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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원택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방송 : 2023년 10월 22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의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한국 현대불교사의 큰 스승이셨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법으로 유명하신 퇴옹당 성철스님께서 열반하신 지가 올해로 30주년이 됩니다. 한 쪽에서는 선지식을 찾으라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선지식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데요, 깨인 눈으로 보면 선지식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스승님들께서 남기신 삶의 자취와 언행들이 남아 있고 이것을 계승하려는 노력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성철 큰스님의 크신 뜻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곳이죠.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이사장 원택스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뉴스와 사람들,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이신 원택스님 모셨습니다. 원택스님 안녕하세요.

 

원택스님 : 오랜만입니다.

 

김봉래 : 예 반갑습니다. 먼저 BBS 뉴스와 사람들 청취자들께 인사 말씀 주시고 시작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택스님 : 오랜만에 우리 BBS 뉴스와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오게 돼서 감회도 새로 많이 듭니다. 오늘 어떤 말씀을 드려야 될지 걱정도 되고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봉래 : 우리 원택스님 모신 것은 스승이시죠. 성철스님. 열반하신 지가 30년이 됐습니다. 만 30년. 참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 흘렀다. 제가 큰스님 열반 하셔가지고 사리 수습할 때 해인사 취재에 내려갔던 생각이 나는데요, 올해도 다양한 기념 행사들이 마련돼 있죠. 스님.

 

원택스님 : 지금 행사는 예년대로 저희들이 늘 해오던 행사를 조금 사회화시켰다 할까 그렇게 해서 크게 좀 잡아서 행사를 지금 해오고 있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우선 큰스님 생각하시면서 큰스님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크다 그런 느낌도 받지 않으시는가요. 어떻습니까. 스님.

 

원택스님 : 처음에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목격하고 또 산중에 그 소식을 알릴 때의 심정이야말로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저 깊은 캄캄한 굴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고 뭐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사람의 일이라 허망함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고 큰스님을 존경하는 모든 분들의 힘이 모여서 오늘 열반 30주기 기념식을 맞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본격적으로 이제 성철스님 열반 30주년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는데 우선은 기념학술대회는 벌써 열렸죠. 지난 14일.

 

원택스님 : 저는 14일 날 기념학술대회를 우리 총무원 국제회의장에서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해서 잘 마쳤습니다. 거기서는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와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설 성철사상연구원과 공동 주최로 박태원 영산대 석좌교수, 신규탁 연세대 철학 교수, 김광식 동국대 교수, 강경구 부산 동의대 교수, 김응철 승가대 교수, 김영우 부산 동아대 교수님 등이 발표를 해 주셔서 성황리에 잘 마쳤습니다.

 

김봉래 : 예. ‘성철 스님의 불교 인식과 현대적 적용’이라는 주제로 진행이 됐는데, 세미나 보시면서 감회랄까요 그런 것은 어떤 게 있으셨나요.

 

원택스님 : 스님께서 떠나신 지가 30년이 되지만 떠나실 때 그 때쯤 해서 스님께서 89년도쯤 해서 불교학계에 돈점설의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그 학설에 대해서 스님께서 돈오돈수 입장에서 보조국사님을 비판하는, 돈오점수 사상을 비판하게 되는 <선문정로>라는 책을 내시고 불교학계에서는 정말 참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 유역의 모든 교수님들은 그 동안 보조국사님의 돈오점수 이론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고, 저 산중에 계시는 성철스님인가 하시는 분이 감히 국사의 이론에 대해서 논쟁을 붙였다고 상당히 불쾌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님도 떠나시고 난 뒤 30년이 되니까 우리 불교학계에서 돈점논쟁도 사그러지고 그래서 지금은 백련암에서만 돈오돈수를 이야기할 뿐이고 다른 학회에서는 별로 관심도 두지 않는 그런 상황으로 왔습니다마는 불교문화학회 교수님 중에 한 분이 강경구라는 교수님께서 10년 동안을 큰스님의 <선문정로>를 연구해서 작년에 <정독선문정로>라는 한 천 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내주심으로써 저희들로서는 상당히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을 좀 더 쉽게 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큰 인연을 만들어 주신 데 대해서 강경구 교수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지금 우리 불교방송에서 강경구 교수님께서 매주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불교방송 TV에서 잘 나가고요, BBS 뉴스와 사람들 시간에도 저희가 모셔가지고 방송을 아주 잘했는데, 그만큼 30여 년 전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돈점논쟁과 관련해서 꼭 어느 한 쪽이 옳다기보다도 왜 큰스님께서 돈오돈수를 강조하셨는지에 대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인연이 무르익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스님. 그렇게 해서 제6회 퇴옹학술상 시상식도 있었죠.

