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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이병욱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방송 : 2023년 10월 29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한국불교 현대사를 보면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나타나서 활동하는 시기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만큼 오늘날과 같은 한국불교를 발전시켜 놨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조계총림의 초대 방장을 지내면서 많은 출재가 제자들을 길러냈고 또한 많은 서양인 제자들까지 길러내면서 국제포교의 지평을 넓혔던 구산 큰스님이 계십니다. 올해 구산스님 40주기를 맞아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고려시대의 정혜결사를 이끌었던 보조국사의 사상을 선양하는 단체죠. 보조사상연구원의 이병욱 원장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이 자리에 보조사상연구원의 이병욱 원장님 모셨습니다. 이병욱 원장님 안녕하세요.

 

이병욱 : 예 반갑습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에 처음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 청취자들께 인사 말씀 주시고 시작하겠습니다.

 

이병욱 : 예. 보조사상연구원에서 일하는 이병욱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구산스님 열반 40주기 국제학술대회로 인해서 이러한 인터뷰 자리가 생긴 것 같습니다. 상세한 설명은 뒤에 차후 드리겠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지금 고려대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계신데 올해 또 보조사상연구원 원장 소임을 맡아가지고 많이 바쁘셨을 것 같아요.

 

이병욱 : 아무래도 갑자기 큰일이 생겨서 굉장히 바빴습니다.

 

김봉래 : 참 뜻깊은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오늘 원장님 모신 것은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조계총림을 이끈 대선지식이시죠. 구산 큰스님의 열반 40주기 관련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열반하신 지가 벌써 만 40년이 된 거예요.

 

이병욱 : 예 그렇습니다. 1983년에 구산스님이 열반에 드셨으니까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김봉래 : 예. 제가 그 해 송광사 수련대회에서 ‘원명’이라고 하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돌아가시더라고요. 정말 참 세월이 빠르다 이런 생각이 들고, 정말 선지식을 우리가 잘 모시고 수행 가풍을 이어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우선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으로 나오셨으니까 어떻게 보면 보조스님의 선풍이 이렇게 송광사뿐 아니라 우리 한국불교의 큰 흐름으로 지금 이어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이병욱 : 큰 틀에서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한국불교의 원형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와 아울러서 수행 문화의 원형도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저희가 볼 수 있겠는데요.

 

김봉래 : 네. 국교였으니까요. 거의.

 

이병욱 : 그래서 또 고려시대라고 하면 보조국사 지눌의 수행 가풍이 제일로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봉래 : 고려시대 전반기에는 천태종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었다면 후반기에는 이렇게 보조국사의 정혜결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렇게 교과서에서 배웠거든요.

 

이병욱 : 예. 그렇습니다.

 

김봉래 : 원장님 나오셨으니까 보조사상연구원 어떤 기관인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병욱 : 구산스님이 보조국사 지눌을 선양하셨는데요, 그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곳이 보조사상연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조사상연구원은 1987년 구산스님의 제자 현호스님께서 구산스님의 뜻을 받들어서 설립한 것인데요, 송광사 법정스님 그리고 또 강건기 교수, 버스웰 교수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서 발기한 단체입니다. 보조사상연구원의 발기 취지문 끝부분을 보면 “우리는 이 보조사상연구원을 통해서 보조사상을 오늘 이 땅에 새롭게 심으려고 한다. 보조스님의 가르침이 편협한 종교계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의 사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뜻있는 분들의 관심과 동참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현황을 말씀을 드리면 현재 1년에 월례 발표회 5회 또 가을에 정기학술회 1회, 모두 1년에 6회의 학술대회를 저희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자. 구산스님이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총림 가운데서는 해인총림에 이어서 두 번째 아닌가요. 조계총림이. 그런데 이 목우 가풍을 드날렸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이고 특히 국제선원을 통해서 많은 외국인 제자들까지 길러낸 것이 굉장히 특징적이거든요.

 

이병욱 : 예 그렇습니다.

