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마을, 일제시대 일본 조동종 총천사의 공동묘지
-현재 아미초등학교는 옛 총천사 부지...당시 불상 그대로 남아있어
-아미동도 불교의 아미타불에서 유래돼
-10여년전 일본 '이치노에 쇼코' 스님의 참회 비문 훼손돼
-부산시, 비석마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추진...관련 기초조사 이뤄져야

■출연 :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프로그램 : BBS 부산경남 ‘라디오 830’  
(부산 FM89.9, 창원 FM89.5, 진주 FM88.1)

■ 방송일시 : 2024년1월29일. 월요일. 오전8시30분 

■ 진행 : 박찬민 기자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

앵커; 서구 아미동의 6.25 당시 피난민들이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지은 판잣집이 있습니다. 이른바 비석마을인데요. 많은 분들이 관광지로 여기시고 찾기도 합니다 이곳을. 그런데 이 비석마을이 일제 시절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또 일본의 참회의 역사가 함께 공존하는 역사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계실 겁니다. 오늘은 이 비석마을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들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전화 연결돼 있습니다. 김문길 소장님 안녕하십니까?

답; 예, 안녕하세요.

앵커; 서구 아미초등학교 교내에 불상이 하나 모셔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학교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을까요?

답; 그 유례를 살펴보면 1907년에 세워진 일본 조동종의 지도자 나카다라는 스님이 지은 절입니다. 일제치하라면 1910년 한일 합방 이후로 생각하는데 한일 합방 전, 3년 전에 한국에 일본 조동종 등 소수 불교가 왔습니다마는 큰 종단인 조동종이 아미동에 총천사라는 절을 지어가지고 이 총천사를 비롯해서 부산에도 여러 암자가 있었지만 경상남북도, 서울에 이르기까지 많은 절을 지어서 포교를 했습니다. 포교를 하는 내용들은 불심에서도 물론 하지만 총독부 정신에 입각해 우리나라의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큰 사찰입니다. 그 사찰의 불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1907년도 일본 불교 조선 아미동 총천사 전경(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사진=1907년도 일본 불교 조선 아미동 총천사 전경(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앵커; 그러면 어쨌든 종교적으로도 우리를 교화하기 위해서 일제가 활용을 했다 이렇게 좀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소장님, 아미초등학교가 옛 일본 조동종의 총천사 부지다 이렇게 지금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답; 그렇죠. 지금 아미동에 여러분들이 자주 가고 관광지로 돼 있습니다마는 비석마을의 본 불교의 절은 조동종 총천사라는 절이 그곳에 세워졌습니다. 세워져서 그 절이 세워질 때는 원래 일본인들은 부산 다니마찌라고 했어요. 다니마찌라고 하면 고울이라는 뜻, 고을.마을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속칭 불심에서 아미동 아미타불, 아미동 아미동 이렇게 전해져 가지고 오늘날 아미동 초등학교까지 이렇게 세워졌는데 아미동 초등학교가 세워진 동기는 8.15 해방 이후로 조동종 총천사는 파괴되고 그 자리에 그 후로 학교를 세워준 것이 오늘날 아미동 초등학교입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도 인근 주민들은 때마다 불상에 참배를 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주민들에게는 이 불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십니까? 소장님?

