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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시흥 대각사 주지 원돈스님

방송 : 2023년 7월 2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의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민간의 도움이 컸는데요, 점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비중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민간 특히 종교계에서 맡아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이들을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대해서 국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2년여가 지나는 시점인 요즘은 요란한 선전과는 달리 아주 힘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과도 인연을 맺고 계신 분이시죠. 시흥 대각사 주지 원돈스님 모시고 말씀 듣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 이 시간에는 시흥 대각사 주지이신 원돈스님을 모셨습니다. 원돈스님 안녕하세요.

 

원돈스님 : 네 안녕하세요.

 

김봉래 : 네 반갑습니다. BBS 뉴스와 사람들 듣는 청취자들께 먼저 인사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돈스님 : 네 안녕하세요. 저는 시흥 대각사 주지 원돈입니다. ‘흥부네 책 놀이터’를 정왕동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김봉래 : 네. 스님은 들어보니까 몇 년 전에 저희 불교방송에서 진행하는 <거룩한 만남>, 이웃돕기 프로그램이죠. 거기에 출연하셨다고요. 어떤 인연이죠.

 

원돈스님 : 그 때는 저희가 흥부네 책 놀이터에 오는 아이 중에 오둥이 집이 있어요. 그래서 다자녀고 또 어머니가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아서 (불교방송이) 인터뷰를 오셨어요. 그 가정으로. 그래서 보셨고 저희가 후원금 수령하려는 가족들 같이 법당에서 금액 전달받고 또 지하의 식당에서 짜장면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래서 오늘은 포교 이야기를 좀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은데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대각사와 인연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원돈스님 : 저희 노스님께서 창건하신 절이에요. 그 이전에 설립은 1958년도에 됐지만 저희 노스님은 90년대 말쯤 우리 대각사에 오셔서 중창하시고 또 사숙님께서 불사하셔서 이렇게 사설사암이지만 저희 문중 사찰이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저한테 소임을 맡기셨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스님께서 출가 인연이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해요.

 

원돈스님 :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 저희 은사 스님께서 어린이 법회를 해 주셨거든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그래서 어린이 법회 다니면서 대학생 스님이 어린이 법회를 해주시는데 너무 멋있어서. 비구니 스님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린이 법회 지도법사가 꿈으로 출가를 하게 됐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지금도 어린이들과 늘 가까이하는 일을 하시는 건데 대각사가 아까 말씀하셨듯이 1958년도에 설립이 되셨다 하니까 한 60년 넘었네요. 스님. 그렇다면 우리 대각사가 개원한 지도 60년이 넘었는데 대각사 하면 첫 번째로 이렇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흥부네 책 놀이터’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죠.

 

원돈스님 : 요즘은 그렇죠.

 

김봉래 : 그럼 언제부터 어떤 인연으로 이게 시작이 된 건가요. 스님

 

원돈스님 : 제가 초등학교 때 저희 은사 스님께서 그냥 법당 마루에 간식이랑 책이랑 풍족하게 주시고 동네 아이들 놀게 해주셨던 그런 공간, 늘 법회도 중요하지만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지금 대각사는 산에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오기는 좀 어렵고. 그래서 작게라도 월세를 내서 공간을 아이들 가까이에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처음에 옥탑방에 시작을 했습니다.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 월세, 매달 나가는 지출이 부담이 돼서 제일 저렴한 것으로 하다 보니까 옥탑이어서 또 아이들은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3개월 만에 접고 다시 초등학교 바로 옆으로 이사를 했어요. 10평 남짓. 그래서 그곳은 월세가 한 3배가 됐죠. 한 53만 원짜리 월세를 내서 그 때 지역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지역 분들하고 말씀도 나누고, 회의에 참석도 하고 그러면서 저도 놀랐어요. 우리 어릴 때보다도 더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다니고 있더라고요. 아침을 우리는 없는 반찬이라도 부모님하고 같이 아침상에 같이 앉아서 먹고 학교를 갔는데, 지금은 부모님들이 3교대 근무 이런 것을 하니까 새벽에 퇴근하시거나 또 새벽에 출근하시거나 그러면 아침을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김봉래 : 맞벌이 부부도 그렇고요.

