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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사진왼쪽)이 BBS 뉴스파노라마 삼일절 특집방송에 출연해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정신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사진왼쪽)이 BBS 뉴스파노라마 삼일절 특집방송에 출연해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정신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앵커: 배재수 보도국 사회부장
■ 출연: 민성진(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 프로그램: BBS뉴스파노라마 [삼일절 기획]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정신과 삶

 

< 앵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배재수입니다. BBS 뉴스파노라마 3월 1일 수요일 순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제 104주년 3.1절입니다. 

3.1절은 일본 식민통치에 항거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 의사를 세계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인데요,

3.1절을 맞아 자신의 청춘과 인생을 독립운동에 기꺼이 바쳤던 옛 선조들을 추모하고 3.1절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으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스님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좌우 통합에 앞장섰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던 우남 김성숙 선생에 대해 조명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잠시 전하는 말씀 듣고 사단법인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과 함께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정신과 삶에 대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배재수 앵커]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3.1절을 맞아 특집으로 스님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사실 저희가 방송 준비를 하면서 주변 지인들로부터 지난 1년간 뉴스 말미에 소개해드렸던 연중 캠페인 때문에 운암 김성숙 선생에 대해 알게 됐다는 말씀 참 많이 들었는데요.

스님 출신의 뛰어난 항일 독립투사였지만 우리 후손들은 운암 김성숙 선생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일에 너무 소홀했던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3.1절 특집으로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정신과 삶’에 대한 이야기 관련 전문가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계신 민성진 회장님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 주셨습니다. 민성진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민성진 회장]

네, 안녕하세요.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 회장 민성진입니다. 불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배재수 앵커]

오늘이 제 104주년 3.1절입니다. 회장님께서는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 오랫동안 몸 담으셨던 만큼 오늘이 갖는 의미 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먼저 3.1절 의미에 대해서 좀 짚어주시겠습니까?

[민성진 회장]

3.1절은 지난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일제 압박에 항거해서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날입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날을 국경일로 정했으며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오늘을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이날은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며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과 애국 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과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회 회원 유족들은 별도로 탑골공원에 모여 그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께서도 봉선사 스님들과 양주 부평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 되셨습니다.

[배재수 앵커]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오랫동안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어떤 이유로 활동하시게 되셨습니까?

[민성진 회장]

제가 임시정부 관련 책에 이제 출판사 보도 자료를 우연히 보게 됐는데, 거기에 이제 운암 선생님이 거론이 되고 접하다 보니 보다 체계적으로 운암 선생을 알리는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배재수 앵커]

그게 언제적이었습니까?

[민성진 회장]

그게 지난 2004년도에 생각을 갖고 2005년도에 법인 설립을 했습니다.

[배재수 앵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서 잠시 저희가 준비한 운암 김성숙 선생의 행장 짧게 듣고 오겠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916년 경기도 양평 용문사로 출가해 태허 스님으로 봉선사에 주석하며 한용운 스님과 손병희 김범린과 교류했고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운동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스님은 일제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창일당과 의열단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신민당 창당 주역으로 활동하며 재야 활동을 했지만 혁신 인사로 찍혀 옥고를 치렀고 결국 천구백육십구 년 4월 12일 서울 구의동 소재 ‘피우정’에서 서거했습니다. 정부는 1982년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2004년 선생의 유해를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에 안장했습니다.”

네, 정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들으셨습니다. 운암 선생의 이력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스님 출신이라는 부분인 것 같은데요, 운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민성진 회장]

지난 1919년 봄에 운암 선생은 18세 나이에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을 나와 열차 편으로 만주 봉천으로 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기서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 신원 스님을 만나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로 출가하게 되셨습니다.

[배재수 앵커]

일제 치하 시절에 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서 이제 출가하시게 되셨군요. 운암 김성숙 선생 태허스님이라고 이제 불교에 귀의하셨는데 경기도 양평 용문사로 출가하셨고 남양주 봉선사에서 수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은사였던 월초스님 저희는 이제 동국대학교 초대 설립자로도 알고 있는데요. 월초스님 어떤 분이셨고, 운암 선생께 어떤 영향을 끼쳤던 분이셨습니까?

