 어떠한 계기로 이렇게 4.3을 취재하시게 되신 건가요?

[양조훈] 이제 벌써 36년이 됐는데요. 1988년 제주신문 4.3 취재반장을 맡으면서 4.3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인데요. 그때는 참으로 암울했습니다. 4.3을 소재로 소설이나 시를 써도 잡아가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4.3 진상 규명 못하도록 했죠. 만약에 그렇게 4.3을 이야기하면, 그것도 무서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감옥 살인을 하는 거예요.

그런 어두운 시절인데 다행히 87년 6월 항쟁이라고 해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죠. 이제 그 바람이 제주도까지 오고, 또 신문사, 그 당시에 제주 신문은 제주도에서는 하나뿐인 신문, 유일한 신문이었어요.

왜 그러냐면 전두환 시절에 언론을 통폐합해서 각 도마다 신문을 하나씩만 읽게 한 거예요. 언론을 통제한 거죠. 그런 상황에서 하나뿐인 제주신문 편집국에서 젊은 기자 중심으로 우리 4.3 취재해야 합니다, 이런 열기가 피어오른 거죠. 그래서 이제 어렵게 4.3 취재반이 결성됐는데 제가 사회부장을 그때 맡고 있었어요. 사회부장이 이제 취재반장 하라는 거예요. 사실은 저는 도망가고 싶었어요. 너무 겁이 나니까.

[김종광]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는 어쨌든 외압이나 그런 것들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요.

[양조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 4.3하면 인생 망한다고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도망도 못 가고 잠을 자면 가위 눌림, 누군가 와서 막 목을 누르는 그런 악몽도 이제 여러 날 꾸기도 했는데 어쨌든 뭐 도망갈 길이 없으니까 이걸 해야겠다, 해서 이제 결심한 거죠.

그래서 이제 4.3 연재를 시작했는데 제주 신문에서는 '4.3의 증언'이라는 타이틀로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57회 정도 연재했는데 신문사에 파동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신문사가 문을 닫는. 그래서 4.3 연재도 중단이 됐는데 그 이듬해 1990년이죠. 제민일보라는 신문이 새로 탄생이 되면서 다시 이제 4.3 연재는 재개된 것이죠.

[김종광] 이제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제 제민일보에서도 이제 기자 생활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제민일보에서 만든 '4.3은 말한다'. 그 책의 의미는 4.3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 연재할 때 좀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양조훈] 연재는 참 많았죠. 어려움도 결국은 '4.3 말한다'는 10년 동안 456회가 연재됐었죠. 그러니까 앞에 연재했던 '4.3의 증언'까지 합치면 모두 513회가 연재가 됐는데 이런 연재는 우리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연재물이 될 정도로 아주 특이한 연재물이 된 거죠. 따라서 이제 중앙언론에서도 '4.3을 말한다'는 탐사 보도의 정수라고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고요. 물론 한국 기자상도 받았고요. 그럼에도 초기에 어려움이 참 이모저모로 많았습니다.

공안당국. 그 당시에는 정보기관이 있었고, 검찰이 있었고, 경찰이 있었거든요. 이런 데에서 4.3을 연재하는 것은 사회 안정을 해친다, 그래서 훼방을 하는 거예요. 특히 그 경찰에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이제 뒷조사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4.3 연재가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는데 딱 신문에 나가면 그게 신문에 언급됐던 증언자들, 증언자들을 형사들이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신문에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사실이냐를 조사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4.3 유족이나 체험자들이 겁을 먹고 증언을 거부하는 사례가 이제 계속 이어졌죠. 더군다나 저희들이 어렵게 4.3 증언을 채록해서 나중에 내용을 이렇게 비교하면 그 체험자들의 증언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 너무 많아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50년 동안 통제했기 때문에. 4.3은 말을 못하는 역사였는데 그 오래전에 기억했던 것을 꺼내서 말하다 보니까 서로 상치되는 것이 많았죠.

그래서 이 4.3의 기획물을 연재할 때 이 증언과 자료, 이렇게 교차 대조하면서 이 알곡을 가려내는 것. 이런 일에 매우 힘을 썼고요.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렇게 돌다리도 두드리는 그런 철저한 검증 작업을 했기 때문에 4.3 기획물이 오늘날까지 그나마 이렇게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종광] 그렇다면 이제 기자 시절에 이제 4.3을 취재하면서 겪었던 일화 중에 혹시 또 들려줄 만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으신가요?

[양조훈] 4.3 취재에 나서서 제일 먼저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4.3이 왜 일어났을까? 빨갱이 폭동이라고 하는 공산 폭동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런 진실 규명에 비중을 두었죠. 그래서 이제 취재하기 시작하는데 결국은 47년 3.1절에 경찰이 발포해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하는 3.1발포 사건을 이제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이제 잘못된 발포인데도 불구하고 경찰이 정당방위라고 이제 우기니까 제주도민들이 총궐기해서 30총파업을 했고 이걸 또 맞서서 미군정이 탄압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제주 청년 2,500명을 구속시키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4.3 취재반은 그런 취재를 토대로 해서 47년 3.1 발포가 4.3의 도화선이다, 하나의 시작이다, 이렇게 규정했고요. 또 아까 4.3의 이념적 누명을 벗기 위해서 공산 폭동의 그 허실, 허상을 이제 속속 밝혀냈죠.

80년대만 해도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4.3은 북한 공산당의 사조 아래 일어난 폭동이라고 써 있었어요. 교과서에. 그런데 저희들이 추적해 보니까 상당히 그 내용이 허술하고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제민일보의 톱 기사로 교과서의 기술 제목이 잘못됐다고 이제 대서특필했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 국사편찬위원장인 이제 박영석 박사 일행들이 제주도로 내려와요. 그래서 저희 취재반하고 4시간 동안 아주 강력한 토론을 벌였는데 결국은 그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해요.