 

원돈스님 : 그래서 그 지역 분들이 아침이 제일 시급하다, 책보다도 아침이 시급하다는 말씀을 주셔서 제가 그냥 이름은 ‘흥부네 책 놀이터’로 했지만 내용은 아이들 먹거리를 우선 챙기는 것으로. 그래서 아침 식사를 그 때부터 하게 됐죠. 그렇게 해서 지금은 봉사자들도 많이 오시고 아이들도 점점 늘고 그래서 세 번째 지금 공간으로 이사를 해서 월세가 부담이 되지만 그래도 더 많은 아이들이 아침을 먹고 좀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지금 장소로 코로나 전에 이사하게 됐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그런데 그러면 코로나가 생기면서는 좀 변화가 있었겠습니다.

 

원돈스님 : 네. 저희도 이제 막 아이들한테 좀 더 많은 걸 해주고 싶고 계획을 세우고 코로나 그 전 해 8월에 재오픈을 했거든요. 그런데 한 6, 7개월 운영하고 코로나가 바로 왔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이대로 문을 닫을 수는 없고 그 때부터 도시락으로 저희가 하루 한 끼, 아이들 학교도 안 가고 그랬으니까 점심에 도시락을 저희가 준비해서, 저희는 갖다 주지는 않고 아이들이 그 때라도 밖에 나오고 아이들 안부도 서로 묻고 그러려고 도시락을 어제 도시락 가지고 오고 오늘 새 도시락 받아가는 식으로 해서 이제 도시락으로 저희도 한 3년 그렇게 지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지금은 다시 또 정상 회복이 됐겠군요.

 

원돈스님 : 네네 정상 회복이 됐죠.

 

김봉래 : 어쨌든 스님께서 어린 시절 동네 사찰에서 스님께서 이렇게 직접 편한 공간을 내주시고 해줬기 때문에 그것을 이제는 이렇게 은혜를 후배들에게 갚는 그런 상황이 됐군요.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 자원봉사 얘기도 했고 어린이 수도 늘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흥부네 책 놀이터가 어쨌든 좋은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스님은 어떻게 보세요.

 

원돈스님 : 저도 처음에는 (봉사자들께) 아침 7시부터 나와서 음식을 해주세요라고 부탁을 하기가 저도 상당히 어렵더라고요. 절에 와서 법회 전에 봉사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불자님들도 익숙하신데. 그래서 제가 저랑 또 옆에 베트남 식품점 하시는 분을 아르바이트로 썼어요. 그래서 그분을 주 5일 근무하시고 제가 같이 요리를 해서 하다가 이제 불자님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요일을 채워주시고 그 분을 주 5일에서 4일, 3일 이렇게 줄여서 지금은 모든 요일에 불자님들 봉사자들이 함께하고 계시죠. 그래서 불자님들뿐만 아니라 불자님들이 종교가 다른 친구를 데리고 오기도 하고 절이 아니고 봉사하는 곳이니까 좀 편하게 권해서 함께 오시고 또 좋은 마음 내주시고 그렇게 하십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어떻게 보면 우리 주지 스님께서 원력을 가지시고 열심히 해주시니까 또 주위에 좋은 분들이 모이는 것 아닌가, 좋은 인연이 형성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네요. 요즘에 다들 초중등학교를 비롯해서 젊은이 포교가 어렵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어린이들과 친하면서 누구보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스님으로서 뭔가 어떤 활로를 개척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노하우가 있을까요.

 

원돈스님 : 글쎄요. 제가 생각하는 포교는 절에 오는 숫자로 평가하는 게 아니고 정말 불교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또 부처님 말씀을 한마디라도 실천을 잘하는 그런 게 정말 포교고 또 그런 영향을 받아서 주변이 밝아지면 그게 전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전에는 법당에 오시는 분들만을 상대했고, 또 그 분들하고 교리 공부하고 경전 공부하고 하는 것을 스님의 역할로 제한지었는데, 이제는 오시는 분들, 저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오죽하면 못 올까. 그래서 와야 되는 곳이 아니라 그냥 돌아보면 있는, 옆에 돌아보면 있는 그런 스님이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도울 수 있으면 돕고 또 내가 돕는다고 하지만 그들이 정말 감사하는 마음 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또 힘을 얻잖아요.

