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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붓다팔라 스님, 인도 분황사 주지

방송 : 2023년 10월 8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의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고요. 많은 이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또 어디선가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만한 정도로 세상이 질서를 잡고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 불교의 입장인데요,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봉사와 구호 활동에 여념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께 많은 응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국제구호단체죠, 지구촌공생회 케냐 지부장을 역임하신 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탄하스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시간에 탄하스님을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탄하스님 안녕하세요.

 

탄하스님 : 안녕하세요. 탄하스님입니다.

 

김봉래 : 반갑습니다. 우리 탄하스님은 지구촌공생회 케냐 지부장을 5년 정도 맡아서 먼 아프리카 땅에서 자비행을 실천하셨고 또 얼마 전까지는 조계종 총무원에서 재무부장 소임도 보시면서 종단 발전에도 기여를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 뉴스와 사람들 청취자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탄하스님 :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지금 사회자 분이 저를 거창하게 소개를 했는데 그냥 우리가 실천 수행, 보현보살의 실천을 한번 수행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지구촌공생회 케냐 지부에 제가 문을 두드렸어요. 그런데 제가 스님으로 올해 36년째인데, 가장 보람된 수행의 생활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또 제가 재무부장이라는 종단 소임을, 종단과 무관하게 살다가 종단의 그 큰 살림을 살아봤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저한테는 큰 수행처라고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요즘 근황이 좀 궁금한데 연말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죠, 용주사가 운영하는 노인복지관을 오픈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계시다 이렇게 들었거든요. 스님.

 

탄하스님 : 네. 지금 용주사 바로 길 건너에 사찰, 아마 경내 같아요. 경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이에 화성시가 아주 야심차게 정조효노인복지관이라는 복지관을 오픈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재무부장 끝날 쯤에 전 동국대 상임이사 스님이셨던 성월스님이 저한테 그거를 좀 한번 해봐달라고 해서, 또 제가 필요한 곳은 가야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정조하고 또 사도세자 하면 우리 용주사가 접목이 되는 거잖아요.

 

김봉래 : 효행 사찰이죠.

 

탄하스님 : 효행 사찰로서 효행 사찰하고 어르신들하고 어떻게 접목을 시켜서 진짜 성공적인 복지관을 만들까라는 고민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래요. 자. 우리 스님은 또 어린이 포교도 열심히 하셨고 노인복지도 열심히 하셨는데 그 얘기는 조금 뒤로하고, 먼저 국제구호 활동에 대해서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스님 나오신 너튜브 영상을 봤거든요. 이것이 너무 감명이 깊었고. 특히 올해가 큰스님, 월주 큰스님 입적 2주기여서 더욱더 가슴이 뭉클했는데, 큰스님 생각하시면 일단 빈자리가 너무 좀 크게 느껴지지 않으실까.

 

탄하스님 : 그렇죠. 저는 큰스님을 만나서 인연을 두었다는 것에 굉장히 감사하고 또 그 일을 제가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정말 이렇게 뿌듯하기도 하고 늘 돌아보는 삶이 됐던 것 같아요. 어떻게 회향을 할 것이냐를 묻는다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가서 보현보살의 실천을 좀 한번 해봐라. 큰스님이 그 때 제가 아프리카로 봉사를 가겠다고 이랬을 때, 가는 목적이 뭐냐를 물으셨어요. 별로 좋아 안 하시더라고요. 제가 아프리카를 봉사하겠다니까. 뭐 스님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셔서 그랬는지 안 좋아하시면서 ‘왜 가려고 그래’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때 그랬던 것 같아요. 스님 저는 보현보살의 실천수행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법화경 법문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고 저는 관세음보살을, 제가 고향이 양양입니다. 그러니까 낙산사 그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기도를 해서 제가 보현보살의 실천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중생의 어머니가 돼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아주 크게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당신이 웃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봉사는 그렇고 지부장을 가봐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NGO는 처음인데 지부장을 할 수 있을까요 이랬더니, 복지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한번 해보라고 이렇게 아주 과감하게 저를 또 밀어주셨어요. 그래서 뭐 어쨌든 아프리카로 가게 되면서 용기가 좋았죠.

 

김봉래 : 그런데 어떻게 또 지구촌공생회와 인연이 되신 거예요. 