답; 불심에서 보면 상당히 의미가 깊습니다. 조동종도 일본의 큰 종파, 지금도 큰 종파입니다마는 총천사의 절을 짓고 조동종의 그 불심을 지금도 아는 분들은 참배를 많이 합니다. 조동종의 불심의 핵심이라 할까, 그 대상은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블은 자아갱생 즉 자신을 알고 남을 알고, 남이 자신을 알려면 자신을 먼저 알아야 된다 이런 그런 조동종의 원리입니다. 저는 불교를 역사를 하다가 보니까 불교에 대해서 좀 연구를 하는데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상은 아는 분들은 속속 깊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해서 참배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불상이다 하면 불심의 기도로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뒤편을 바라보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들어가지는 못하고 불상의 뒤 등을 보고 절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진=부산 서구 아미초등학교 내에 남아 있는 총천사 불상(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사진=부산 서구 아미초등학교 내에 남아 있는 총천사 불상(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앵커; 네, 소장님 그러면 이 비석마을과 이 불상 혹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금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답;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조동종이 한일 합방 전에 포교를 하기 위해서 부산에 먼저 총천사를 짓고 이 총천사의 그 당시의 신자들, 스님들이 돌아가신다든가 그 후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30 몇 년간 신자들이 돌아가실 때는 그 공동묘지에 묘를 썼습니다.  즉 총천사의 공동 묘지죠. 공동 묘지가 오늘날 6.25사변으로 인해서 거기에 피난민들이 그대로 눌려 살면서 비석마을, 비석마을, 비석이 자기 문턱에 있으니까 비석마을, 비석마을 해가지고 오늘날 비석마을이라는 참 유명지를 가지고 있지요.

앵커; 이 총천사의 신도들이라든지 그런 분들이 함께 묻혔던 곳이 공동묘지가 비석마을이 됐다 이런 말씀이신데, 그러면 소장님께서 직접 학교 현장에 대한 조사도 하셨을 거고, 그러면 이 불상 이외에도 혹시 다른 것들도 나온 게 있었습니까? 어떻습니까?

사진=한일문화연구소 현장 조사 모습(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사진=한일문화연구소 현장 조사 모습(한일문화연구소 제공)

답; 많이 나왔는데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총천사가 망가지고 그 다음에는 비석이라든가 유래 있는 비석 같은 것은 땅에 묻었습니다. 땅에 묻어놓은 곳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마는 우리 한일문화연구소 대원들이 가서 지표 조사를 했습니다. 지표 조사를 하면 땅 속에 들어 있는거는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은 우리가 눈으로 알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곳에서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었냐 하면 절에서 썼던 대웅전 앞에 세웠던 비석, 비석들을 일부는 아마 땅속에 그대로 있습니다마는 노출된 거를 보니까 유명한 조각가가 그린, 그것은 역사책에도 나옵니다마는 그 불상이라든가 그 다음에 연꽃이라든가 이런 그런 비석들이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유서 깊은 물건들을 참 잔재물이지만 우리가 조사를 하고 또 보관을 잘 해 놓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앵커; 10여 년 전에 일본 조동종의 '이치노에 쇼코' 스님이 일본 침략을 사죄하는 책 '조선 침략 참회기'를 출판을 하고서 사죄 비문도 세워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부산에도 사죄 비문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혹시 잘 보존이 되고 있습니까? 소장님 어떻습니까?

답; 아닙니다. 보존되지 않습니다. 보존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치노에 쇼코'라는 사람은 선조 조동종이 잘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눈물겹게 비문을 저와 같이 세웠습니다. 세운 내용도 조동종 스님들이 잘못했다. 위안부를 끌고 가도록 했고, 그 다음에 강제징용자들도 알선해 주기도 했던 그런 선조들의 잘못을 후회로서 사죄하는 비문을 세워야 되겠다고 눈물을 이렇게 흘리면서 세운 그 사죄문이 세워놓고는 얼마 되지 않아서 파손시켰습니다. 누가 파손시켰는지 모르지요.  그래서 저도 며칠 전에도 지금 일본에서도 우익단체가 군마현에 세워진 우리나라의 강제징용자들의 비문들을 전부 지금 망가지고 지금 싸우고 있잖아요. 오늘도 싸웁니다. 이 역사가 오늘 조동종 총천사의 사죄문도 같이 우리가 생각을 해야 돼요. 왜 사죄문을 없애버리라 하느냐, 사죄라는 것은 과거 역사를 잘못하고 미래를 지향해 나가자고 하는 그런 역사의 비문인데, 그것도 우리나라 사람이 세운 게 아니고 일본 후예들이 가슴 아프게 세워놓을 것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우익단체처럼 파괴시키고 훼손시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사진=훼손된 '이치노에 쇼코' 스님의  사죄 비문(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사진=훼손된 '이치노에 쇼코' 스님의 사죄 비문(한일문화연구소 제공)

앵커; 네, 그럼 지금 이 비문은 자리와 함께 흔적도 없는 겁니까? 소장님?

