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칼 전 역전골을 성공시킨 뒤 포옹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와 황희찬 선수
포르투칼 전 역전골을 성공시킨 뒤 포옹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와 황희찬 선수

 

막장드라마는 비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와 이야기로 꾸며지는게 필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보니 친동생이라던가 신분을 숨긴 회장 아들이 위기에 처한 동료 여직원을 구해준다는 설정으로 시청자의 오감을 사로잡게 됩니다. 욕하면서도 보게될 만큼 재밌으면서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에 흥행을 보장하는 요소입니다.

이런 막장드라마가 스포츠에서 펼쳐졌습니다. 스포츠를 흔히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부릅니다만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우리 대표팀의 각본이 드러났습니다. 애초 조편성에서 파울루 벤투 감독이 모국 포르투칼과 만나는 것부터 흥행 조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구나 16강 진출 여부를 가릴 마지막 대결로 짜여졌습니다. 포르투칼인에게는 마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국군이었던 장동건이 인민군으로 등장하는 장면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릅니다. 경기가 끝난 뒤 포르투칼의 산투스 감독이 우리 대표팀의 세르지우 코스타 수석코치와 대충하는 듯한 악수에서도 서운함이 읽힙니다.

시청자를 막장드라마에 몰입하게 하려면 주인공을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빠트리고 주변인물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합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손흥민 선수가 안와골절로 수술대에 오르고, 벤투 감독과 이강인 선수의 불화설을 증폭시켜 이들의 경기 출전여부를 불투명하게 해 시청자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얄미울 정도로 긴장감 조성 능력이 탁월합니다. 

위기마다 주인공을 구해내는 백마탄 왕자는 짐작하면서도 짜릿한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장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건지도 신기한데 혼자서 여러 명을 손쉽게 처리하는 싸움실력은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가나전에서 후반 교체 투입된 이강인이 바로 그 왕자였습니다. 우루과이전의 활약이 예고편이었다면 가나전에서 보여준 택배크로스와 탈압박, 침투패스, 함성을 유도하는 손짓은 주요 볼거리였습니다. 왕자 계보를 이은 황희찬은 마지막 경기에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신비주의의 끝판왕입니다. 앞선 두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 포르투칼전마저 그의 등장을 포기한 시청자들에게 짜잔하고 나타나 단숨에 16강 진출의 환희를 안긴 것은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아무리 재밌어도 볼거리가 없으면 '도로묵'입니다. 외모는 막장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데요. 민낯에도 빛나는 외모는 타고난 것이지만 실력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한국 등번호 9번 누구냐"는 세계인들의 궁금증은 우리에게 자부심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한민국 월드컵 한 경기 두 골의 첫 기록을 써낸 조규성은 신인치고 큰 무대에 대한 두려움없이 맹활약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선수'가 이 정도니 우리 축구계에 발굴하지 못한 은둔 고수가 얼마나 많을 지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움은 반전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벤치가 아닌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 벤투 감독의 처지는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더구나 부당한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징계를 받은거라 억울함을 자아냈습니다. 드라마에서 성실한 직장 상사가 모함을 받아 퇴사를 하는 장면에서 느끼는 울컥함이랄까요. 작전지시는 커녕 코치진·선수들과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데다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자리에 앉지 못하고 안절부절한 모습은 축구팬들을 짠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관중석에서 내려와 코스타 코치와 한참을 부둥켜 안은 채 가만히 있던 장면에서는 지도자의 책임과 고뇌를 엿볼 수 있었죠. "벤투 감독님의 마지막 경기를 벤치에서 같이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드린다"는 손흥민의 인터뷰에서 벤투에 대한 신뢰감이 느껴집니다.

 

예고된 각본은 더욱 흥미진진합니다. 만약 '우승 0순위' 브라질을 꺾고, 일본이 지난대회 준우승팀 크로아티아를 물리치면 8강전에서 한일전이 이뤄집니다. 이 과정에서 김민재가 브라질 전에 출전할 지, 손흥민은 마스크를 벗을지, 이강인이 첫 골을 넣을 지 등의 이야기가 준비돼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한 축구팬은 우리 대표팀이 16강에 오르게 해달라고 "부처님과 하나님, 알라신께 빌었다"고 합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스포츠가 되기 위해서는 신 하나로는 어림없을 겁니다. 모든 신의 담합으로 이뤄지는 걸로 봐야겠지요. 이번 월드컵이 카타르에서 열리니까 알라신의 협조도 중요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막장드라마는 우리 일상에서 늘 봅니다. 바로 정치가 막장드라마입니다. '내로남불'의 뻔뻔함을 바탕에 두고 대립과 갈등, 배신, 모함 등으로 시끄럽고 험악한 장면을 종종 연출합니다. 여야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의 언행을 잊어버리고 상대방 탓을 합니다. 욕하면서 보게되는 게 막장드라마지만, 정치는 욕만 남고 시청자는 자꾸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권선징악적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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