 

김봉래 : 그래서 스님의 행장을 좀 간단히 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욱 : 예. 구산스님은 1910년에 태어나서 1983년에 입적하셨습니다. 1937년에 효봉스님에게 출가하였고요, 그 후 수행에 전념해서 네 차례의 깨달음이 있다고 합니다. 1954년에는 효봉스님을 따라서 정화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였고요, 1969년에 조계총림 방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입적할 때까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특히 소개하고 싶은 것이 불일회인데요, 이 불일회는 송광사를 후원하는 모임인데, 현대 재가불자의 모범적 사례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여러 곳에 불일회의 지부를 창설하였고요. 1973년에는 불일국제선원을 송광사에 개원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 제자로는 약 15개국에 53명의 제자가 있다고 합니다.

 

김봉래 : 네. 그리고 서울에 송광사의 서울분원이죠. 법련사. 법련화 보살의 뜻을 잘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니 뭐니 우리 구산 큰스님의 덕화가 참 대단하시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우리 원장님은 구산스님과 어떤 인연이 계신가요.

 

이병욱 : 애석하게도 그냥 책을 통해서 구산스님 사상을 접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그래도 이번에 어쨌든 큰스님의 40주기 행사를 굉장히 여법하게 치러내지 않으셨습니까. 교수님.

 

이병욱 : 제가 그러니까 불교 공부를 하겠다고 발심한 이유 중에 하나가 구산스님의 <석사자>를 읽고 공부를 했으니까 결코 뭐 작은 인연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김봉래 : 이번 40주기 행사를 다시 한번 돌아봐 주시죠.

 

이병욱 : 저희가 10월 13일 국제학술대회로부터 시작해서 10월 18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14일 날 같은 경우에는 괘불재가 있었고요, 15일 같은 경우에는 금강산림대회가 있었고요, 16일에는 국제심포지엄하고 효봉스님, 구산스님 합동 추모제가 있었고요, 그리고 17일 18일에는 구산스님과 관련된 사찰 답사가 있었습니다.

 

김봉래 :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원장님은 보조사상연구원 주최의 국제학술회의를 실무적으로 주도를 하신 거죠. 분위기가 좀 어땠는지 전해주시죠.

 

이병욱 : 저희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5시 30분 정도에 국제학술회의가 끝났는데요.

 

김봉래 : 13일이죠. 10월 13일.

 

이병욱 : 9시 30분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는데 너무 좀 일찍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해주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엄숙하지만 또 학문적인 관심으로 달구어진 그런 분위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국제학술대회는 유튜브로 생중계되었고요. 그리고 유튜브에서 법련사 또는 보조사상연구원을 검색하시면 저희 국제학술대회의 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좀 시청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봉래 : 그래도 발표 내용들 또 특이한 것들 해서 간략히 소개를 해주시면 영상을 찾아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원장님.

 

이병욱 : 저희가 구산스님의 사상과 활동을 구분해서 준비했고요, 사상으로는 간화선에 주목을 했습니다. 또 활동으로는 제2정혜결사운동 그리고 불교의 대중화 또 한국불교의 세계화, 정화운동 등에 참여해서 일정한 역할을 한 점 등 이런 점들을 저희가 조명을 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이병욱 : 그러면 먼저 첫 번째 발표부터 살펴보면 인경스님의 발표였는데요, 주로 구산스님과 출가하기 전에 편지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것을 논문으로 활자화했습니다. 두 번째 발표는 버스웰 교수님의 발표였는데요, <절요사기>를 가지고 연구했는데 <절요사기>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의 줄인 말입니다. 이 <절요사기>가 한국 선사상의 색채를 잘 보여주는 저술이고, 이것이 또 조선 후기에는 강원 교재로 되었고요. 강원 교재에 2개의 주석서가 등장하였습니다. 조선조에도 <절요사기>가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고요. 또 현대에 들어와서 성철스님이 <절요사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절요사기>의 가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버스웰 교수는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봉래 : 네. 비중이.

 

이병욱 : 세 번째 발표는 김방룡 교수님의 발표였는데요, 구산스님의 제2정혜결사에 초점을 맞춘 글입니다. 이 논문도 역사와 철학이 잘 조화된 논문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 네 번째 발표는 제가 발표를 했습니다. 구산스님의 불교 대중화와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대해서 검토하였는데요,이 두 활동의 사상적 근거가 칠바라밀과 우리 것을 되찾자라는 글에 있다는 것을 제가 논문에서 주장했습니다.