 

탄하스님 : 제가 지구촌공생회는 그냥 큰스님이 총무원장의 소임을 끝나고 나서 저렇게 큰 어른이 구호 활동에 이렇게 고개를 돌렸다는 것에 굉장히 저는 막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스님들이 아무도 신경을 안 썼고. 저는 테레사 수녀를 굉장히 존경을 해요. 종교가 달라도. 저런 것을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인데 천주교가 하고 있더라고요. 열심히. 그런데 또 어른이 그 일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제가 가서 육체적으로는 못하더라도 후원을 해드려야 되겠다 이래서 후원자로.

 

김봉래 : 오랜 후원 회원이셨군요. 지구촌공생회의.

 

탄하스님 : 네. 후원자로 만났죠. 큰스님하고. 그 때는 학인이었는데.

 

김봉래 : 우리 스님께서는 출가 본사는 불국사로 되어 있으시고 또 강원은 봉녕사, 그 다음에 중앙승가대학 나오시고, 사회복지학 전공하셨죠. 그래서 지방에서도 의성군의 노인복지관 관장도 역임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이렇게 국제구호 활동에 인연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좀 힘드셨지 않았습니까. 어떻습니까.

탄하스님 : 그러니까요. 저는 제가 아프리카를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약간 의성 고운사 말사에서 제가 주지를 한 십몇 년, 거의 한 18년 정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노인복지관 12년을 이렇게 하면서 그 작은 동네잖아요. 군이 5만밖에 안 되는 작은 군이다 보니까 어르신들이 굉장한 투표권을 가진 분이다 보니까 제가 힘이 생겼어요. 쉽게 말해서. 그러다 보니까 또 저한테 적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와서 이렇게 흔드는 사람이 많아요. 어른들은 다 저를 의성의 딸이다. 그러니까 어른들한테 좀 잘했나 보죠. 제 칭찬. 그런데 이제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적도 생기고 저를 돌아봤을 때 저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아서 사실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스님한테 아프리카 봉사 가겠다는 것은 약간 도망가듯이.

 

김봉래 : 도피성.

 

탄하스님 : 네. 도피성. 가서 이렇게 이사장 스님한테 제가 아프리카 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랬던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하시면서는 어려움도 많으시고 보람도 있으시고 할 것 같은데 보람은 어떤 게 있습니까. 스님.

 

탄하스님 : 그들하고 제가 하나가 됐던 것 같아요.

 

김봉래 : 하나가 되었다.

 

탄하스님 : 그러니까 문화도 다르고 처음엔 생각도 달랐는데, 그러니까 케냐의 마사이들이 저를 거부하기도 하고 저도 그 사람들을 거부하기도 하고, 너무 약간 쉽게 우리 생각대로 하면 짐승스러울 때도 있고 너무 생각도 못한 행동들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이제 거부감도 있는데, 나중에는 그 지역 주민들이 저를 봤을 때는 무조건 다 믿어줬고 저도 그들을 믿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람들한테 가서 밥숟가락 같이 꼽아서 이렇게 먹을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편견이 좀 없어진 것 같아요. 지금도 흑인들에 대한 우리의 흑인들에 대한 편견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거는 없어진 것 같아요. 

 

김봉래 : 그 쪽 지역이 케냐에서 도심이 아니라. 

 

탄하스님 : 네. 오지입니다.

 

김봉래 : 좀 떨어진 곳이라고 굉장히 생활상의 불편도 많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탄하스님 : 당연하죠. 일단 물 자체도 좀 없었고. 이제 우리는 한국에서 수도꼭지만 탁 열면 물이 나와서 샤워도 하고 이러는데 일단은 우리 거기 케냐가 여러분들은 아프리카 하면 굉장히 덥다고 생각하는데 거긴 추워요. 아침저녁으로 샤워하려면 물을 약간 데워야 돼요. 그래서 가스레인지에다 물을 데워서 옮겨서 바가지로 해서 이렇게 샤워를 해야되는 그런 불편, 또 빨래를 해도 뭔가 다 세탁 빨래를 해야되고 이렇게 문명적인 건 없었죠. 기계적인 것은. 물론 나이로비 가니까 다 있긴 있는데 오지다 보니까. 그런 것을 나중에 알았죠.