 

원택스님 : 있었는데 우리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에서 요청이 있어서 우리가 부산에 있는데 큰스님의 어떤 또 근거지도 되는 고심정사라는 곳에서 큰스님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를 전하고 하는 곳인데 여기서 한 번 더 스님의 사상을 전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했는데, 잠시 말씀을 드리면 제가 부산에 고심정사라는 절을 2005년쯤 돼서 지으면서 부산이 모든 불교의 중심지라고 하는데 전국 모든 사찰의 불사를 부산 신도들이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그때는 그런 말이, 지금은 아니지만,

 

김봉래 : 불도부산이라고 하죠.

원택스님 : 그 때는 그런 말이 많이 퍼져 있었을 때인데, 제가 가서 절을 짓고 가서 내려갔을 때는 불교학회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서울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그래서 고심정사를 짓는 기념으로 부산 지역에 불교학회를 하나 만들어주는 인연을 심어야 되겠다고 해서 이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기반이 되고 난 뒤에 우리 고심정사를 떠나서 범어사라든지 통도사라든지 이런 넓은 곳으로 학회가 움직였다가 한 6년 전에 다시 고심정사로 돌아와서 스님하고 같이 학회를 운영하자 이러면서 그 때 제안한 것이 성철학술상을 만들어서 한 번 더 부산 지역의 불교의 학풍을 진작시키자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6회째로 동학사 승가대학 교수로 계시는 도민스님과 중앙승가대학 연구교수 신광희 교수님을 이번에는 선출해서 이번에 성철학술상을 수여하게 됐습니다.

 

김봉래 : 해마다 30주기 추모다례가 있고 대대적인 정진도 있지 않습니까. 삼천 배 정진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11월 3일 오전 9시에 성철스님 사리탑전에서 추모헌공다례가 있고 10시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30주기 추모다례가 열리는 거죠.

 

원택스님 : 이것은 스님들의 많은 행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행사가 지금 방금 말씀하신 스님 사리탑전에서 추모헌공다례 또 대적광전, 해인사 큰 법당에서 추모하러 오시는 많은 신도와 바깥 손님들이 모여서 추모다례를 올리고 하는 것이 제일 마지막 행사가 되겠습니다.

 

김봉래 : 그 전에 성철스님 문도회와 해인사 백련암에서 삼천 배 정진이 진행이 되는 거죠.

 

원택스님 : 네. 그래서 이것을 조금 자세히 말씀드리면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20년 동안 매년 스님의 제사 기일을 맞아서 칠일칠야, 일곱 밤낮으로 8만 4천 배 참회 법회를 이어 왔습니다. 그리고 한 20년 되니까 그 때 50이 70이 되고, 그 때 60은 80이 되고 힘이 너무 듭니다. 우리가 20년 동안 했으니까 할 만큼 안 했습니까라고 하는 말들이 있었는데, 그렇지만 이 계보가 없어지면 백련암이 큰스님의 앞이 허전해지지 않느냐. 그래서 조금 더 줄여서 사일사야 4만 8천 배 추모 참회법회로 대체를 하자. 이래서 지난 2021년부터 30년인 올해까지는 사일사야 4만 8천 배로 참회법회를 하는 것으로, 이것은 24시간 법당을 비우지 않고 스님이 계시는 법당을 비우지 않고 2시간에 천 배씩, 그래서 하루 24시간 하면 2시간이 1만 2천 배가 되는데 이걸 4일 곱하면 4만 8천 배가 되고, 7일 곱하면 8만 4천 배가 돼서 그렇게 해서 저희들의 정성을 스님께 이렇게 표하는 그런 행사가 되겠습니다.

 

김봉래 : 스님 말씀 들으면서 제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성철 큰스님께서 늘 참선을 강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절 수행을 강조하고, 특히 절이라는 것은 참회, 자기를 바라보는 참회를 강조한 것인데, 어떻게 이런 그 참회를 또 강조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그 배경이.