 

김봉래 : 그렇죠. 스님.

 

원돈스님 : 종교인으로서 보람도 있고. 그런 것이 서로 간에 상생하는. 포교를 전법이라고 이렇게 너무 어렵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아주 작은 것을 나누면서. 절에 오는 숫자로 저는 포교를 그렇게 갈음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스님. 아주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를 얘기를 해 주신 것 같아요. 어떤 양적인 팽창이 아니라 정말 질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세계관이 변하고 그럼으로써 행이 변하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거니까요. 스님 말씀 중에 찾아오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으로서 역할을 한정하다가 그게 아니구나를 깨달으시면서 조금 더 바깥으로 적극 나서게 되었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세월호 때도 여러 가지 좀 아픔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원돈스님 : 제가 시흥에 오고 그 다음 해에, 바로 가까운 안산의 단원고가 있잖아요. 세월호 그 사고가 나면서 제가 혹시 저도 좁은 소견에 우리 신도님이 또 이런 일을 겪었으면 어쩌나 그래서 전체 문자를 드렸어요. 그 때 제 생각으로는 아 다행이다 싶게 절에 오시는 신도님 중에는 안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상황에 내가 가만히 있기는 뭐라도 도움이 되는 것을 하고자 했는데 어떤 연결고리가 없어서. 그런데 한 번 절에 다녀가신 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신도님이 데리고 왔었는데, 그 집 아이가 수학여행을 갔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연락처를 받아서 초파일 전에 진도를 갔었죠. 가서 그 분을 어렵게 어렵게. 그 분이 누굴 만나고 싶겠어요. 절에 한 번 갔었는데 스님이 왔다한들 아이가 지금 생사를 모르는데, 그래서 너무너무 경직된 표정으로 겨우 저를 만나셨는데, 그래도 저도 해줄 말이 없고 너무 큰 사고고 그래서 손만 잡아드리고 기도하겠다고 하고 올라왔는데, 그 아이가 또 바로 올라온 거예요. 초하루 초이틀, 초파일 날 저희가 초재를 지냈으니까 초이튿날 아마 올라온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때는 에어 보트에 있을 가능성, 여러 가지 생존 가능성 때문에 부모님들이 초기에 올라오는 건 싫어하셨어요. 그런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안 올라오면 기대를 할 수 있는 그런 기간에 아이가 빨리 올라온 거죠. 그러니까 어머니가 너무너무 속상해 하셨는데, 지나고 보니까 얼른 그렇게 시신이라도 인양된 게 감사한 상황이 됐고, 그 인연으로 또 안산으로 계속 올라오는 아이들은 대각사에서 49재를 함께 하고 그렇게 했죠.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도 그 분들과는 인연이 이어지고 있겠습니다.

 

원돈스님 : 저희가 지난 4월 16일에 세월호 9주기 추모제를 했고요, 또 오늘이 마침 수요일인데 수요일마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황지현 부모님이 저희 흥부네 아이들 아침밥을 챙겨주고 계세요. 

 

김봉래 : 자원봉사 하시고요. 

 

원돈스님 : 그 아이가 무남독녀인데 어머니께서 기초교육도 저한테 받으시고 법명도 받으시고 그리고 봉사하실 마음을 내셔서 매주 수요일 그렇게 봉사를 하고 계세요.

