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뜨지 않는경우 여기를 클릭하여주세요.

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전경윤 BBS 선임기자 
출연 : 이상훈 작가
방송 : 2024년 2월 25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

전경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전경윤입니다. 2월 25일 뉴스와 사람들 시작합니다. 방송국 스타 PD 출신이면서 영화감독, 시인,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분을 오늘 초대하겠습니다. 1세대 예능 PD로서 쇼 비디오 자키, 유머 일번지 등을 연출한 이상훈 작가는 승병장 사명대사를 조명한 소설을 출간해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다재다능한 이상훈 작가 잠시 뒤에 만나보겠습니다.

전경윤 : 오늘은 예능 PD, 스타 PD 출신의 작가 한 분을 모시려고 합니다.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를 다룬 역사소설을 쓰신 분인데요. 이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도 지금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상훈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나보겠습니다. 유명 PD 출신이시죠.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이상훈 : 네 안녕하십니까?

전경윤 : 이제 뵈니까 알겠어요. 쇼 비디오 자키, 유머 일번지, 바른 세상 만들기. 

이상훈 : ‘라떼’ 이야기하면 안 돼요. 요새. 옛날 이야기. 

전경윤 : 방송국 스타 PD 출신으로 영화감독도 하셨고, 극본 쓰셨고, 시인이고, 소설가이시기도 하신데 전업 작가는 아니신가요? 그냥 이제 정년을 다 지나신 것 같은데.이상훈 : 그냥 글은 이제 원래 제가 작가 되려고 글을 쓴 게 아니고요. 저기 제가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할 때, 서세원 씨랑  좋은 세상 만들기를 할 때 그때 제일 마지막 프로 끝에 고향 생각이라는 글을 1962년 팝송 ‘키스로 봉한 편지(Sealed with a Kiss)’ 음악에 맞춰서 올렸는데, 그것을 보고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것은 제가 직접 제 어릴 때 고향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고향이야기를 한 2분짜리로 짧게 했는데, 그래서 그것을 이렇게 새로 쓰는 게 아니고 방송은 또 오래 했으니까, 그래서 그 자료를 건네주고 그게 이제 책으로 나갔는데 그게 한 20만 권 이상이 나간 거예요. 한 25만 권 정도 나갔어요.

그런데 그것은 제가 진짜 말씀드리지만 내 글이 좋아서 그렇게 많이 나간 게 아니고 내용이 그 당시에 좋은 세상 만들기가 시청률이 60% 가까이 나왔으니까 그 프로에 힘을 입어서 이제 많이 이제 사주신 거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이제 출판사에서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자꾸 이제 책을 내자는 연락이 오고 해서 계속 이제 책을 썼는데 지금 한 20권이 넘었습니다.

전경윤 : 아 대단하십니다. 하여튼 그러면 요즘에 주요 일과는 책 쓰는 일이 거의 이제 중심이 돼 있겠군요.  

이상훈 : 지금은 다른 이제 방송 프로그램도 조금 기획은 이게 이제 제가 직접 연출은 이제 안 하고, 이제 그런 기획 같은 것은 좀 같이 하지만, 주로는 이제 새로운 소설 아이템을 이제 소설이 제가 이제 5권, 6권째 지금 소설을 냈는데 그 소설도 다 이게 이제 드라마, 영화, 뮤지컬로 이게 이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OSMU, ‘one source multi use’ 때문에 뮤지컬도 이제 제작되고 드라마도 제작되고 하니까 그래서 그런 쪽으로 소설에 정말 이게 아이템을 잡을 때, 이게 정말 드라마 영화가 될 건지, 그래서 제 소설은 읽어보면 그림이 다 그려진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하거든요. 저는 쉽게 쓰고 제가 뭐 전문 소설가가 아니니까 좀 쉽게 쓰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영상적으로 좀 글을 쓰고 있는 편입니다. 

전경윤 : 이게 눈에 보이듯. 

이상훈 : 예. 제가 영화를 찍는다 생각하고 소설을 쓰거든요.