[민성진 회장]

월초 스님은 1892년 남한총섭, 1893년 북한총섭으로 전국 승군을 총괄하셨던 분으로, 1894년 갑오경장 때 승군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스님이 마지막 총섭이셨던 분이십니다. 1900년에는 은평구의 수국사를 대규모로 중창하셨고 이후 화계사에 머물면서 개화사상과 신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싹 튀었으며 제례 불교를 탈피하고 일본에 발달된 포교 방식을 받아들여 한국 불교를 혁신시켜 근대화하신 분입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명진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1906년 봉선사의 교정 판사가 된 후 줄곧 봉선사에 머물며 1926년까지 꾸준히 가람을 중수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한국 근대불교의 선각자이자 당대 제일의 강백으로서 태허스님, 운허스님, 만허스님, 능허스님, 명허스님 등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배재수 앵커]

네, 사실 이제 민 회장님께서는 운암 김성숙 선생의 외손자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 운암 선생님께서는 출가 전에 한 차례 결혼을 하셨던 거죠? 그리고 이제 은사이신 월초스님께서 운암 선생의 중국 유학을 도우면서 당시에 국내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위해서 수국사 땅을 경작하게 도와줬다 이런 이야기가 있던데요. 이 부분도 좀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민성진 회장]

운암 선생은 저희 외할머니와 결혼 후 용문사로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월초스님께서 가족들을 수국사 땅을 경작하여 살 수 있도록 하셨고 가족들이 경기도 고양시 능곡 쪽에 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월초 스님의 도움으로 이제 운암 선생님께서 봉선사에서 수행하시다가 또 갑자기 중국 베이징 유학길에 오르시지 않습니까?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또 중국에서는 김충창이라는 이름의 독립운동가로 분해서 왕성한 활동을 하신 걸로 제가 들었는데요, 당시의 활약상도 좀 소개해 주시죠?

[민성진 회장]

풍곡신원선사의 뜻에 따라 용문사로 출가하신 후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봉선사 월초스님 수하로 들어가셨는데요. 이때 독립운동을 하다 오신 운허스님과 함께 봉선사에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월초스님께서 태허스님은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는 중국으로 가서 조국 독립에 큰일을 하고, 운허스님은 학교를 설립하고 후학을 가리키며 독립운동을 하라고 말씀하셔서 태허스님은 중국으로 망명하셨던 것입니다. 
중국 민국 대학으로 가 의열단에 가입 글쓰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혁명 기관지 발행, 의열단 강령 수정 등 의열단 선전부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을 전개하셨고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반역사’라는 비밀결사 활동을 하면서 광저우 중산대로 피신하여 법학과에 입학 의열단 활동을 이어갔고 여러 조직들을 결성하여 중국 내 학생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김충창이란 이름은 운암 선생의 제자격인 그 김산 선생이 님웨일스의 아리랑에 수록된 글 중에 운암 선생을 김충창으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장으로 표기를 한 것입니다.

[배재수 앵커]

님웨일스의 아리랑에 얘기가 나오는군요. 중국에서 이제 활동을 하시면서 우리나라로는 유관순 열사의 비유되는 중국 독립운동가이자 인텔리 여성 두준훼이라는 분과 결혼을 또 하셨는데요, 두준훼이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요원으로도 활동하셨던 분이었고 또 지난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두 분의 인연,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셨고 두 분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이 부분도 좀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민성진 회장]

두 분의 인연은 광저우 중산대로 피신했던 시절에 중산대 학생이었던 두준훼이 여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면서 사랑이 싹텄고 이때 둘을 소개했던 친구가 중국 국가부주석 주은래의 부인이었습니다. 주은래의 부인과는 두진훼이 선생이 굉장히 친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이런 인연으로 중국의 상류층과 교류를 했고 1930년대 초 중국 내 독립운동이 암울했던 시기 상해의 좌련 작가들과 교류하며 저작 활동을 통해 동지들을 돕고 이때의 인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면서 국적을 초월한 혁명과 사랑으로 한중우의의 대명사가 되고 있습니다. 두준훼이 여사는 여성 엘리트 운동 혁명가로서 중국 부녀자 운동 이론의 선구자로 중국의 어린아이와 여성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입니다. 

[배재수 앵커]

두 분은 독립혁명에 있어서도 동지였고, 또 사랑으로도 동지를 이뤘던 분이셨군요. 두준훼이 여사와 결혼한 뒤에 상하이로 이동을 해서 삼형제의 아버지로도 행복한 시절을 보내셨다 이런 기록도 제가 봤는데요, 혹시 중국에 남아 있는 유족들과 연락이 되십니까?