 

김봉래 : 옛 인연을 이어서 또 새 인연을 이어가듯이 좋은 인연들을 맺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시흥 대각사 주지 원돈스님 모시고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네. 스님, 아프카니스탄 특별기여자들 이런 분들과도 인연을 맺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돈스님 : 네. 저희 흥부네를 통해서죠. 특별기를 통해서 국내에 오시게 됐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서 제가 접했는데 그 분들이 우리나라 어딘가에 정착하시겠구나 하고 잊고 살았었는데요, 작년 2월쯤에 그 분들이 단체생활을 마치시고 한국 적응 수업을 마치시고 원하는 지역으로 거주지를 정해서 오셨어요. 그 중에 한 세대가 시흥에 그것도 마침 우리 흥부네랑 한 200미터 거리로 이사를 오셔가지고 지역 분들이 또 그 집 아이가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인데 그 아이를 흥부네로 안내를 하셔서 그래서 인연이 됐죠.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그 분들 상황이 이렇게 정부에서 홍보하는 것과는 달리 굉장히 상황이 좀 어렵다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원돈스님 : 정부에서도 또 할 만큼 하셨겠지만 실제 그 분들이 정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이국에 넘어오신 게 아니잖아요.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 가족이 이렇게 왔는데, 가장도 그렇고 아기 엄마도 그렇고 아이 넷 다 너무너무 아프간에서는 그래도 엘리트 가정이라 마당 넓은 집에서 사시다가 시흥에서는 1.5룸 이렇게 좁은 집에서 곰팡이 나고 하는 집에서 월세로 사셨어요. 그러다가 또 LH 매입 임대 수원 쪽으로 작년 10월에 이사를 가셨는데, 주거는 좋아졌지만 살아가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아이들 초등학교에서 또 유치원에서 또 아주 작게는 가까운 병원에 정기 예방접종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우리 한국 부모들은 주변에 서로 대화가 통하고 그런 정보 교환이 되는데 이 분들은 그게 어려우시니까. 그래서 시흥에서부터 제가 병원을 아이들 데리고 다니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것을 제가 먼저 묻는 거예요. 아이 예방접종은 어떻게 했는가. 그랬더니 노트를 사진을 찍어 보내면 저희가 봉사 선생님들이 가시고 또 안 되면 제가 가고 그렇게 해서 제가 어제도 다녀왔습니다. 과일이랑 또 여름에 같이 물놀이 가려고 아이들 수영복 준비해서 저녁에 잠깐 다녀왔고 그렇습니다.

 

김봉래 : 이게 지금 정부나 지자체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그런 부분에서 이렇게 민간 또 종교계에서 신경을 써주는 것인데, 이게 다 스님과 신도들의 단합 덕분에 가능한 거 아닙니까.

 

원돈스님 : 그렇죠. 저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고요.

 

김봉래 : 기적 같아요.

 

원돈스님 : 저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수원으로 이사를 가셔서 어떻게 하나, 아직은 자립하기가 너무 어려울 텐데 걱정을 했더니, 수지에 사시는 분이 절에 오시게 돼서 그 분을 연결해 드렸고 또 시흥에 사시지만 시간도 있고 운전도 되시는 또 물론 마음이 제일 중요하죠. 마음을 내시는 분이 또 절에 오셔서 그 분을 연결해서 그 두 분이 매주 그 세대를 방문하고 계세요.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시고 시장에 데려가시고 한국 요리도 가르쳐주시고 그렇게 해서 그 아기 엄마가 첫째, 둘째를 학교, 어린이집 보내놓고 셋째, 넷째랑 집에서 하루 종일 있는 거예요. 낯서니까 어떻게 나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 봉사자분이 불자님이 말벗도 돼주고 살림도 가르쳐주고 그런 것을 해주시니까 그게 흥부네에 또 다른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좋은 역할인 거예요. 너무너무 감사하죠. 봉사 선생님들 없었으면 저는 못합니다.

 

김봉래 : 뭐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다마는 이런 특별기여자들을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한 전법의 한 부분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 종단에서 전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게 단순히 어떤 불교 신자만 늘리는 것이 근본 취지는 아니고 정말 불교가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잘하자 그런 얘기, 그런 면에서 에피소드 같은 것이 좀 있으신가요.