전경윤 : 그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요즘 시대에. 그런데 지난해 가을에 사명대사를 다룬 소설 제목이 <포검비>예요. <포검비>를 출간했는데 근데 사명대사는 우리가 모르는 분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제대로 조명이 안 됐고 평가를 제대로 못 받았고 잘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셔서 쓴 겁니까? 그럼.

이상훈 : 저는 어릴 때 제가 이제 고향이 밀양인데요. 어릴 때 사명대사 표충비각에서 어릴 때 친구들하고 많이 놀았습니다. 거기 표충비각에 나라에 좀 난리가 있으면 이게 땀이 흐르고 그런 이야기도 우리가 이제, 사명대사하고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같이 자랐다고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데 제가 어릴 때 들었던 사명대사는 큰 도술을 부리시고 막 이거 뭐 신출 귀몰 하시고 막 이런 느낌으로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항상 사명은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두 번째 소설 일본의 사이메이 천황 <제명공주>를 쓸 때 일본에 제가 한 6개월 이상 가 있었습니다. 자료를 찾는다고. 그것은 백제 의자왕과 일본의 사이메이, 여자 천황하고의 그 분명히 이것도 팩트를 가지고 이제 한 건데, 그래서 일본에서 자료를 사이메이 천황하고 의자왕의 그런 무령왕 이런 자료를 찾는 6개월 정도 저하고 같이 일본 대학 교수가 이제 좀 많이 도와줬거든요. 그 6개월을 머물면서 보는데 사명대사의 자료가 일본에 그렇게 많은 거예요. 저 깜짝 놀랐어요. 

구마모토성이나 일본의 도쿄에도 있고, 에도성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하고 사명의 그 이야기들이 그 교수가 저한테 이제 사명 이야기를 책으로 주길래, 저는 우리나라에 없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명대사는 그냥 도술을 부리고 역사책에도 잠깐 나왔는데, 일본에서는 살아있는 부처라고 생불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신사까지 만들고 그래서 이 사명대사가 어떤 분이길래 일본에서 이렇게 추앙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설보화상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그래서 제가 한국 와서 새로 사명대사 자료를 다 뒤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해서 그러면서 제가 이 사명대사라는 분이 정말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영웅이셨다그 사료를 통해서 제가 밝혔습니다.

전경윤 : 그런데 제목은 왜 이렇게 지었습니까? <포검비> 그러니까 지금 바로 와닿지는 않아요. 사실. 뜻을 모르면.

이상훈 : 이 제목을 제가 지은 게 아니고요. 사명대사의 사명집이라는 사명대사께서 시를 굉장히 많이 남겼습니다. 그 시 중에 하나가 그 칼을 품고, 품을 포자, 칼 검자, 슬퍼할 비자 칼을 품고 슬퍼하는 자기의 마음을 사명집에 있는 시의 한수에 나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는 순간 제가 제목을 못 정하고 있었는데 그냥 그것을 포검비, 칼을 품고 슬퍼하다를 그 사명의 마음이거든요. 원래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명대사가 왜 칼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너무 이게 약간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포검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래서 그것을 제가 제목으로 썼습니다.

전경윤 : 이게 역사 소설인데 100% 허구가 아니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면 자료 조사를 해가지고 이제 역사적인 사실을 많이 기반을 했다는 얘기인데 사찰을 많이 다니셨다고요.

이상훈 : 예. 저는 이게 이제 역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가장 중요한 게 리얼 스토리가 가장 감동을 받거든요. 그 역사소설이라는 거는 팩트가 근간이 되지 않으면 이 전체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저는 포검비, 칼을 품고 슬퍼하다도 이 사명집부터 해서 일본의 자료들에서, 저는 소설을 쓸 때 기둥은 확실한 역사의 팩트를 가지고 거기에 이제 살을 붙이는 것은, 이제 내가 사명이라면 분명히 저렇게 했을 거라는, 내가 사명이 되어서 글을 써나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팩트가 그만큼 중요하고 그다음에 그 사명의 심정으로 제가 글을 쓰기 위해서 사명이 다녔던 흔적들을 따라서 그래서 그 절들을 다, 강원도 고성의 금봉사부터 해서 그다음에 사명이 처음 스님이 됐던 김천의 직지사 그다음에 뭐 대형사 그다음에 해남에도 이제 가고 그다음에 뭐 마지막 돌아가셨을 때 합천 해인사 그다음에 표충사 이런 이제 절들을 그다음에 뭐 대구 동화사도 승군을 정유재란 때 승군을 또 훈련시킨 동화사 그런 흔적들을 찾아서 그냥 한 두 달을 자동차로 이렇게 다녔습니다.