 

김봉래 : 그래서 거기서 뭐 초등학교도 건립하시고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탄하스님 : 제가 케냐 가서 한 3개월은 굉장히 좀 무섭고 두려웠고 그러면서 점점 바깥을 나가서 학교라는 데를 가보면서 선생님들하고 얘기도 해보고 이러면 교육을 통해서 그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는 게 가장 빠르겠다. 지역 주민들한테 우물을 파주고 위생 교육을 시켜도 가슴에 접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아이들 때부터 위생이라는 것을, 손을 씻고 밥을 먹어야 되고 저녁 때도 꼭 발을 씻어야지 너희들한테 병균이라든지 이런 게 좀 덜 나올 거고 그런 것들을 물도 끓여서 좀 먹으면 좋겠다, 물이 없으니까. 그런 교육들이 다 교육을 통해서 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학교가 굉장히 중요하죠. 학교에 아이들이 오게끔 만들고.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게 쉽지가 않은 게 일이 너무 많아요. 가축도 돌봐야 되죠. 물도 길으러 가는데 물을 길으러 가는 게 보통 뭐 8km, 10km 이렇게 가서 물을 길러야 되니까 하루 종일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사장 스님한테 학교 안에 우물을 파주자. 그러면 애들이 학교 왔다가 갈 때 물을 길어갈 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들도 학교에 와서 물을 길어가면 학부모 교육을 시킬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한 게 제가 조금 보람이다. 그리고 아까 가슴 아팠던 게 여자 아이들이 초경을 하고 나면 염소나 뭐 이런 거에 팔려가요. 아버지의 재산이기 때문에. 작은 돈에 팔려가면 13살짜리 애들이 한 40대, 50대 사람들하고 결혼을 해서 약간 노동 착취를 당하죠. 그런데 그런 애들이 그런 것이 무서워서 학교로 도망오면 학교에서 얘네들을 받아주면 청소년기 때 보장을 받을 수 있어요. 정부로부터. 그런데 학교에서 얘네들 받아줄 수가 없는 거예요. 얘네한테 들어가는 돈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이런 애들이 있는데 한국에 후원자들하고 연결해 줄 수 있냐 이러면 제가 한국에 인맥들을 동원해서 케냐에 아프리카에 아들 하나 키워봐라. 딸을 하나 키워봐라.

 

김봉래 : 그런 심정으로 후원해라.

 

탄하스님 : 네. 그런 것들이. 조금 그래서 그 친구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랬던 것들이 좀 보람됐던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렇게 5년을 하셨는데 사실 이제 지구촌공생회가 해외 지부를 몇 군데에 뒀었다가 지금은 대부분 다 철수를 한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케냐 상황도 그런가요.

 

탄하스님 : 케냐 지부하고 지금 제가 어른 스님, 이사장 스님 계실 때 본래 스리랑카까지 한 7~8개 하다가 이사장 스님 있을 때 스리랑카 사업은 좀 접었고요. 6개 지부를 가지고 있다가 지금 또 2개를 접었고, 지금 이제 4개 지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봉래 : 많이 좀 아쉬울 것 같아요. 그렇더라도 또 그때 맺었던 어떤 인연들, 이런 인연들이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지 않습니까.

 

탄하스님 : 그 케냐에 있는 선생님들이 요즘에는 다 좋잖아요. SNS라든가 뭐 페이스북이라든가 카카오톡이라든가 세계가 하나잖아요.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와요. 잘 있냐. 네가 너무 그립다. 그래서 저는 그러죠. 내가 그리운 게 아니고 내 돈이 그립겠지. 나의 인맥이 그립겠지. 왜냐하면 필요할 때 그들을 좀 도와줬던 그런 것들이 그리웠겠죠. 아프리카 살 때는 하루 현장에 나가면 어떡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게 굉장히 저의 화두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러다가 가만히 앉아서 부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부처님은 이랬을 때 이 중생들을 어떻게 구제해줬을까. 그러다 보면 용기도 생기고 지혜도 나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것들이 아마 그 케냐에 있는 선생님들이 저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김봉래 : 신뢰도 있었겠죠. 자.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전 지구촌공생회 케냐 지부장 탄하 스님과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지구촌공생회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특히 국제구호에서 아주 선도적인 역할을 해 왔었는데, 스님께서 국제구호 활동은 어떤 게 중요하다, 어떤 체험에서 나오는 얘기를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탄하스님 :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냥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고. 

