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 출  연 : 김선권 여행작가      
■ 진  행 : 연현철 기자
■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오전 8시 30분 '충북저널967' (청주FM 96.7MHz 충주FM 106.7MHz)
■ 코너명 : 여행스케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방송 다시 듣기는 BBS청주불교방송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습니다)

▷연현철 : 전국 곳곳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코너, ‘여행 스케치’ 오늘도 여행전문가 김선권 작가 전화 연결했습니다. 작가님, 나와계시죠. 안녕하십니까.

▶김선권 : 안녕하세요. ‘여행 그려주는 남자, 김선권’입니다.

▷연현철 : 네, 작가님. 반갑습니다. 오늘은 어디를 소개해 주실 건가요?

▶김선권 : 오늘은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으로 가보겠습니다. 이제 곧 단풍이 들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해 47일간 농성하다 항복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은 상당히 넓어서 전체를 돌아보기엔 하루가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행궁을 먼저 둘러보고 치욕적인 역사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연현철 : 알겠습니다. 저희 청주시에도 초정행궁이 있습니다. 행궁이 무엇인지 간략히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선권 : 왕이 항상 거주하는 궁궐을 정궁(正宮) 또는 법궁(法宮)이라 합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따로 떨어져 지은 궁을 이궁(離宮)이라고 하고요. 어떤 제자의 즉위식, 혼례, 세자책봉과 같은 가례를 행하는 곳을 별궁(別宮)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이 지방 행차 시 임시로 머무는 곳을 행궁(行宮)이라고 합니다. 행궁으로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수원화성이나 남한산성 그리고 초정행궁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호칭은 대부분 그의 거처와 관련이 있습니다. 왕비는 거처하는 곳이 궁궐의 한 가운데 있기에 중전, 왕세자는 차세대 군주라 해가 뜨는 동쪽에 거처하기에 동궁마마라고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20개소 정도의 행궁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남한산성 행궁만이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반정같은 위급한 사태를 대비한 임금의 피난처이자 군사적 요새였습니다.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연현철 : 그렇군요. 비상시에 예비 수도의 기능을 했기에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라는 건데, 다른 행궁과는 차이가 있네요.

▶김선권 : 네, 그렇습니다. 이제 한남루를 통해 행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남루(漢南樓)는 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으로 ‘한강 남쪽에 위치한 누각’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남루에 들어서면 행궁의 행랑채인 행각이 펼쳐지고 행각 가운데 외삼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궁궐은 국왕의 거처이자 집무실입니다. 그래서 궁궐은 크게 왕과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전(內殿)과,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 행사를 치르는 공간인 외전(外殿)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궐에 가면 거의 항상 외전을 거쳐 내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연현철 : 이런 설명을 해주신다는 것은 남한산성 행궁도 외전과 내전이 구분되어 있다는 걸까요?

▶김선권 : 그렇습니다. 다만 행궁의 외전과 내전이기에 그냥 외전, 내전이 아니라 외행전과 내행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당연히 행궁의 외행전(外行殿)은 병자호란 때 인조와 신료들이 회의와 업무를 집행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대포인 홍이포(紅夷砲)에 맞아 기둥이 부서졌던 건물이 바로 이 외행전입니다. 그런데 그 전각은 아니고 21세기 들어서 복원한 건물입니다. 남한산성 행궁의 전각들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서 불타 소실되었습니다. 내행전(內行殿)은 정면 7칸의 건물로 짜여진 행궁의 침전(寢殿)입니다. 내행전의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입니다. 이 온돌방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기거했던 방인데, 백성들이 그렇게 무수히 죽어갔던 그 전란 중에서도 스스로의 장수를 소망했는지 십장생 병풍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 좌승당, 재덕당, 일장각, 이위정 등의 부속건물이 있는데. 좌승당(坐勝堂)은 직역하면 앉아서도 이길 수 있다는 뜻으로, 싸우지 않고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군사적 의미를 담고 있고, 재덕당(在德堂)은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위정(以威亭)은 활을 쏘던 정자인데, ‘이위’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수 있지만, 그 전에 인(仁)과 의(義)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연현철 : 제각각 상당히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전쟁에서는 졌네요.