전경윤 : 그런데 일본에는 이렇게 많이 기록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많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려운 점이 많았겠네요.이상훈 : 되게 힘들었던 게 이순신 장군의 기록은 <난중일기>라는 기록이 한글로 여러 가지 버전으로 다 번역이 돼 나와 있는데 사명대사의 이 <사명집>이나 사명대사의 이 글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사명대사도 일기 형식으로 남긴 것도 있고 한데 이게 번역이 잘 안 돼 있습니다. 오리지널 한문으로만 돼 있는 게 꽤 많이 있고 그래서 제가 한문 공부를 굉장히 제가 뭐 대학도 성대 나왔지만 여기 우리는 기본이 1학년 때 전공 필수 교양이 논어, 맹자를 배워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 한문 기본이 돼 있기 때문에 한문 공부를 더 새로 해서 그래서 <사명집>의 원전을 좀 찾아서 제가 새로 해석하고 그래서 좀 힘들었던 게 한글로 된 번역본이 없기 때문에 좀 자료 조사하는데 좀 많이 좀 힘들었습니다.

전경윤 : 그렇군요.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이상훈 : 덕분에 한문 실력은 꽤 많이 늘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조상들이 쓴 글은 다 한문으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원문으로 읽어보는 게 굉장히 색다릅니다. 느낌을 더 알 수 있습니다.

전경윤 : 앞서도 그러니까 고향이 밀양이신 겁니까? 부모님도 그렇고?

이상훈 : 네 우리 어머님이 그 사명대사님하고 같은 밀양군. 지금은 밀양시죠. 무안면입니다.

전경윤 : 무안면은 저는 전라남도인 줄 알았어요. 

이상훈 : 그것은 무안군. 

전경윤 : 아. 그것은 무안군이고 여기 면이군요. 거기 표충사도 예전에는 이게 사찰이 아니었죠 그러니까. 유래에 대해서 아시죠?

이상훈 : 사명대사께서 이제 임진왜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다 돌아와서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고향 밀양, 조상의 무덤이 있는 근처에 무안에다가 백하난야라고 암자를 지어서 돌아가실 때는 해인사로 들어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백하난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밀양의 이제 유림들이 그 당시는 이제 워낙 이 불교에 대해서는 숭유억불이 너무 심해가지고 우리가 이순신 장군은 현충사가 있지 않습니까? 사당 사자, 유림들이 제사 지내는 그래서 이 표충사도 처음에는 사당 사자입니다.

밀양의 유림들이 원래 이제 사명대사께서는 과거도 급제하시고, 그러다가 나중에 스님이 되시고 승과에도 장원 급제하셨지만 그래서 원래는 유교에도 굉장히 밝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유학자들이 사당 사자, 표충사를 거기다 이제 만들었는데 나중에 이게 절 사자로 바뀌어서 지금의 표충사거든요. 그런데 밀양의 표충사를 가보시면 지금도 이 사명에 대해서 유교식 제례와 우리 불교식 제사를 같이 지내는 유일한 절입니다.

전경윤 :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요. 일본의 실권자, 이분도 다 알아요. 우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사명대사의 관계를 주목하신 부분이 있는데 특별히 이렇게 눈여겨보거나 이런 무슨 그런 게 있습니까? 이유가.