 

탄하스님 : 왜냐하면 저도 학교를 지어줬을 때 100%를 다 지어준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사장 스님도 그렇게 말씀을 했고. 100%는 절대 안 된다. 70%만 도와주고 나머지 30%는 본인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되고. 그리고 아이들이 제가 가보니까 의무교육이라서 애들 급식도 무상급식이 돼야 되는데 그게 안 내려와요. 중간에서 다 없어져요.

 

김봉래 : 부정부패로 인해서.

 

탄하스님 : 그러다 보니까 애들이 와서 밥을 굶는 게 허다해요. 아침을 먹고 오는 애들은 1%도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점심을 학교에서 안 주니까 얘네들이 또 굶어요. 점심시간에 갔는데 애들이 다 나무 밑에 누워 있더라고요. 쟤네들이 왜 누워 있을까 이랬는데 먹을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국 들어와서 스님들 주머니를 이렇게 조금 해서 급식비를 마련해서 가서 했는데, 처음에 100%, 그 다음에 농장을 만들어서 곡물을 심어서 그 다음 해는 70%, 제가 70%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30%, 그 다음에 60%, 40%, 그 다음에 50%. 제가 케냐에서 나올 때는 제가 30% 지역 주민들이 70%까지,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게 아마 NGO의 역할이지 않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NGO들이 가서 이렇게 받아서 그냥 던져주고, 책가방 100개 가지고 가서 100개 던져주고 사진 찍고 이러는데, 이사장 스님은 그것은 못하게 했던 것 같아요. 굉장히 NGO 마인드로 진짜 본연의 NGO 마인드로 일을 하게끔 저희들을 훈련을 시키고 얘기를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김봉래 : 총무원장 역임하시고 나서 이렇게 국제 구호 쪽으로 누구도 관심을 돌리지 않을 때 앞서서 하셨고 또 나눔의 집 부분도 앞서서 하셨는데, 정말 이런 것들이 월주 큰스님의 크신 원력이 아니면 좀 어려웠겠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평소 이런 고구정녕한 큰스님의 어떤 비전과 어떤 자비심 이런 것들을 이렇게 좀 느낄 수가 있었겠습니다. 스님.

 

탄하스님 : 많이 있었죠. 제가 아프리카에서 본래 2년 계약 갔다가 이사장 스님이 좀 더 있어주면 안 되겠냐 이래서 사실은 제가 10년, 저 혼자서 10년은 있어야지 이게 어떤 효과가 있겠다 이 생각을 가졌어요. 그래서 10년을 혼자 해서 애들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다시 턴해서 또 후배들을 키우고 이렇게까지 만들어주고 오자가 제 계획이었는데, 중간에 제가 풍토병 때문에, 풍토병에 걸려서 5년 조금 못 하고 들어왔거든요. 이사장 스님이 '들어와서 치유하고 다시 나가라'였거든요. 그랬을 때 한국 들어왔을 때 당신이 나눔의 집에 저를 데리고 갔었어요. 가봤냐 이러고 그래서 아니 안 가봤습니다 그랬더니 가보자 이래서 갔더니, 그 때 당신이 돈을 이만큼 모아서 이 땅을 구입을 했다. 저기다 요양원을 짓는데 저 곳에는 사할린이나 중국이나 그 때 독립된 우리나라가 암흑기에 있을 때 외국에 나간 고려인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고국에 들어와서 죽고 싶어 하는데 머물 곳이 없다 그 말을 하셨어요. 그래서 내가 저 곳에다가 요양원을 지어서 그 사람들이 머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 얘기를 하셨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OO수첩에 너무 왜곡돼서 나오는 것을 보고 제가 굉장히 가슴 아팠거든요. 저것을 어떻게 밝혀드려야 되나. 저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본인이 직접 후원금도 이만큼 모았고 이렇게 일을 할 것이며 또 어른들의 유품이라든가 이런 것들도 다 한 쪽에다 했는데 너무 그렇게 정성스럽게 몇 십 년을 한 것은 다 어디가고 나쁜 것만 딱 보도를 하는, 그 정말 언론이 이렇구나.

 

김봉래 : 송구합니다. 저도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잘못된.