 

원돈스님 : 제가 이 세대를 너무 잘 알다 보니까 어느 날 그 아기 엄마한테는 예쁜 구두를 하나 사줄까 또 아기 아빠는 운동화가 닳지 않았을까 해서 제가 인터넷 검색해서 아기 엄마한테 고르라고 하고 아기 아빠한테 고르라고 하고 사진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아기 엄마가 너무 좋아하면서 사이즈만 얘기해줬고 아기 아빠는 스님, 저 지금 신발 사러 나가는 길이에요. 이 신발이 마음에 들어요. 그러면서 집으로 가겠습니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너무. 서로 우리는 이제 대화는 잘 안 되니까 문자로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분한테 그랬죠. 당신의 신이 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도 저는 늘 스님을 통해서 신이 저와 함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김봉래 : 진짜 말이 안 나오네요. 정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렇게 통한다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마음인데,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 또 불교의 가르침인 연기 이런 것들하고 다 통하는 것 같아요. 스님.

 

원돈스님 : 그렇죠. 이제 우리 용어로 접근할 게 아니라 불교는 이름이 불교지 테두리를 가늠할 수 없는 거잖아요. 불교는 전체를 뛰어넘는 거잖아요. 무한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용어가 불편하다면 그들의 용어를 사용해주면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김봉래 : 그런 면에서 이렇게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 조금 더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하고 제대로 잘 살아나갈 때 그 분들에게도 물론 좋지만 우리 전체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원돈스님 : 그럼요. 건강한 사회가 되는 거죠.

 

김봉래 : 그런데 사실 그런 어떤 가능성을 지금 우리 스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 같아요.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 통할 수 있는, 아니 이미 통하고 있는 그 지점이 보이는 것 같아서 제가 너무 지금 반갑습니다. 스님.

 

원돈스님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봉래 : 앞으로도 어려움이 많으시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적극 현장에 이렇게 함께하는 그런 스님의 모습 기대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진정한 전법이고 포교가 아닐까. 해서 어떻게 보면 다른 지역에서도 벤치마킹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스님 하시면서 어려운 점도 고비고비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런 부분들을 어떻게 잘 넘어오셨는지 극복하셨는지 궁금해요.

 

원돈스님 : 저도 사람이라 아침에 새벽 예불하고 좀 더 자고 싶고, 처음에는 내가 하면 되지 이랬다가 이게 세월이 5년, 6년, 지금 9년 차 되니까 저도 오십을 훌쩍 넘고 그러니까 몸이 그럴 때 조금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저한테 힘이 되는 건 아이들의 웃음이죠. 아이들의 웃음이고.

 

김봉래 : 아이들의 그 해맑은 웃음.

 

원돈스님 : 그럼요. 제가 아침에 만나면 달려와서 매달리고, ‘오늘은 뭐해요?’ 이렇게 물어보고 또 아침 학교 가면서는 ‘오후 간식은 뭐예요?’ 이렇게 다 써붙여 놓는데도 스님한테 꼭. 이제 말을 걸고 싶은 거죠. 대답해 주고. 또 아이들이 저한테 며칠 전에는 ‘스님, 소고기 먹고 싶어요’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래? 그러면 상추쌈에 소고기 먹을까?’ 그랬더니, ‘아니요 기름장에 찍어 먹고 싶어요’ 이러는 거예요. 저희는 신도님이 정육점 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 분한테 준비해서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는 신도님들한테 부탁하는 것도 당당하고 또 아이들이 저한테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해주는 것도 너무 좋아요. 누군가한테 우리는 제일 편한 사람한테 뭐 먹고 싶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김봉래 : 의지처가 되어 준다 것은 행복한 거죠.

 

원돈스님 : 집에서 엄마한테 또 아빠한테, 아빠 오늘 나 뭐 먹고 싶어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뭐 소고기라는 것을 아직은 형편이 우리 지역이 집에서 그렇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보니 그래도 이 아이들 마음속에는 스님은 들어줄 것 같은 그런 게 저는 너무 좋은 거예요.

 

김봉래 :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네요.

 

원돈스님 : 그래서 행복하게 그 주문을 받아서 금요일 날 아침에 소고기 구이를 해줍니다.

 

김봉래 : 스님에게 있어서 출가란 어떤 것입니까.