[민성진 회장]

네, 저희가 2005년도에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기 전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둘째 아들인 두 건, 셋째 아들인 두현을 만나서 기념사업회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많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의 새 아드님 중 첫째는 광동악단 출신으로 지난 2021년 9월에 타계하셨고 중국미술협회 이사를 역임한 둘째 두건 그리고 국가계획발전위원회 산하 중국 신식 중심의 부주임 출신의 셋째 두련 삼촌이 살아계시고 연락은 주로 첫째 삼촌의 아들인 피아니스트 두닝우와 자주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아드님들이 이제 주로 음악과 미술 쪽에, 문화 쪽에 많은 조예가 깊으셨군요. 1945년 8월에 이제 일본이 패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해방이 되면서 우남 선생님께서도 국내에 들어오시게 되는데요, 이후에 이제 어쩌면 편한 삶을 사실 수도 있었는데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통일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셨죠?

[민성진 회장]

해방 이후에 이승만 독재 정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을 하셨는데요.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요,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 이후 정당을 창당하려고 운암 선생을 회유한 사실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박 대통령이 돈도 주고 권력도 주겠다. 같이 정당 활동을 하자고 회유를 했는데 거절하셨고 재차 박 대통령은 독립운동하셨으니 훈장도 주겠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운암 선생께서는 독립운동을 훈장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훈장을 받아도 친일파한테 받기 싫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일제와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분으로서 당연한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배재수 앵커]

일제 치하에는 이제 독립 운동가로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과 민주화 운동가로서 이제 헌신하셨는데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혁신 인사로 찍혀서 잇따른 투옥을 당하면서 좀 갖은 고초도 겪으셨죠?

[민성진 회장]

할아버지께서 독립과 민주화의 격동기를 다 겪으신 유일한 분으로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가지셨던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불교 쪽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우선 최대 목표는 통일이고 좌우 이념 싸움은 조국이 통일된 이후에 하는 게 맞다고 늘 말씀하시고 개인의 영달보다는 항상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셨고,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모든 정권에서 다섯 번이나 투옥되는 불운을 겪으셨습니다. 

[배재수 앵커]

다섯 번이나 투옥 되셨군요. 운암 선생님은 말년에 함께했던 동지들이 지어준 서울 구의동 소재 ‘피우정’에서 1969년 4월 12일 당시 71살의 춘추로 이승의 끈을 내려놓으셨는데요. 장례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민 회장님께서도 장례에 참석하셨다고 얼핏 들었는데요, 아마도 마지막까지 불교계와의 인연을 중히 여기셨던 게 아닌가 싶은데 어떻습니까?

[민성진 회장]

할아버님께서는 중국 망명 시절에도 가슴에 도첩을 가지고 다니셨을 만큼 당신의 모든 가치관을 지배하셨던 것은 불교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장례식을 위해 봉선사 운허스님께서 조계사 주지 스님과 협의해서 장소도 정하고 장례 일정도 잡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배재수 앵커]

그렇군요. 이제는 이제 시대적 불운으로 한 많은 삶을 사셨던 운암 김성숙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사업도 중요한 시기인데요. 다양한 선양 사업을 하고 계신데 지난해에는 ‘운암 로드 탐방 행사’도 있었고요, UCC 공모전이나 웹툰 연재 이런 부분도 하셨죠?

[민성진 회장]

어려운 시대 특히 코로나 이후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최근 서울 한복판의 호텔에서 일왕 생일이라고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를 향해 대한민국 해군이 경례를 하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이제 친일청산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 선양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청소년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프로그램으로 기념사업의 사업 방향을 정했습니다.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운암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업적을 국민께 널리 알리기 위해 추모제 UCC 공모전, 용문사 봉선사의 운암 선생 흔적 찾기인 운암 로드 탐방 총서 발간, 북 콘서트 등 다양한 선양 행사가 개최될 예정이니 불자들께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특히 작년에 제작한 웹툰 ‘우단사련’에 이어 올해도 불교 웹툰을 제작합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이 수행하시던 봉선사의 독립운동가 스님들을 주인공으로 18화 정도 예정하고 있는데요. 네 거기에는 봉선사에 태허스님, 운허스님 특히 부평리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셨던 봉선사 스님들, 독립운동의 산실이 봉선사라는 것을 국민들께 알리려고 국비를 받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올해 불교 웹툰 제작하신다고 하셨는데 언제쯤 저희가 볼 수 있을까요?