이상훈 : 우리가 이제 임진왜란 7년을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으면 이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칼을 품고 슬퍼하다’에서도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그다음에 그 사이에 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4년 반은 그냥 아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우리가 보통 7년 전쟁이라고 그러는데 7년 동안 전쟁한 게 아닙니다. 임진왜란을 하고 그다음에 4년 반은 왜 그러냐 그러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들이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 60이 넘어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을 자기 후계자로 왕으로 하려다 보니까 자기 조카 히데쓰구를 조카를 간파쿠로 해놔 놨는데 그 간파쿠를 다 죽여요. 히데요시는 악마 같은 무자비한, 그러면서 3살짜리 자기 아들을 자기 후계자로 만들려 하는 그 과정이 정유재란하고 그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밑에 이제 가토 기요마사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아가지고 이 둘이 이 고니시가 이제 중국의 심유경하고 짜고 히데요시를 속인 거예요. 

전경윤 : 아. 그 영화에 나와있죠. 

이상훈 : 그것은 팩트니까. 그래서 그런 과정에 이제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부터 임진왜란을 반대했고 전쟁하는 것을 그래서 나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가 시작되고 나서 사명대사하고 만났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의 인품에 감복이 돼서 이 사람이 나중에 조선에 성리학과 조선의 불교를 통치 철학으로 삼습니다. 조선의 유학하고 이것을. 거기에 사명대사에 거기에 이제 뭐 우리가 포로로 끌려간 후제와라 세이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도쿠가와의 스승, 유학자 스승인데 강항의 제자고, 그래서 그런 어떤 역학적인 전체의 관계를 알아야 우리가 임진왜란 7년을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쳐들어와서 우리가 7년 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고, 명나라가 도우러 왔고, 이 부분에 일본의 역사하고 이게 대비되지 않으면 임진왜란 7년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제가 책에도 그것을 서술을 좀 했습니다.

전경윤 : 예. 작가님께서는 사명대사에 대해서 살아있는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결론을 내셨네요.

이상훈 : 그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 말입니다. 생불이라고. 사명대사한테 그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도 사명대사한테 인사를 시키고 사명대사한테 가르침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독실한 불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사명대사하고 도쿠가와의 관계 속에서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가 생기면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260년간 일본과 조선이 전쟁이 없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의 유훈으로 남길 정도로 사명의 역할이 그만큼 전쟁 후에도 정말로 중요했다는 것을, 그다음에 임진왜란에서 저는 나중에 중국의 이여송 장군까지도 사명의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 사명의 승군, 스님의 군대가 없었으면 이길 수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이 사명이 우리가 임진왜란에서 좀 재평가를 해야됩니다. 

이게 너무 조선이 유학자 위주로, 이게 불교를 스님들을 백정보다도 못하게 취급했지 않습니까? 다 산으로 다 쫓아버리고, 그런데 그게 임진왜란 때는 그 승군이 없었으면 승군이 나중에 모든 보급로를 다 차단합니다. 일본에.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했다면 승군은 산으로 통하는 이 일본의 보급로를 다 차단하고, 그다음에 원래 이 절은 자급자족이지 않습니까? 옛날에. 절에서 다 농사짓고 해서 그게 보급로가 됐던 겁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의승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인데 우리는 그걸 굉장히 간과하고 있어요.

전경윤 : 그리고 말이죠. 이 허균,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분인데 이 사명대사를 모티브로 썼다는 말이 있는데.이상훈 : 허균과 사명대사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이게 허균 형님이 허봉이라고 원래 사명대사하고 허봉은 정말 절친, 매일 만날 정도로 그리고 이제 허봉이 나중에 허균을 사명한테 인사를 시키거든요. 그런데 허봉이 좀 일찍 죽습니다. 그러면서 허균이 사명대사를 허봉처럼 친형처럼 따르겠다고 이야기한 글이 나오거든요. 그만큼 사명이 어려울 때 허균이 도와줬고 그것은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사명이 정여립 사건으로 연관이 돼가지고 거의 구속될 위기에, 귀양 갈 위기에 나와 있을 때, 허균이 그것이 아니다라고 이 유생들을 모아서 구조해 준 것도 있고, 그다음에 허균이 나중에 사명이 돌아가시고 나서 석장비문을 허균이 씁니다. 그 글이 정말 명문입니다. 거기에 사명과의 관계가 다 나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왜 홍길동전에 대한 이야기를 사명대사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냐 그러면 허균은 어릴 때부터 사명대사를 정말 선생님이자 형님이자 스승으로 이렇게 따라다녔습니다.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다음에 그 허균의 누이 허초희 허난설헌까지도 사명대사하고 관계가 글에 다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으로 이제 직접적으로 이게 뭐 홍길동전이 사명대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충분히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소설로 풀어낸 겁니다.