 

원택스님 : 이렇게 절을 하게 된 것, 8만 4천 배를 하게 되고 4만 8천 배를 하게 된 것도 스님께서 백련암에서 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3천 배를 해야 입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삼천 배를 한 사람이 아 이제 나는 절 그만해가 아니고 삼천 배를 하고 나면 뭔가 자기 스스로 삼천 배를 하는 그런 큰 고통 속에서 자기와의 대면을 하게 되는 그런 귀중한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책을 하고 난 다음에 반응이 여러 가지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은 다 자기를 긍정하고 수긍하고 아이고 나도 참 삼천 배라고 하면 못할 줄 알았는데 나도 성취했어 하는 이런 마음을 전부 가지게 되고, 또 자기 집에 돌아가셔서 계속 3천 배가 천 배로 줄고 하더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하루 300배 하는 사람, 500배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3천 배 하고 난 뒤에 생활 습관을 가지게 돼서 자기 의지를 스스로 다져가는 그런 일이 수행의 큰 일이 길잡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큰스님 책 중에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런 책이 있지 않습니까. 삼천 배를 통해서 이렇게 하심이 되면서 또한 수행에 대한 어떤 발심이 더 굳어지는 어떤 기초 작업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절 수행도 많이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신 것 같아요.  

 

원택스님 : 그러니까 우리 신도님들이 그렇게 되니까 전부 다 큰스님을 위해서 8만 4천 배 하자 해도 누구 하나 반대 없이, 큰스님 하던 그 법을, 떠나시고 안 계시지만, 우리가 모여서 한 사람이 8만 4천 배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천 배 할 수도 있고 전부 다 일주일 동안 천 배 더 할 수 있고, 만 배도 할 수 있고, 삼천 배도 할 수 있고, 그것은 자기 재량에 맡겨 놓지만 그러나 이 모든 스님께서 우리에게 절을 많이 하라고, 절이 바로 부처님께 바치는 최고의 공덕이라고 하신 그 말씀에 따라서 우리가 큰스님께 해 올릴 것은 절 뿐이니까 그래 절 수행을 하자 이래서 스님이 당부하셨던 3천 배 하라 이런 것들을 큰스님의 기일에 8만 4천 배, 요새는 4만 8천 배로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네 감사합니다.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백련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과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스님, 올해는 성철 큰스님 30주기를 맞아서 특별히 마련된 이벤트가 있더라고요. 30주기 되는 날에 <선림고경총서> 전 37권이죠. 이것을 e북 형태로 공개한다고요.

 

원택스님 : 선림고경총서 전 37권이 이 세상에 탄생한 인연을 먼저 말씀드려보면 스님께서 돈오돈수 사상을 표시해 놓고 <선문정로>를 발표하고 책을 내고 해서 한국불교학회에서 선문정로에 대해서 한 분이 나가서 서울에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이 학회에 백련암에서 누가 옵니까라고 해서 아무 경험도 없었던 저는 거기 누가 가야 됩니까. 교수님 발표하면 안 됩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와서 응원을 해 주시지요 이래 됐습니다. 그러면 갈 사람도 없고 해서 저 혼자 갔다가, 그 때는 저 쪽에서는 이종익 박사님이라든지 제가 표현하기에 보조 1세대 학자들은 다 한문 실력이 뛰어나신 분들 아닙니까. 서당 출신이니까. 그런 교수님들이 한 대여섯 분 해서 한 20여 명이 진을 치고 계시다가 우리 쪽에 교수가 말씀하시는 데에 일일이 토를 달고 반대를 하고 그렇게 하니까 우리 쪽 교수님이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학회 발표가 영... 저 쪽의 기세등등한 사람들이 기세를 보이고 우리 쪽에는 여교수가 약하고 약한 그런 꼴만 보여가지고 마음이 되게 상했습니다. 그리고 백련암에 돌아와서 스님께 그 정황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l 서울에 가서 이번 학회를 보니까 돈오점수는 온 세상을 출렁이고 있는데 돈오돈수는 해인사 담 안에서만 뱅뱅 돌아가는 그런 형국입디다. 그 때는 마침 저녁 예불을 마치고 들어가서 스님 안마를 해드릴 시간인데 제가 안마를 해드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인재 양성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하고 누워 계시는 스님께 그리 말씀을 드리니까 그만 후닥닥 일어나시더만 제 뺨을 막 아프게 때리시면서 ‘이놈아 그러면 니 눈에는 나는 인재 양성 안 한다 이 말 아니가. 이놈아. 이 나쁜 놈이’ 또 한 방, 두 방을 터지고 난 뒤에 스님께서 보기 싫다 나가라고 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 쫓겨나고 한 일주일은 부르시지도 않더라고요. 일주일 뒤에 불러주셔서 오늘 저녁 하면 또 어떻게 귓방망이를 맞을 텐데 무슨 말씀을 올려야 그렇게 참 위험을 피할까 생각하다가 스님께서 물으시기 전에 먼저 내가 말씀을 드려야 혼이 덜 나지 하는 생각으로 가서 한 5분 안마를 해드리다가 저는 지난달에는 말씀을 잘못 드려서 스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는데 지금 스님께서 주장하시는 돈오돈수 사상 우리 불교 사상이면 고불고조들께서 만들어 놓은 저술 해놓은 저술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저술을 번역해서 그렇게 몇십 권 번역을 해 놓으면 지금 스님께 도움이 없는데도 그런 번역이라도 있으면 옛날 고불고조들이 다 이렇게 돈오돈수로 말씀하셨다는 큰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번역을 하시는 책을 좀 스님께서 정리를 해 주시면 그렇게 번역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려서 한 달 만에 그 리스트를 받았습니다. 그게 1984년쯤인가 돼서 그것을 다시 번역을 해서 1993년 9월에 <선림고경총서> 37 권을 완간해서 서울 인쇄회관에서 법련사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서 회향을 하고 또 일본 야나기다 교수를 초청도 하고 국제회의도 해서 ‘돈오돈수의 현대적 의의’라는 그런 의미로 세미나까지도 한번 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그 해 1993년 11월 4일 이 모든 행사를 다 보시고 열반에 드시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종이책으로 해서 무슨 수익을 올리겠다든지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간 도서 현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김봉래 : 그래서 이제 e북 형태로 낸다 이런 말씀이죠.