 

김봉래 : 지금 청취자들은 칠바라밀 그러면 좀 생소할 거거든요. 육바라밀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스님께서 거기다 하나를 더 붙여서 만행바라밀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교수님의 논지를 조금 더 추가해서 좀 설명을 주실까요.

 

이병욱 : 예. 만행바라밀이 여러 가지 선을 말하는데요, 구산스님께서는 여기 주요 내용으로 사섭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섭법이라고 하는 게 남을 돕는 4가지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김봉래 :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

 

이병욱 : 그런데 이제 대체로 이행에 대부분이 들어갑니다. 남을 돕는 거니까요.

 

김봉래 : 네. 포괄적으로.

 

이병욱 : 그리고 보시와 애어는 그것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구산스님이 강조하는 게 동사입니다.

 

김봉래 : 동사섭.

 

이병욱 : 예. 그 취지인데요. 그러니까 그 사람과 입장을 같이 해서 동거동락하면서 그 사람을 도와야지 그 사람을 도와준다고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서 깔보면 진정한 도움이 아니다 뭐 이런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김봉래 : 아 정말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어떤 핵심 사상과 실천 방법을 제시했던 것,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병욱 : 다섯 번째 발표는 김경집 교수님의 발표였는데요. 구산 스님이 정화운동에 참여하고 또 조계종 설립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내용인데요, 이 논문에서는 1969년 5월 조계총림 창설 취지문을 발굴하였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처음으로 발굴해서 발표를 했나 봅니다.

 

이병욱 : 예. 기존 사진첩에 사진은 있었고요, 그것을 아무도 그 중요성을 몰랐는데 논문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여섯째 발표는 소렌센(독일 보훔대학교) 교수님의 발표였는데요, 구산스님이 덴마크에서 간화선을 선양했는데 그와 동시에 구산스님이 설법 방식도 유연하게 진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산스님이 덴마크에 가서 불교를 전한 것만이 아니라 구산스님도 전하면서 또 진보했다는 내용이 담고 있습니다. 일곱째 발표는 바그너(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님의 발표였는데요, 구산스님이 덴마크에서 활동한 내용과 덴마크 불교에 영향을 준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보조사상연구원 이병욱 원장님과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네 원장님. 계속해서 지금 송광사에서도 지난 10월 16일 국제심포지엄이 진행이 됐죠.

 

이병욱 : 예 그렇습니다. 오후2시에 시작해서요. 5시 정도에 끝났습니다. 원래 2시간 정도를 예상했는데 1시간 정도 더 길게 하였습니다. 사회는 인경스님이 맡았는데요, 외국인 제자 30여 분이 참여하였고 송광사 방장 스님이신 현봉 큰스님, 그 밖에 여러 송광사 스님이 참여했습니다.

 

김봉래 :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그 핵심적인 내용들을 조금 더 소개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욱 : 예. 그러면 외국인 제자들이 기억하는 구산스님을 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구산스님은 좀 부드러운 리더십을 가진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승가와 재가의 차별도 없었고요. 남녀의 차별도 보이지 않았고 또 사람을 평등하게 이끌어주는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울력, 여러 가지 노동 행위에는 제일 먼저 나와서 일하는 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김봉래 : 솔선수범.

 

이병욱 : 방장 스님인데도 일을 가장 먼저 하였다고 합니다.

 

김봉래 : 모범을 보여주셨군요.

 

이병욱 : 또 제자가 좌선하는 선방에도 자주 참여해서 함께 정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언행일치를 보인 분이다라고 어느 외국인 제자가 평가하였습니다. 저도 여기서 한마디 했는데요. 여러 외국인 제자가 송광사에서 한국불교의 사상과 수행법을 배우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새롭게 응용해서 대학 교수가 된다거나 또는 다른 나라의 수행 방법과 접목하는 것 등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불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불교와 접목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 남미의 에콰도르 출신의 스님이 계셨는데요, 한국의 통불교에 관심을 보이면서 남방 상좌부 불교, 북방 대승불교, 티베트 밀교 등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통불교에서 구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 제가 제일 인상 깊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현봉 큰스님의 말씀이 있으셨는데요, 송광사는 과거 승보사찰로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곳이지만 또 과거의 모습을 보면 동시에 수행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는 가장 앞서 있는 곳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래서 송광사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사찰이라고 자리매김하고 있었고요, 송광사는 전통을 잘 지켜나가면서 현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 밖의 행사들도 좀 있었죠.