전경윤 : 앞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소설 쓰시면 다 이제 영상을 염두에 두시기 때문에 이 포검비도 드라마로 제작됩니까?

이상훈 : 드라마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드라마 불꽃 속으로라는 TV조선에서 대하드라마 한 몇 년 전에 굉장히 큰 드라마였거든요. 그 드라마 제작사의 유호식 대표라는 분이 이제 책을 읽고.

전경윤 : 뭐.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이상훈 :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이게 막 눈물을 흘리면서 이게 자기가 이것을 그분도 불자신데 이것을 만드는 게 자기는 인연이고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그러면서 출판사 통해서 연락이 온 거예요. 그래서 처음 만나는 날 계약서를 딱 가져오신 거예요. 그래서 처음 만나는데 자기는 무조건 이거 만들어야 된다 그러면서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내가 나중에 드라마 만들 때 원작자로서, 드라마 또 작가는 또 따로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최대한 도울 수 있는 것은 같이 돕겠다 그렇게 해서 이제 한 3주 전에 정식 계약을하고 언론에 다 릴리스가 됐습니다. 전경윤 : 우리 이상훈 작가님은 소설만 따지면 6권 내신 건가요? 다섯 작품인데 6권이라는 뜻이죠.

이상훈 : 네 맞습니다. 

전경윤 : 그런데 그동안 이렇게 소재나 주제를 선택할 때 특별히 꼭 역사적 인물만 선택하는 건 아니죠.

이상훈 : 저는 이제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소재를 선택할 때 이게 과연 드라마나 영화로 이게 관심이 있을까. 매력적인 인물을 저는 항상 잡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정말로 이 매력적인 인물이 역사에서 저평가되어 있는 부분, 잘못 알려진 부분, 그것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가 진실이 아니거든요. 역사는 이긴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역사의 행간 속에서 다른 자료들이나 유물이나 유적들을 가지고 그걸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 그런 사람을 저는 항상 찾고 있습니다.전경윤 : 그러면 지금 생존하고 있는 인물, 아직도 진행형인 인물 이런 분들 찾아와도.이상훈 : 살아 있는 분들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기존 소설 중에도 이 후손들이 저한테 항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그러니까 이 <한복 입은 남자>가 이제 장영실 얘기인데 베스트셀러였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OTT 드라마요. 이것은 상당히 최첨단 기술로 만드는 드라마인데요. 뮤지컬로도 만들 예정입니까. 

이상훈 : 네. 뮤지컬 제작사 EMK하고 계약했습니다.

전경윤 : 뮤지컬로요. 이상훈 : 한복 입은 남자는 이제 굉장히 이게 글로벌 아이템이거든요. 이제 그거 처음 시작이 뭐냐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장영실은 뭐 천재고, 노비에서 정삼품의 벼슬에 올라 세종이 제일 좋아했고 그런데 저는 한복 입은 남자 시작은 장영실의 실종부터 시작합니다. 1442년에 장영실이 세종실록에 “장영실이 가마를 잘못 설계해서 곤장을 치고 그래서 내쫓았다.”가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전에는 세종실록에 매일 나옵니다. 세종이 필요하면 영 씨를 불러라. 그런데 1442년에 조선이 이게 기록의 문화지 않습니까? 항상 실록 모든 게, 그러면 삼품의 세종이 그렇게 아꼈던 장영실인데 어디로 귀양을 보냈으면 어디로 귀양을 보냈다. 언제 죽었으면 언제 죽었다. 무덤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그 1442년 기록 그것을 끝으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영실의 무덤도 없습니다. 가묘를 쓰고 있습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거기서부터 시작한 게 한복 입은 남자입니다. 