답; 예, 뜯고 난 자리는 있습니다마는 그 후로 지난 10월에 뜻 있는 분들이, 몇 분들이 저 포함해서 조그만하게 인쇄를 해가지고 철에 인쇄를 해서 바로 총천사 석불 뒤에 붙여놨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답; 붙여놨는데도 그것도 지금 의심스러워요. 또 누가 와서 아마 주위에 있는 분들이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또 파손시키지 않을까 하고 참 걱정스럽게 있습니다.

앵커; 비문의 내용은 그러면 전해지고 있다 이런 말씀이네요,그렇죠?

답; 그렇죠. 내용을 지워버리고 그 철판은 그대로 있습니다마는 참 안타까운 사실이죠.

앵커; 소장님 현재 비석마을은 부산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데요. 부산시의 첫 번째 등록 문화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과거 이런 역사 과정을 행정기관에서 제대로 좀 파악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어떻게 보십니까?

답; 제가 본컨데는 파악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악한다면 방금 제가 그 당시에 유물 나오는 것을 시 문화재로 지정하든지 보관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박물관에 그렇죠? 그 다음에 노출돼 있으니까 없어질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니까 조사를 안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입증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네스코라면 세계유산입니다. 세계유산에 올린다는 것은 이 비석마을은 어떻게 해서 누가 그 속에 아직까지 일본 유해들이 그대로 있는 데가 많습니다. 한 예를 들어서 제가 방문할 때 한 노인이 나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인데 여기에 텐트 쳐놓고 자다가 판자집을 만들고 내가 누워 있는 구들목 밑에는 일본인의 유해가 들어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전부 파악해서 일본인들에게 돌려주기도 하고 또 우리가 또 공동묘지에 안치시켜주기도 하고 이 조사가 필요합니다. 큰 조사입니다. 이게 만약에 유엔 유네스코에 등재만 하고 그대로 끝난다면 참 안타깝죠. 이거 조사도 하고 전부 조사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앵커; 어쨌든 이 비석마을의 역사는 일본 조동종 총천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기초적인 이런 총천사의 조사부터 필요하다는 그런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소장님 시간 관계상 저희가 더 여쭤보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부산시 행정당국과 불교계 혹시 이와 관련해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답; 제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민들이 불심을 가지는 분들이 간곡히 부탁해요. 뒤에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그 뒤에 문을 만들어주면 들어가서 앞 정면을 보고 과거의 불상은 나라를 잘못하도록 했는 건 아니다. 일단 모든 만민은 다 평화를 주장하고 그 불심을 주장했으니까 부처님은 아무 관계 없다. 그러니 우리가 불상, 그 당시에 우리의 평화, 오늘의 평화를 부르짖도록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 이렇게 지금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시는 물론 모르고 있지만 구청이 우리가 관련하는 게 아닙니다. 학교도 관련하는 것 아닙니다. 국토부 땅이라서 국토부에 문의해도 그거 뭐 있는 거 모릅니다. 그거는 교수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거는 우리하고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고 회피합니다. 그런 입장이 있으니까 이거를 구청이 먼저 앞서가지고 뒤에 조그마한 소문을 열어서 닫고 열고 해서 부산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불자들에게 힘을 줘야 합니다.

앵커; 네 알겠습니다. 소장님 세계문화유산 관련 연구와 함께 이런 부분들도 살펴야 된다는 그런 지적이신데, 앞으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 함께 말씀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장님!

답; 수고하셨습니다.

앵커; 지금까지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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