 

탄하스님 : 어른 스님의 정신은 공과 사도 분명하셨고 청벽한 거라고 그래야 되나 맑은 거는 말로... 공과 사는 너무 분명했던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런 면에서 우리 종단이나 정부에서도 이런 NGO 활동들 적극 힘을 좀 실어줘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스님 지금 또 용주사에서 아까 좀 간단히 언급해 드렸습니다마는 정조효노인복지관오픈 준비를 하고 계신데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행이 되고 있나요.

 

탄하스님 : 지금 건물은 한 90% 지어졌고 거의 다 지어졌습니다. 아마 그래서 11월 사이에 준공검사가 들어갈 거고요. 그렇게 되면 준공검사 들어가면서 저희 기능 보강을 해야 되겠죠. 안에다 기자재 놓는 것, 그런 것 들어가서 12월부터는 저희가 아마 세팅해서 어르신들하고 정식 프로그램은 1월 달부터 할 것 같아요. 직원들 해서 한 달 홍보해서 어르신들이 오는 것은 내년 1월부터 오셔서 어른들하고 만나는 걸로 그렇게 지금 세팅을 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노인복지에 아주 전문가시니까 오픈이 되면 기대가 많겠습니다.

 

탄하스님 : 전문가는 아니고요 열심히 할 뿐입니다.

 

김봉래 : 지금 종단에서는 뭐 제1의 화두라고 하면 아무래도 포교, 전법인데요. 천년을 세우다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고 또 상월결사에서는 대학생 전법에 본격 나서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또 어린이 포교에 일찍이 오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탄하스님 : 제가 사실 유아교육을 전공을 했어요. 그리고 낙산사 불교학생회를 다녔고 대불련을 다니고 그 다음에 청년회를 하면서 스님들이 유아교육에 대한 것을 그때 저랑 같이 만났던 스님이, 저를 이끌어줬던 스님이 중요시 여기면서 유아교육을 한번 해봐라라고 해서 유아교육을 제가 했었어요. 전공을 하면서, 그런데 좀 더 저도 어렸을 때 내가 부처님 법을 알았다면 더 내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저는 조금 집안은 불자였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그 중간에 교회를 다니다가 저기 하나님을 먼저 만났죠.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 다시 또 불교와 인연을 맺어서. 그것도 저는 재산이라고는 생각해요. 성경 공부를 했다는 것이. 그런데 그러면서 제가 아이들하고 같이 어울려서 놀면서 내가 불교를 조금 더 알았다면 이 아이들한테 불교를 더 심층적으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 자체에 부처님 법을 전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것을 안 하잖아요. 밥 먹을 때도 부처님 감사합니다 안 하잖아요. 이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해야 되는데.

 

김봉래 :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님.

 

탄하스님 : 그런 것들이 생활 속에서 묻어날 수 있는 것들이 종교가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생활 속에서 부처님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해서 이번에 상월결사에서 대불련, 대학생 불자 그것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아주 원력을 세우셔서 저는 굉장히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저도 대불련 멤버 중에 한 사람으로서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자. 이런 큰 흐름이 어떻게 보면 불교의 시대가 되는 것 아니냐. 문화의 세기고 그래서 요즘 특히 젊은이들이 명상에 관심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부분들도 친불교적인 문화를 선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스님.

 

탄하스님 : 그 명상을 저는 “명상이다. 명상이다. 명상, 명상, 명상.” 요즘에 그러잖아요. 그래서 명상을 좀 동떨어져서 얘기를 하지 말고 아까 금방 얘기했듯이 생활 속에 묻어나는 명상을 했으면 좋겠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같이 사색을 했던 기억이 나요. 왜냐하면 논둑을 걸으면서.

 

김봉래 : 어떤 사색을.

 

탄하스님 : 그러니까 아버지랑 손잡고 그냥 논둑을 걸으면서 농부들에 대한 감사함, 그런 것들을 그냥 아버지 말 속에서 저는 들었거든요. 그걸 느껴봐라. 곡식을 만져보면서 그걸 느껴봐라.

 

김봉래 : 체험 학습이네요. 스님.

 

탄허스님 :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요즘에 우리나라 문화 자체가 밥상머리 문화가 없어졌잖아요. 밥상머리 문화가 살아나는 것이 우리 명상의 가장 기본이 돼야 되지 않을까. 밥 먹으면서 밥을 씹으면서 농부의 감사함, 농부들의 노고를 명상해보는 것 그런 것들이죠. 뭐.