 

이병욱 :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괘불재도 있었고 제가 아까 말씀 못 드린 게 이 괘불재의 산사음악회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원 시립국악원이 와서 연주하는 음악이 상당히 좋았고요. 티벳 명상음악회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또 15일에는 금강산림법회 회향식도 있었고요. 또 16일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효봉 스님과 구산 스님의 합동 추모제가 있었고 국제심포지엄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17일과 18일에는 구산 스님과 관련된 곳을 답사하였는데요.통영에 있는 미래사, 대구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등을 답사하였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제가 또 관심 있는 게 구산 스님과 외국인 제자들의 인연을 수록한 <구산스님과 인연담>이라고 하는 책도 출판될 예정이라고 들었었는데요.

 

이병욱 : 예. 책이 나왔습니다 영어 제목인데요. ‘Meetings with a Remarkable Man’ 그리고 부제로 ‘Reflection on the Great Masters Kusan’ , 번역하면 ‘훌륭한 사람과의 만남: 위대한 선사 구산을 다시 생각하며“ 뭐 이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출판사는 불일 출판사고요. 페이지는 505페이지 정도입니다.

 

김봉래 : 분량이 엄청나네요.

 

이병욱 : 왜냐하면 영어하고 번역이 함께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아직 비매품이고요. 또 외국인 제자들에게 주기 위해서 처음 만들었는데 내용이 상당히 알찹니다.

 

김봉래 : 이것 좀 더 널리 이렇게 유포가 됐으면 좋겠는데요.

 

이병욱 : 저희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외국인 관점에서 구산스님을 보는 것이 상당히 신선하다고 할 수 있고요. 또 감동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봉래 : 그런데 사실은 큰스님 돌아가시고 나서 국제선원이 제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는 그런 상황인데, 그래도 스님께서 뿌려놓았던 씨앗들이 이렇게 결실을 맺어서 곳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얘기를 원장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늘날과 같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는데 조계총림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고요. 그에 앞서서 1940년대 말인가요. 봉암사 결사의 역할도 큰 데, 요즘에 상월결사도 활동을 하고 있고요. 그래서 정말 한국불교사를 쭉 돌아보면 다양한 결사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결사의 의미, 결사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원장님께서 한 말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욱 : 일단 결사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면요 여러 승려 또는 승과 속이 함께 펼치는 신앙운동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도반을 모아서 함께 수행하는 수행공동체를 저희가 결사라고 부르는데요, 가장 일반적으로 얘기하면 불교의 세속화에 저항하는 일종의 신앙운동이라고 저희가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봉래 : 세속화에 저항하는. 어찌 보면 자체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이병욱 : 그렇습니다.

 

김봉래 : 그런 면에서 조계총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보조국사의 수선사 결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병욱 : 예. 보조국사 지눌의 저술인 <권수정혜결사문>에 저희가 정혜결사 또는 수선사 결사라고 부르는 그 정신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가 주류 문화가 되었고요. 그에 따라서 불교의 세속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니까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일어난 신앙 운동을 저희가 수선사 결사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수선사 결사 정신이 한국 불교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본 정신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김봉래 : 수선사 결사가 정말 오늘날 한국불교의 밑바탕을 흐르는 이제 기본 정신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고 싶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구체적으로 수선사 결사의 내용이나 역사나 이런 부분을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병욱 : 33세 때 권수정혜결사문을 저술을 했는데요, 그러고 나서 함께 결사에 참여하겠다는 분들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결사를 하기 위해서 옛 동지를 불러모았을 때는 그 때 참여한 사람이 예닐곱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봉래 : 아. 초창기에는요.

 

이병욱 : 그래서 저는 이제 가끔 저희가 스터디 할 때 사람이 적을 때 하는 말이 이 정도면 정혜결사보다 많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요. 물론 비문에는 나중에 300여 명이 참여했다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좋은 일에는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는 좀 어려운 게 아닌가 하는.