 

원돈스님 : 외향의 나는 바뀌었지만 좀 더 가까이 부처님께 다가가는 것이고 원래의 나를 찾는 것, 본래 그 순수한 나를 찾는 것이 출가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그런 길에 용감하게 도전한 우리 원돈스님을 저희가 적극 응원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출가자 수가 줄고 신도수가 준다고 말은 하지만 이렇게 질적으로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이 있다 하는 것을 오늘 방송을 통해서 제가 좀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원돈스님 : 감사합니다.

 

김봉래 : 그 동안 출가 이후에 여러 가지 교육제도에 의해서 공부도 하시고 수행도 하시고 포교도 해왔단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 가지 소회도 있으시겠어요.

 

원돈스님 :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교회에 가는 건 극구 반대하셨어요. 그래서 어른 말을 잘 들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었어서, 그러면 절에는 가도 되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린이 법회를 하신다고 그래서 거기에 갔고 또 반야심경을 1등으로 외웠고 선물도 받았고 그렇게 칭찬을 받으니까 제가 고래가 돼서 춤을 췄잖아요. 그래서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중학생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제가 어린이법회 회장도 하고. 그러면서 아 스님이 돼야 되겠다. 어린이법회 지도법사 스님이 진짜 멋있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제가 출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래서 출가를 해서 동국대를 졸업하고 2000년도까지 어린이 법회 지도법사를 했는데, 그렇게 해서 법회만 할 것이 아니라 불교를 알아갈수록 자기 수행이 중요한 거잖아요. 그래서 더 이상 쏟을 것이 없다. 그래서 그 때 선방을 가게 됐고, 참선을 하다가 보니 강원 안 나온 이력이 저한테 많이 신경 쓰이는 부분이길래 청암사를 늦게 강원을 졸업하게 됐어요. 그렇게 해서 청암사도 졸업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40이 훌쩍 넘어서 이제 진짜 내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할 일은 무엇인가 이 고민을 하다가 수행은 내 몫이다. 수행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가 하는 것이고 정말 시은을 갚으려면 정말 내가 출가한 의미를 회향하고 가야 된다. 이런 마음이 있어서, 그러면 내가 잘하는 게 뭔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가, 저는 이제 다시 어린이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시흥에서 어린이 포교를 해야되겠다 마음 먹었고 아이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또 불자라는 그런 선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다가가서 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불교랑 좀 더 어릴 적부터 가까워지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면 아이들이 자라서도 정말 힘들 때 가까운 절 법당에 가서 또 스님하고 한 말씀 나누는 그런 자연스러운 인연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봉래 : 그래요. 이런 스님의 노력들 덕분에 정말 전법 포교가 더 잘 될 것 같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청취자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혹시 계실까요.

 

원돈스님 : 가까운 데 가서 봉사 많이 하세요.

 

김봉래 : 봉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아주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오늘 마무리할 시간인데요, 우리 원돈 스님의 향후 원력,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원돈스님 :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5학년 때에 발심을 했고 또 90년대에 제가 동국대학교를 다니면서 어린이 법회를 했는데, 그 어린이 법회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저희 흥부네의 후원자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함께하고 있는 우리 흥부네 아이들이 잘 자라서 그 지역의 그늘진 곳을 잘 살피는 그런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그런 원력이 있습니다. 그 때도 저는 또 이곳에서 흥부네 아이들과 잘 놀고 있겠죠.

 

김봉래 : 어린이 포교에 끝까지 진력하겠다는 말씀 주셨습니다. 원돈스님 오늘 멀리서 와주셨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원돈스님 : 감사합니다.

 

김봉래 : 여러분 원돈스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저는 스님 말씀 들으면서요. 이런 글귀가 생각이 났습니다. “문아명자면삼도 견아형자득해탈”.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삼도를 면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해탈을 얻기를 바란다 하는 행선축원의 얘기입니다. 우리 스님들께서 인천의 사표가 되시죠. 그래서 스님의 행이 이 사회에 모범이 되고, 그대로 이 사회를 맑혀나가는 근본이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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