전경윤 : 거기서 이제 상상력을 발휘한 거군요. 그것이 이제 상상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동시대에 이제 중국, 그다음에 콜롬버스보다 70년 이전에 이 항해를 해가지고 이것은 기록이 7차 항해까지 아프리카 유럽까지 간 기록이 있거든요. 장영실하고 동시대에요. 그다음에 그 장영실보다 한 35년 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제가 장영실이 유럽으로 가서 다빈치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면 저것도 말도 안 돼 무슨 국뽕이야 그러는데 책을 읽어본 사람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이야기를 유럽 역사까지 제가 다 하면서 다빈치가 남긴 스케치의 비행기하고, 기중기 이런 스케치가 장영실이 남긴 비차하고 기중기하고 똑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게, 그다음에 그 한복 입은 남자가 루벤스 그림인데 루벤스는 다빈치의 제자입니다. 루벤스가 원래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을 베끼면서 배우지 않습니까? 다빈치 오리지널 그림은 없어졌는데 루벤스가 베낀 그림이 세 작품이 아직도 루브르 앙기아리 전투 그림하고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이게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 그다음에 유럽의 기록에서도 다빈치는 14살 베로키오한테 그림을 배우기 이전에 다빈치도 서자이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온 사람한테 배웠다. 그래서 다빈치가 14살에 그린 산수화 그림이 있습니다. 유럽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같이 이게 붙였기 때문에 굉장히 좀 그래서 이제 미국 애플에서도 관심이 있어가지고 동양의 천재 장영실과 서양의 천재 다빈치와의 만남 그게 너무 좋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시진핑 주석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정화대장입니다. 그런데 정화가 주인공이거든요. 중국에서도 사드만 아니었으면 원래 중국 CCTV와 KBS하고 계약까지 다 맺었습니다. 이게 그만큼 아예 좋은 아이템이 글로벌 아이템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전경윤 : 아닙니다. 아니 작가님이 그런데 시도 쓰셨잖아요. 시하고 소설은 아예 다르지 않나요. 저는 시인이 소설을 쓰는 경우가

이상훈 : 저는 시인은 아니고요. 

전경윤 : 시집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상훈 : 시집은, 제가 이제 <고향 생각>이라는 책이 이제 너무 많이 팔렸잖아요. 그런데 약간 느낌이, 제가 시인은 아니죠. 그런데 이제 제가 이번에 나왔던 시집은 제가 새로 쓴 게 아니고요. 대학 다닐 때 그다음에 제가 KBS 이렇게 있을 때 노트에다가 이렇게 항상 좀 힘들 때는 글로 이렇게 달래고 했는데 그 출판사 대표가 보더니만, 나는 내 약간 일기장처럼 이게 좀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우리 집사람 나도 결혼했는데 나 첫사랑 이야기도 있고, 안 하려고 그랬는데 하도 그래서 그건 좀 부끄럽죠. 그런데 이제 솔직한 느낌을 했기 때문에 그것도 또 독자들이 또 좋아하더라고요.

전경윤 : 우리 이상훈 작가님은 제가 굳이 소개를 안 해도 다 아실 텐데 KBS 공채 PD로 입문하셔가지고 SBS, 채널A에서. 

이상훈 : SBS도 개국 멤버고 채널A도 개국 멤버. 

전경윤 : 그런데 왜 1세대 예능 PD입니까? 그전에는 예능 PD가 없었나 보죠? 1세대 예능 PD라고 되어 있는데.이상훈 : 아 아니요. 저 선배들 저도 많이 배웠죠. 코미디 쪽에는 이제 김웅래 선배가 그분 밑에서 제가 많이 배웠고요. 저희 예능 PD들이 많았죠. 다.전경윤 : 그런데 왜 1세대라고 굳이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훈 : 누가 그렇게 1세대라 그래요. 저 그렇게 나이 많지 않은데. 

전경윤 : 쇼 비디오 자키, 유머 일번지, LA아리랑.

이상훈 : 그것은 SBS. 