[민성진 회장]

지금 시나리오하고 작가들이 그리기 시작하면 11월 정도에는 책으로 또 공공도서관에 배포를 하고 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이 불교 웹툰 관련해서 용문사 스님들과 봉선사 스님들과 많이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알겠습니다. 지난해 6월이었죠. 한중 학술 심포지엄도 여셨던데요, 운암 김성숙 선생이 중국에서 발간한 저서와 신문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그런 자리이기도 했었죠?

[민성진 회장]

운암 선생이 발행인과 편집자였던 혁명잡지 원본을 발견을 했고, 일본 경제사론, 변증법전정, 중국학생운동사 등 3권이 실제로 출판된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특히 변증법전정은 중국에서도 11판 이상 인쇄될 만큼 많이 읽혀졌던 저서로 학자들은 이를 번역한 김성숙은 20세기 중국에서 활동했던 지식인 중에 최고라고 평가했습니다. 

[배재수 앵커]

그리고요 또 다른 선양 사업으로 운암 김성숙 기념관과 또 중국 중산대학의 김성숙 두준훼이 기념관 설립하는 게 또 있고 말년을 보내셨던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피우정 복원 사업도 추진하고 계신데 지금까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습니까?

[민성진 회장]

지금 2012년에 현 시장이신 오세훈 서울시장께서 이제 기념관 부지를 정해주셨는데 기념관 그동안 부지가 주신 부지가 도시자연공원으로서 시설률이 20% 밖에 안 돼서 건립을 못 했거든요. 이미 부지는 강동구청이 19.6%를 사용하고 있었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제 건립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지난 2020년 6월 19일자로 도시자연공원이 근린공원으로 변경이 되면서 시설률이 40%로 높아져서 이제는 기념관 건립이 가능해져서 작년 11월 3일 강동구청장과 협의하여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운암 김성숙 기념관이 건립이 되면 피우정 중국 두준훼이.김성숙 기념관 등 이제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배재수 앵커]

원만하게 사업이 진행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처럼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고 또 국민과 공유하는 일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이와 관련해서 향후 어떤 노력을 하실지 이 부분도 좀 들려주시죠?

[민성진 회장]

지난 2005년도에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조금씩 운암 선생을 대중에게 알려왔던 것처럼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제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요청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특히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들 웹툰을 하나로 모으고 초등학교 학생부터 쉽게 독립운동가를 기억할 수 있도록 지역별로 나눠 독립운동가 웹툰을 제작하여 독립운동가 웹툰 전용 플랫폼인 독립 닷컴에 게시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현재 경기도랑 협의를 해서 경기도 지역의 독립운동가 10분을 경기도 예산으로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제작하는 것으로 지금 협의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경기도뿐만이 아니고 나아가서는 광주, 강원도 전국 지자체장들하고 협의를 해서 그 지역의 독립운동가 선양 사업에 지자체장들이 앞장설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배재수 앵커]

아주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운암 선생께서는 이제 평소 자유롭고 행복한 새 국가를 위해서 분투하자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던 걸로 제가 들었는데요, 선생님께서 바라시던 조국 어떤 조국이었을까요?

[민성진 회장]

운암 선생께서 말씀하신 조국은 우선 통일이 우선이고 사상과 이념의 대립에 휩쓸리지 않고 좌우가 통합된 하나의 대한민국이 되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나의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평생 꿈꾸셨던 것 같습니다. 

[배재수 앵커]

얘기 나누다 보니까 벌써 시간이 다 돼서요. 마지막으로 오늘 못 다하신 이야기라든가 청취자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 주시죠.

[민성진 회장]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독립운동가 선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일본 천왕 생일에 기미가요가 흘러나오는 비정상적인 현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개탄스럽지만 비정상은 반드시 바로 잡아갈 것이니 어려운 시기에 불자 여러분들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배재수 앵커]

말씀 여기까지 듣고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님과 함께 ‘운암 김성숙 선생의 독립 정신과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 앵커 >

3.1절을 맞아 일제의 갖은 압박에도 생애 마지막까지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던 많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에 우리가 있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3.1절 특집으로 우남 김성숙 선생의 독립 정신과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는데요. 

하지만 운암 선생을 포함한 수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들에게 잊혀진 영웅들로 평가받아 안타깝습니다.

이들 영웅들의 사상과 삶의 궤적이 오늘날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겠습니다. 

3.1절 특집으로 보내드린 BBS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그룹 NRG의 ‘대한건아 만세’ 들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의 배재수였습니다. 

남은 연휴 편히 보내시고요, 오늘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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