 

김봉래 : 그래요. 우리가 너무 이렇게 머리만 커지고 가슴이 불균형을 이루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정말 하나를 배우더라도 정말 가슴으로, 체험적으로 느낄 때 변화가 있잖아요.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뭐 스님께서 종단에서 중요한 소임을 하셨잖아요. 재무부장 소임 맡으시면서 중책을 하셨는데 마치시고 나서 어떤 소회 같은 게 있으실까요.

 

탄하스님 : 그렇게 큰 소임을 살아봤던 것은 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에요. 굉장히. 그런데 이제 조금 아쉬웠던 것은 조금 더 진일보하게 일을 좀 했었으면 좋았을 거다 이런 생각을 해보고요. 그 때 전 총무원장 스님이 했던 100만 원력의 일환으로 어쨌든 저희가 종단에서 모금도 해보면서 ‘하루에 10원씩 보시하기’ 해서 그게 모아지면 하나의 포교당을 만들고 이런 시스템은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후원자와 종단의 만남이라든가 이런 게 조금 더 체계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것까지 했었으면 좋았지 않을까. 이런 반성 아닌 반성이죠.

 

김봉래 : 네. 뭐 저희 불교방송도 만공회 후원의 힘 때문에 이렇게 힘을 받고 발전을 거듭해가고 있는데, 정말 그 후원 마인드는 조직 전체 조직원들이 전부 다 이렇게 가슴에 새기고 각자 파트에서 일을 해야되겠다 이런 생각도 많이 평소에 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뭐 공찰 주지를 오래 역임하셨는데 거기서 얻는 뭔가의 노하우 또 원력 이런 게 궁금합니다.

 

탄하스님 : 주지를 남산 한옥마을(충정사) 재무부장 살면서 당연직으로 살았던 남산 한옥마을까지 한다면 한 20년을 산 것 같아요. 그런데 일단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찾았을 때 그 사람들한테 편안함을 주는 게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스님들의 문턱을 낮추고 또 모든 기본 바탕은 부처님 법이 되어야 되겠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그 사람들에게 줌으로써 그 사람들이 받아가는 에너지가 있어야 된다 이렇게 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이 보시를 하더라도 이렇게 불사금을 낸다든가 보시를 하더라도 그들에게 믿음성을 줘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저는 그 때 주지 살면서 불사를 한다 1억짜리 불사를 한다 그러면 딱 1억만 모은 것 같아요. 나중에 더 모아지면 다음 기회에 하세요. 이것이 굉장히 신도들한테 신뢰를 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신도들이 알아야 된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제가 조금, 지금도 용주사에서 신도들하고 미리회라고 순례법회를 하는데 동참비가 비쌉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그들이 와서 처사님들하고 보살님들이 같이 동참을 해주는 것은 그 돈들이 분명하게 어디에 쓰인다는 것을 본인들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이제 곧 마칠 시간인데요. 우리 탄하스님의 원력 또 향후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탄하스님 : 저한테 주어지는 일이라면 저는 이제 지금은 정조효노인복지관을 완성을 시켜야 되겠죠. 시스템을 구체화시키고, 거기가 정상적으로 움직여주면 또 나의 후배 스님들께서 후배 스님들이 또 이것을 이어가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저는 또 다른 일을 찾아서 가야 되겠죠. 건강이 주어진다면 다시 제2의 NGO 활동을 하러 한번 가는 것도 저의 계획 속에 있어요. 인도 분황사에 지은 전국비구니회에서 불사해서 지은 보건소에 나가서 제가 그 일을 좀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도 조금 있고요. 건강이 허락이 된다면. 그래서 그런 원력을 한번 세워보고 있고요. 힘이 닿는 데까지 어떻게 뭐를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저를 필요로하는 데 가서는 언제든지 보현보살의 화신이 돼서 일을 해보겠다 그렇게 원력을 세워봅니다.

 

김봉래 : 네 스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촌공생회 전 케냐 지부장 탄하스님과 함께 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탄하스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스님께서는 보현보살의 원력행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야말로 크신 원력을 가지고 도전하는 삶, 도전하는 정신을 저희들에게 전수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불교가 사회에서 인정받고 또 사회를 이끌 수 있도록 이렇게 신뢰를 쌓아가는 그런 큰 원력행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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