그래서 이제 90년대 초반부터 우리 교과서에 4.3과 북한 연계설은 사그라지고 없어지는 거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초기에 그 9연대 연대장을 했던 김익렬 장군님, 그 유골을 이제 제가 입수한 건데 사실은 그 소식을 듣고 제가 서울에 이제 김익렬 장군 댁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장군님은 돌아가셨고 그 사모님과 가족들이 있었는데 회고록.

장군님이 쓰던 4.3에 대한 회고록을 저희들이 입수를 해서 공개하겠다니까 처음에 반대하는 거예요. 심지어는 사모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지금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인데 어떻게 이런 내용을 그대로 보도할 수 있겠느냐, 지금은 시기상조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극구 저한테 주십시오, 저는 책임지고 이걸 언론에 보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사정사정해서 결국은 입수해서 그걸 신문에 공개했죠. 그런데 그 유고는 상당히 그 초기에 미군정의 어떤 토벌 정책의 실체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 거죠.

결국 미군정이 전략적으로 4.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는 내용도 나오고요. 특히 오라리 방화 사건, 이런 것들이 무장대가 아닌 경찰 지원받은 우익 청년들이 한 행위라고 하는 거. 이런 실체도 나오는 거죠. 결국은 우리 방송에도 가끔 보면 오라리 방화 사건의 영상이 나와요. 그게 미군이 촬영한 거거든요. 그것이 이제 메이데이라고 하는 그런 그 영상 영화인데 그 영화를 보면 방화가 마치 무슨 산 쪽에서, 폭도들이 한 것처럼 이렇게 편집된 모습을 보여요. 그게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 조작의 실체도 밝혀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종광] 그리고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이 됐는데요. 그 의미와 함께 최종 선정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 건가요?

[양조훈]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는 것은 바로 4.3 기록이 세계 기록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죠. 유네스코는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4.3 자료는 특별하게 냉전, 이념 대결, 국가폭력, 민간인 학살, 이러한 키워드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희귀한 기록이라는 거예요. 또 우리가 하고 있는 진실, 화해, 상생, 이런 과거사 해결의 가치, 이런 것들도 아주 뭐랄까 높이 평가할 만하고 인정할 만하다, 그런 점에 초점이 맞춰졌고요. 지난해 연말에 문화재청 세계기록유산한국위원회 심의를 통과했고 현재 유네스코 본부에 등재, 신청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도 금년 하반기에 열리는 유네스코 집행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종광] 이사장님께서 이제 앞으로 제주 4.3의 의미 확산이나 연구 등은 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또 그 과제에 대한 설명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조훈] 저는 남은 과제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4.3 당시 미국의 역할과 책임 문제, 이것을 규명하는 것을 우선 꼽고 있어요.

뭐 4.3은 미군정 시기에 발생된 사건이고 또 유혈 사태를 유발한 초토화 작전, 여기에 미군이 개입한 사실도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고요.

또 한편으로는 4.3의 올바른 이름, 이른바 정명 운동, 이것도 어려운 문제지만 극복해 가고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제 보상과 관련해서 뒤틀린 호적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보상으로 인해서 유족끼리 새로운 갈등을 빚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고요.

또 4.3 피해 가운데 현재는 신체적 피해만 보상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손해보상, 재산상의 손해보상도 추진해야 한다. 가령 우리 불교계에서 사찰 56개가 피해를 봤지 않았어요? 이제 그런 것도 하나의 재산상 피해이기 때문에 그런 작업도 진행될 것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종광] 지난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종교계에서도 4.3에 대한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데요. 이 변화에 대한 이사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양조훈] 각 종파별로 4.3을 대면하는 것에 약간의 차이들이 있어요. 가령 불교의 경우는 4.3 당시 피해를 많이 본 종교입니다.

무려 스님 16명이 희생되기도 했고요. 사찰 피해도 많았고. 그래서 불교 쪽에서는 피해 회복에 비중을 두고 활동을 지금 진행하고 있고요.

천주교는 그 4.3과 조금 거리가 있다고 그럴까, 좀 무관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오히려 진실 규명 운동에 하나의 참여해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이렇게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이제 개신교는 참 좀 복잡합니다. 이제 오랫동안 그 4.3에 대해서 외면해 왔는데요.

그럼에도 이제 최근에 제주도 내 450개 교회가 연합으로 추모 예배도 이제 하기 시작했고. 또 그 교회 안에서 회개 운동도 벌어지고 있어서 종교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김종광] 이제 올해가 4.3 76주년인데요. 이제 평생을 이 4.3 연구에 매진하셨는데 지난해와 비교하면서 76주년을 맞는 소회를 들려주신다면요?

[양조훈] 지난해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현재 꿈 같은 일을 지내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30여 년 전에 취재할 때 4.3 유족들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고 했지 보상 달라고 한 사람 한 사람도 없었어요.

감히 말도 못했죠. 오늘날처럼 사형수, 무기수까지 무죄 판결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모든 것에 만족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하지만 4.3의 위상은 분명하게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제주도민과 유족들은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4.3을 대면해 줘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김종광] 이사장님, 다음 달이면 이제 평화공원에서 4.3 추념식이 열릴 텐데요. 이제 끝으로 도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조훈] 먼저 윤석열 대통령께서 추념식에 참석해서 유족과 도민들을 격려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희망이 있고요. 또 저는 거듭 강조하지만 4.3으로 다시 도민사회가 갈등을 빚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힘줘 말해주고 싶고요. 그래서 오히려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 치유와 통합이란 4.3에 주는 현재적 가치를 더 북돋아 나가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그런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종광] 지금까지 양조훈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이사장님, 오늘 이렇게 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조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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