 

김봉래 : 뭐든지 초창기에는. 부처님도 혼자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5비구가 출발점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런데 저희는 정혜결사 또 수선사 결사, 보조국사를 돌아보면 늘 정혜쌍수라는 용어도 나오지만 돈오점수라는 용어도 나오거든요. 성철스님께서 올해 열반 30주기였기 때문에 약간 대비가 되는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런 수행의 어떤 방법론이라고 할까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이런 어떤 논쟁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이병욱 : 그것을 통해서 일단 뭐 누가 옳고 그른가는 둘째고요,그것을 통해서 간화선에 대한 또는 한국 선사상에 대한 어떤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라는 점은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 그를 통해서 그 전에는 돈오점수가 뭔지 돈오돈수가 뭔지에 대해서 세인들의 관심이 적었는데 이제는 좀 불교인이라면 그것도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지 가끔씩 저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보는 일도 있어서 그런 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도 어느 일이든 간에 그런 논쟁을 통해서 어떤 주장이나 사상이 발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오점수는 돈오점수대로의 장점이 있고 돈오돈수는 돈오돈수의 또 장점이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자. 요즘 명상이 대세라고는 합니다마는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탈종교화 경향 그리고 출가자의 감소, 신도 수의 감소, 이런 것들이 결국은 전법이라고 하는 것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이게 만들고 있거든요. 그런데 원장님은 이제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시고 또 젊은이들과도 소통을 하고 계신데 지금 어떻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이.

 

이병욱 : 저는 고려대에서 주로 불교 관련 교양을 주로 강의해 왔는데요, 현재 대학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서는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경제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봉래 : 신자유주의.

 

이병욱 : 또 한편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인문학이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마 취업 때문에 그런 것 같고요. 그에 비해 중장년층은 인문학에 관심을 두는 그런 현상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를 포함한 인문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취업과 관련해서 젊은 대학생에게는 외면받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김봉래 :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병욱 : 저는 그러면 그럴수록 근본적 가치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근본적 가치요.

 

이병욱 : 네.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고민할 때 불교의 가르침의 가치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현상보다는 조금 더 멀리 바라보고 준비하는 자세가 요구되고 그것을 불교를 통해서 배워나갔으면 하는 것이 저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김봉래 : 그래요. 정말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만 귀를 열고 이렇게 듣다 보면 정말 현실적인 가르침이고 고통과 고통의 소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신조와 관계없이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볼 수 있는 그런 주제와 실천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저희는 생각을 하는데, 약 5분 정도의 도입, 어떤 인연을 지어주는 게 참 어렵습니다. 참 요즘 관심이 다른 데 가 있으니까요.

 

이병욱 : 그게 진짜 실력이고 중요한 건데요.

 

김봉래 : 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소통하시면서도 그런 부분에 좀 어려움을 느끼시고 또 고민도 하시고 어떻게 좀 방안이 없을까 이런 고민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이병욱 : 결국은 근본적 가치를 자꾸 말을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표면적이고 우리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줄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러니까요. 참 고민이 됩니다마는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 원장님과의 시간이 마무리될 시간인데요, 그래도 우리 이병욱 원장님의 원력 그리고 향후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병욱 : 예. 우선 작게는 보조사상연구원을 앞서 운영한 여러 선배님의 노고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운영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면 더 좋겠지만 어느 정도라도 현상 유지를 하는 게 일단 저의 작은 목표입니다. 좀 크게 나아가면요. 보조사상연구원을 통해서 한국불교학이 발전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정기적으로 월례 발표회를 5회 정도 하는 학술단체는 거의 없는 편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 월례발표회와 정기 학술회를 알차게 운영해서 한국불교학이 한 걸음 진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저희 보조사상연구원도 그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김봉래 : 그럼요.

 

이병욱 : 한국불교학의 위상과 수준을 한 개인이나 한 단체가 이끌어 올리거나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체의 분위기가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보조사상연구원이 작은 역할을 할 때 그것이 다른 학술단체와 연결되어 좋은 물결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김봉래 : 네. 이병욱 원장님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병욱 : 예 감사합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보조사상연구원 이병욱 원장님과 함께 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이병욱 원장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원장님께서는 조계총림을 이끄신 구산 큰스님의 덕화가 크다는 점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젊은이들과 소통할 때 표면적인 가치보다 근본적 가치를 알 수 있게 잘 안내해야 한다는 말씀 저도 공감합니다. 이 나라와 이 세상의 미래에 우리 한국불교의 역할이 크다는 점 되새겨 봅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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