전경윤 :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 

이상훈 : 틴틴 파이브 이제 제가 다 만들었죠.전경윤 : 틴틴 파이브는 이동우, 김경식 씨. 그렇게 여러 작품을 하시면서 기억나는 일들이 좀 있습니까? 지금도 기억나거나 지금 참 가슴 한편이 좀 저려 온다든지.이상훈 : 프로그램은 다 할 때마다 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다 만들었고요. 정말로 근데 이제 제가 수많은 프로그램들 시청률도 다 50~60% 넘고 했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이제 조오련 선생님 돌아가셨지만 조오련 선생님 대한해협 횡단이라고 연예인들하고 베이비 복스하고 헤엄쳐서 대마도 건너가는 프로젝트를 제가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인데요.

그 배 타고 가다가 정말 죽을 뻔했던 제가 그 안전 그물망 제일 앞에서 태풍을 만나가지고 그 PD라는 것은 모든 게 선장이지 않습니까? 이 선택을, 거의 대마도에 한 거의 다 왔는데 이게 너무 태풍이 세진 거예요. 여기서 포기하면 이게 실패하잖아요. 그런데 그때 제가 내 결정에 따라가지고 그런데 막 이제 그때 촬영감독하고 이런 분들은 조오련 선생님까지도 이거 빨리 돌아가야 되는데 내가 PD니까 이거 성공하고 싶고, 그런데 그때 그 마음에 내가 이걸 빨리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거든요. 그래서 그 결정이 지금도 막 그 순간이 떠오르면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돌아왔던 그 일이 있고요.

그다음에 뭐 제가 만든 프로 중에 아직도 방송하고 있는 것은 이제 채널A 제가 제작 본부장으로 만들었던 탈북민들 프로그램 이만갑, 그것은 아직도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남희석 씨는 저하고 프로 오래 했습니다. 사돈 처음 뵙겠습니다부터 같이 쭉 해가지고 그 탈북민들의 그 아픔들을 막 할 때 정말 프로그램 하면서 같이 많이 울고 그랬죠.

전경윤 : 그렇군요. 저 궁금한 게 영화 돈텔파파의 감독을 하셨고, 마파도 영화는 이제 극본을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상훈 : 2는 직접 감독했습니다.이상훈 : 2도 있었죠. 

전경윤 : 그러면 이게 PD 영화감독 소설가 이게 다 가능합니까?

이상훈 : 그런데 저는 그게 다 하나로 이렇게 관통하는 게 모든 게 이게 스토리텔링이거든요. 저는 뭐 예능 프로를 하건, 영화를 하건, 소설을 쓰건, 다 이 스토리텔링이라고 보거든요. 뭔가 새로운 것, 아까 아이템을 찾을 때도 매혹적인 인물을 찾아서 소설을 쓰듯이 방송 프로그램도 마찬가지거든요. 어떤 걸 가지고 뭘 해야 국민들이 제일 관심 있고 좋아할까 그래서 그걸 가지고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서 만들어내는 그래서 저는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일을 한다고 저는 항상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전경윤 : 결국에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짜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서 대학에도 그런 과가 있더라고요. 

이상훈 : 요즘은 스토리텔링이 굉장히 중요해서. 

전경윤 : 이런 것을 다루는 과가 많이 생겼어요. 학과가 

이상훈 : 네네. 

전경윤 :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이제 앞으로 내가 이제 이것은 꼭 하고 싶다 이런 게 있습니까? 계획이나.

이상훈 : 지금 이미 다음 작품 소재를 해서 자료를 지금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하나의 소설을 쓰기 위해서 관련된 책을 100권 이상을 읽습니다. 최소한. 그래서 지금도 그 아이템은 정해졌고 그 관련된 책들을 거의 한 달에 한 네다섯 권 정도 계속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쓸 수가 있거든요. 

전경윤 : 그것. 중요한 얘기죠. 저도 한번 써보겠습니다. 저도.

이상훈 : 잘 쓰실 것 같은데.전경윤 : 지금까지 임진왜란의 영웅 사명대사를 다룬 역사소설을 펴내시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펴고 계신 PD 출신의 작가 이상훈 작가님과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오늘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상훈 : 고맙습니다.

전경윤 : 네. 갑진년 용의해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습니다. 봄이 시작되는 3월 각 학교에는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새 학기도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 BBS 뉴스와 사람들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전경윤이었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