▶김선권 : 네, 안타깝죠.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사대의 예’만을 고집하다 발생한 참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산줄기가 둘러쳐진 분지 안에 궁궐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조가 이곳에서 40여 일을 버티다 결국 삼전도로 나가 항복했던 곳입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을 통해 현재 서울의 잠실 방면인 삼전도에 내려가 항복하는 치욕의 날을 맞이합니다. 

▷연현철 : 작가님, 제가 알기로는 왕의 출입문은 남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서문을 통해서 나갔습니다.

▶김선권 : 그렇습니다. 남향을 기본으로 하는 도성과 궁궐에서 왕의 출입문은 남쪽의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인조가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을 통해 삼전도로 내려간 이유는 청태종 홍타이지가 그 문으로 나오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항복하러 나오는 인조에게 3가지 명령을 내렸는데, 조선의 국왕은 죄인이기 때문에 왕의 휘장과 군사를 거느리지 말고 오라는 것과 왕의 옷인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색인 남색 옷을 입고 오라는 것 그리고 청태종 홍타이지가 마지막으로 명령한 것은 죄인인 조선의 왕은 남문이 아니라 서문으로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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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현철 : 정말 치욕적, 굴욕적인 역사인건데 그러니까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인조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군요. 그런데 어떤 연유로 서문으로 나오라고 명령한 것인지, 또 그냥 남문이 아닌 다른 문중에 무작위로 선택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김선권 : 조선의 도읍인 한성에는 4대문이라 하여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큰 대문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소문들이 하나씩 끼어 있었습니다. 그 4소문하고는 별도로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청계천의 끝자락에 광희문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광희문은 나중에는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으로 불렀습니다. 지금의 신당동 일대에 해당하는 광희문 성 밖에는 도성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래서 이 일대에는 시신을 염하며 굿을 하는 무당들이 몰려 살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무당천이나 시구문시장 등 옛날의 잔재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현철 : 신당이 무당들이 모여 살던 곳인가봐요.

▶김선권 : 그렇습니다. 그리고 광희문과 더불어 시체가 나갔던 소의문은 서소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현재 호암아트홀 정문 앞에 있는 소의문은 형을 집행하거나 유배를 떠날 때 죄수들이 도성을 나가는 문이었습니다. 소의문, 즉 서소문 일대가 조선말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로 순교성지가 되었던 이유도 소의문 성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을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청태종 홍타이지는 항복하러 나오는 인조에게 죄인의 신분에 맞게 서문인 우익문으로 나오라고 명령한 것이었고 그래서 인조는 이 우익문을 지나 내리막 돌계단을 걸어 삼전도까지 가서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렸던 것입니다. 남한산성을 나온 인조의 어가(御駕)는 한강을 건너 삼전도에서 세 차례에 걸쳐,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으로 청에 공식적으로 항복했습니다. 이를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 합니다.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사진 / 김선권 작가 제공

▷연현철 : 정말이지 치욕적인 역사의 순간이었습니다.

▶김선권 : 사실 청은 더 치욕적인 요구를 했었습니다. 청군은 항복 의식으로서 반합(飯哈)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완화된 것이 삼배구고두례였습니다. 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중화의 도를 계승하겠다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었습니다. 조선이 청의 영토나 식민지가 된 건 아니었지만, 청의 압력이 적지 않았고 근대화에도 뒤처지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연현철 : 오늘은 아름다움 속에 감춰져 있는 치욕적인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에 대해 전해주셨습니다. 작가님, 저희 약속된 시간이 다 흘러서요. 다음주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김선권 : 고맙습니다.

▷연현철 : 지금까지 여행 전문가, 김선권작가와 여러분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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