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 출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행 : 연현철 기자 

□ 2024년 1월 18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여행스케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 본 인터뷰 내용을 기사에 인용하거나 방송에 사용시 청주BBS '충북저널967' 프로그램명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연현철 : 국내외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입니다.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님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 나와 계시죠? 안녕하십니까?

▶김선권 : 네.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연현철 : 바로 여행 떠나보죠. 지난주에 이어서 자금성 이야기마저 하실 거죠?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해서 황제의 업무공간인 자금성의 외조까지 갔었는데요. 오늘은 황제의 사적인 공간 내정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연현철 : 좋습니다. 황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겁니까? 기대되는데요.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김선권 : 지난주에 소개해 드렸던 황제의 업무공간 외조 3궁 뒤에 웅장하게 서 있는 건청문은 황제의 침전(寢殿)인 건청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이곳에서부터 황제의 은밀한 사생활이 이루어지던 곳입니다. 그리고 건청문부터는 현판에서 변화가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단문, 오문, 태화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의 현판은 모두 한자로만 쓰여있는 반면에, 이곳 건청문부터 자금성의 후문 신무문까지의 전각의 현판은 한자와 만주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연현철 : 그렇습니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김선권 :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청나라는, 명나라가 지은 궁궐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왕이 머무르던 곳에는 만주어를 적어놓아 만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앵커님, 혹시 지난주에 등장했던 태화문을 지키고 있던 청동 사자상 기억하십니까? 수컷은 천하통일의 상징인 여의주를 앞발로 누르고 있고.

▷연현철 : 맞습니다. 앞발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던 자애로운 어미도 있었죠?

▶김선권 :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이곳 건청문도 역시 사자상 암수 한 컷이 지키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태화문의 사자상과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현철 : 뭔지요?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김선권 : 태화문 앞에서 본 청동 사자상과는 달리 건청문 앞 사자상은 황금색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색이 아니라. 다른 문을 지키는 사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과는 달리, 건청문을 지키는 사자는 귀가 아래로 처져 있다는 점입니다. 

▷연현철 : 작가님 이거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알아채기 힘든 디테일이네요. 당연히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김선권 :  그 이유는 이곳 건청문 뒤로는 황제의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라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눈썹 또한 눈을 반이 넘게 가리고 있는데, 이 또한 귀를 내린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연현철 :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 황실의 사생활을 보호하겠다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김선권 : 건청문 뒤 황제의 침전 건청궁은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침소였지만, 청나라 시대에는 편전인 태화전의 보조 편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황제의 업무공간으로 바뀐 거죠. 그리고 황제가 붕어(崩御)하면 장례식 때까지 시신을 이곳에 보관하며 며칠간 제사를 지내곤 했다고 합니다.

▷연현철 : 그렇군요. 바로 장례식을 치르는 게 아니었군요. 우리 궁궐에도 이런 공간이 있었는지 아시는지요? 작가님.

▶김선권 : 네 있습니다. 이런 목적의 전각을 ‘빈전’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경복궁에는 북서쪽 끝에 이 기능을 하는 태원전이란 전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약간 사족이긴한데, 경복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고종의 거처 이름도 지금 소개해 드린 건청궁과 마찬가지로, 건청궁(乾淸宮)이었습니다. 건청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마무리하던 시절에 고종이 사비를 들여서 만든 곳인데, 고종이 건청궁을 만들고 살았던 이유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었습니다. 건청궁의 뜻처럼 맑은 하늘을 꿈꿨던 고종은 건청궁에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십여 년 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왕비를 잃었기 때문이지요. 이 일이 있고 나서 약 넉 달 뒤인 1896년 2월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로 몸을 피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습니다.

▷연현철 : 저도 학창 시절에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을미사변, 아관파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였습니다.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황제의 침전 뒤에는 황후의 침전 교태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경복궁에 있는 중전의 침전도 역시 교태전이었습니다. 교태전(交泰殿)의 교태(交泰)를 흔히 ‘교태를 부린다’고 할 때의 그 아리따운 자태를 의미하는 교태(嬌態)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듯한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태(交泰)는 주역에서 따온 것인데, ‘하늘과 땅의 두 기운이 만나 태평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왕과 왕비가 사이좋게 지내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를 의미합니다.

▷연현철 : 예. 사실 황후의 침전이라고 하셔서 ‘저도 교태를 부리다.’의 교태인 줄 알았습니다.

▶김선권 :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더라고요. 교태전 안에는 '무위(無爲)'라 적혀있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도교(道敎)에서 유래된 말로써 “성인의 덕이 지극히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 즉 “다스리는 것을 백성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스리는 것”이라는 의미로, 도교의 이상적인 통치 방식, 정치적 이상향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이 편액은 황후와 외척(外戚) 세력에 대한 일종의 경고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의 멸망이 외척 세력인 서태후(西太后)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으니,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치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연현철 : 작가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정말로 아이러니합니다. 권력을 잘못 사용한 본인의 잘못을 여성의 문제로 전가한 겁니까?
 

▶김선권 :  그러네요. 그런데 앵커님,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자금성의 교태전과 경복궁의 교태전을 비교했을 때 어떤 전각이 더 클 거 같으세요?

▷연현철 : 제가 생각하기엔, 저는 자금성을 안 가봐서 자금성의 교태전이 클 것 같은데, 작가님 제가 반대로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보겠습니다. 경복궁의 교태전이 조금 더 큰가 보죠?

▶김선권 :  네, 맞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한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경복궁의 교태전의 규모가 월등히 큽니다. 실제로 건물의 규모를 언급할 때 사용하는 “칸”으로만 비교하자면 세 배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사실 저는 자금성의 교태전을 처음 보았을 때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경복궁도 왕의 침전 강녕전에 비해, 교태전이 작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상식에서 벗어나는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금성에선 웅장한 황제의 침전 건청궁에 비하면 교태전은 조금 과장해서 오두막 수준입니다.

▷연현철 : 정말 의외입니다. 어떤 연유가 있을까요?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자금성 관련 사진 / 김선권 여행작가 제공

▶김선권 :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 성리학이 득세하기 전까지는 여성의 인권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꽤 높은 사회였습니다. 물론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재산 상속 또한 공평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적절한 예가 될 듯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오죽헌을 물려받았고, 율곡의 부친은 처가살이를 하기도 했잖습니까? 조선 초기까지는 심지어 이혼과 재혼도 자유로운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전족이라는 악습에서 볼 수 있듯 여성의 인권이 상당히 낮았던 사회였습니다. 이런 사회상이 전각의 크기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연현철 : 그런 점이 반영됐다는 추측이 있군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황제 사적의 공간 자금성 내정까지 들여다봤습니다. 작가님 약속된 시간이 다 돼서요. 말씀 여기서 줄이고 다음 주에 자금성 이야기 다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선권 : 네 고맙습니다. 
 
▷연현철 : 지금까지 여행작가 김선권 작가와 여러분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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