 

원택스님 : 그래서 옛날 같으면 절판하면 되는데, 요즘에는 디지털 시대가 발전이 되니까 e북으로 만들어서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들어와서 그 책으로 무료로 보든지 그렇게 자유에 맡기겠다 해서 완전히 그걸 e북으로 무료로 공개한다고 그렇게 이번에 발표하게 됐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리고 성철스님의 삶과 수행을 다룬 5부작 다큐멘터리 제작 때 촬영한 영상들을 너튜브를 통해서 소개할 계획이다 이런 뉴스도 있더군요.

 

원택스님 : 이것은 뭐 크게 다룰 일은 아닌데, 요새 와서 저희들도 열반 30주년을 맞이해서 그 동안 자료들을 이렇게 보니까 스님께서 열반에 들어가시고 성철스님의 일대기라 해가지고 5부작으로 우리 자금으로 만들었던 비디오 테이프가 있습니다. 그것을 촬영할 때에 그 때 혜암 큰스님이라든가 지관 큰스님 또 그리고 동국대 김용정 부총장 이래서 스님들 한 열 명, 또 일반 교수들, 스님 주변에 인연 있는 분들이 열 다섯 명 정도 인터뷰 한 것들이 한 분이 1시간에서 한 30분, 50분 짜리들이 필름이 남아 있었어요. 그것을 다시 정리를 해보니까 다 산중에 방장 스님이고 이러시니까 큰스님하고 젊을 때 이렇게 기억을 가지고 계시니까 참고할 사항이 많고 그리고 그 자료를 남겨두지 말고 그대로 세상에 내어놓으면 후대에 스님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권유가 있어서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지금 일부가 나가고 있습니다.

 

김봉래 : 앞서도 성철 큰스님의 빈자리를 말씀해 주셨지만 평소 큰스님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 원택스님께 가장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원택스님 : 제가 지금까지 이제 한 것은 산중에 들어가서 큰스님을 모시고 지금까지 살았지만 저도 아직도 칠통을 탈파했다 이런 수준에는 못 가고 있으니까 그것이 늘 이렇게 가슴에 한이 되고 있으면서 그래도 뭐 큰스님께 제일 처음에 배울 때 화두 주실 때 “속이지 마라” 이렇게 주셨는데.

 

김봉래 : “자기를 속이지 마라”

 

원택스님 : “속이지 마라” 이렇게 해주셨는데 그 때의 대면에서는 ‘남을 속이지 마’라고 알아듣고, 세상에 이런 똥덩이 같은 말씀이 어디 있노 하고 혼자 대단히 서운하게 생각하고 백련암을 떠났다가 3개월 뒤에 집에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이고 남을 속이지 마라는 그 말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라, 자기를 속이지 마라 이렇게 들었으면 내가 평생 스님의 그 말씀을 다 지키지도 못했을지도 모르는 귀한 말씀인데 내가 너무 그날 현장에서 스님의 말씀을 소홀히 들었구나 해서 드나들면서 제가 출가의 길을 가게 되는 큰 인연이 되겠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대학 시절에 큰스님을 뵈었는데 “속이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언하에 깨닫지 않고 좀 오해를 했었는데.

 

원택스님 : 나중에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알아듣고는 지금도 큰스님 부탁대로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살고 있으니까 저도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김봉래 :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요. 큰스님께서 아주 좋으신 가르침을 주셨는데, 지금 근현대 한국불교사를 돌아볼 때 말이죠, 오늘날과 같은 이 한국불교 전통을 확립하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도 봉암사 결사가 큰 영향이 있지 않았나 대체적인 관측을 하고 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도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셨었는데, 원택스님께서 특별히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있으실까요. 봉암사 결사 관련해서.

 

원택스님 :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추석 지나고 결사를 맺으셨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뭐 저하고는 한참 봉암사 결사 자체하고는 인연이 없죠. 인연이 없는데, 그 뒤에 스님의 유품을 정리를 해보면 군데군데 ‘봉암사의 꿈’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습니다.

 

김봉래 : 봉암사의 꿈이요.

 

원택스님 : 봉암사의 꿈 그러면서 그 때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그 기치는 확실하고. 그렇게 해서 스님께서 봉암사 결사로써 그 때 많은 스님들이 지낸 스님들 중에서 종정이 다섯 분이 나오고 총무원장이 여섯 분 나오고 이러한 어떤 큰 토대가 되어서 오늘 한국 조계종의 근간을 이뤄가는 뼈대를 이루시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죠. 그런데 우리 큰스님은 조계종 종정을 두 번씩이나 역임하면서도 사실 전혀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시지는 않으셨거든요. 마치 법호인 ‘퇴옹’을 연상하게 하는 또 퇴옹 그대로 사신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는데, 그런 큰스님의 행장을 우리 원택 스님께서는 지금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원택스님 : 스님께서 종정이 되시고 난 뒤에 초파일에 서울에 오시라고 총무원에서 총무원장 스님부터 신도회장부터 왜 서울 안 오시느냐고 그렇게 서울 오셨다 한번 가시면 지금 우리보다도 수많은 신도님들이 올 텐데, 이렇게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랬을 때 큰스님께서는 내가 거리에 나가는 것보다 산중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훨씬 힘드는 일인 줄 모르니 하는 소리 아닌가. 혼자 안 나가고 있다는 것, 이것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뭐 이런 말씀의 뜻이죠. 그러면서 아무리 그래도 스님께서는 그런 데에 나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앉아서 평생을 사셨기 때문에 큰스님 열반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해인사로 몰려왔던 그 광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주 나갔으면 그런 인파는 없었을 거 아니겠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빛과 그림자 같습니다. 어쨌든 성철 큰스님의 뜻을 우리 다 함께 계승 발전해 나가는 것이 불자들의 의무이고 사명일 텐데 그 핵심에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이 있지 않습니까. 이사장으로서 앞으로 재단을 어떻게 이끌어가실 계획이신지 궁금합니다.

 

원택스님 : 지금 현재 제 자신도 백련불교문화재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사장으로 있지만 재단이 갖고 있는 재력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뭐 너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그래서 신도님들이 이것 만들 때는 큰스님께서 산스크리스트어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면 다른 방법이 없고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하셔야 안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동대 교수님들께서 너무 남전장경에 대해서 공부 안 한다고 하셨는데 말씀으로만 그러지 마시고 우리 백련암 마당 장대 끝에 그렇게 돈주머니를 달아놓고 산스크리트어 공부할 사람 이거 가져가라 그러면 물밀듯이 사람들이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별소리를 다 한다고. 그렇게 해서 재단을 만들기는 만들었습니다마는 스님의 그런 뜻이 바깥으로 제대로 알려지는 그런 인연이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예. 그래도 스님께서는 백련불교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인생 여정이기도 한데요, 원택스님의 원력 그리고 향후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원택스님 : 저는 평생을 큰스님을 모시고 살아온 그것으로 해서 앞으로도 뭐 스님을 위해서 할 일은 참 많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또 후배들도 생기고 이러지만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이라도 제대로 좀 연구하는 그런 학자들이 모여지고 이렇게 해서 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이 불교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 정말 꼭 필요한 사상이었다, 이 생각을 알리고 떠나고 싶습니다.

 

김봉래 : 예. 원택스님 오늘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원택스님 : 감사합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스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원택스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스님께서 봉암사의 꿈 얘기를 해 주셨는데요. 오늘날 한국불교의 위상을 만천하에 떨쳤던 성철스님의 마음자리 한 가운데 자리했던 것이 바로 이 봉암사의 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불교사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결사 정신을 우리 모두 잘 계승해서 더욱 발전하는 한국불교를 만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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