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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찬주 작가(사진 왼쪽)가 뉴스파노라마 개천절 특집에 출연해 배재수 앵커와 인터뷰 하고 있다.
소설가 정찬주 작가(사진 왼쪽)가 뉴스파노라마 개천절 특집에 출연해 배재수 앵커와 인터뷰 하고 있다.

■ 앵커: 배재수 보도국 사회부장
■ 출연: 소설가 정찬주 작가
■ 프로그램: BBS뉴스파노라마 [개천절 휴일특집] - 신간 '시간은 없다'와 글쓰기 수행

 

< 앵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배재수입니다. BBS 뉴스파노라마 10월 3일 월요일 순서 시작하겠습니다. 

하루 8시간 닷새간 일하는 주 5일 근로제가 국내에 도입된 지 이제 20년이 다 돼 갑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일주일에 나흘만 일하는 주 4일제 시행 기업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다는데요, 

효율성을 높여 생산성을 향상시키겠다는 건데, 급여를 줄이고 근로시간을 줄였는데도 오히려 매출액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아무렇게나 누리는 '워라벨', 일과 삶의 균형은 과거 휴일도 잊고 일했던 우리 부모 세대들의 긴 노동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데요,
 
우리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개천절 휴일을 맞아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관점에서 진정한 ‘워라벨’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개천절 휴일을 맞아 특집으로 진행되는데요, 복잡한 서울 생활을 접고 21년째 전남 화순에서 창작 활동에만 매진하고 계시는 진정한 워라벨 소설가 정찬주 작가님 모시고 다양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뒤에 정찬주 작가님과 함께 뵙겠습니다.

[배재수 앵커]

뉴스파노라마 오늘은 개천절 휴일을 맞아 특별한 분 모셨습니다. 

만나뵐 분은 소설가 정찬주 작가이신데요, 먼저 정찬주 작가의 약력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정찬주 작가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셨고요,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작가에 데뷔하셨는데요, 이보다 앞서 1980년에는 서울 상명여고에서 국어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이후 출판사 샘터 편집자로 옮겨 오랫동안 무소유 법정 스님의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소설로 ‘굿바이 붓다’와 ‘암자로 가는 길’ ‘소설 무소유’와 ‘이순신의 7년’ ‘산은 산, 물은 물’ 등이 있고요, 한문 번역서로는 ‘굿모닝 관세음보살’이 있습니다. 

수십 편의 소설을 쓰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행원문학상과 동국문학상 등 다양한 문학상도 수상하셨습니다.

현재는 21년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 자락에 있는 ‘이불재(耳佛齋)’에서 신문 연재 등 창작 활동에만 매진하고 계시고요, 최근에는 신간 ‘시간이 없다’를 출간하셨습니다. 

소설가 정찬주 작가님 직접 스튜디오에 나와주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작가님.

[정찬주 작가]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배재수 앵커]

예, 안녕하세요. 앞서 제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 자락 이불재(耳佛齋)에서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계시다 이렇게 소개해 드렸는데 이불재는 배우자이신 도예가 박명숙 씨와 함께 꾸민 집 아니겠습니까? 

[정찬주 작가]

그렇습니다. 

[배재수 앵커]

이불재라는 이름이 “솔바람에 귀를 씻어 불교의 진리를 이루리라” 이런 뜻이던데, 뭔가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정찬주 작가]

그렇습니다. 솔바람에 물소리 바람소리에 귀를 씻어서 부처를 이루겠다 진리를 이루겠다 이런 의미로 제가 그때 상량문에 그렇게 글을 써서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20년 동안 이렇게 살다 보니까 오후에는 손님들이 제법 좀 찾아와요. 그래서 그 손님들의 어떤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이다. 그래서 그 좀 어떤 대승적인 그런 의미로 좀 확장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이다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 왠지 관세음 보살님이 떠오르는.

[정찬주 작가]

네, 관음전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배재수 앵커]

제 기준으로 보면 오랜 서울생활을 접고 어찌 보면 외롭고 불편할 수도 있는 산 중에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건데, 혹시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 궁금하고요, 워라벨 그러니까 일과 삶의 균형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생활은 어떠신지도 궁금합니다.

[정찬주 작가]

그러니까 횟수로는 이제 22년 전이 되겠죠. 그때 이제 제가 49대입니다. 직장에서 이사로 승진하느냐 마느냐 그럴 시기였는데, 

[배재수 앵커]

그때 샘터사?
 
[정찬주 작가]

네, 샘터사에서 제 어떤 청춘의 잔뼈가 굵은 직장이죠. 교편도 잠시 봉직했습니다만 그때 초심으로 돌아가 보니까 내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동국대 국문과를 들어갔지 직장인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들어간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사표를 바로 쓰고 이제 낙향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 저를 아주 따르는 후배 작가가 “나는 제주도로 가서 3년 만에 돌아왔다 너무 불편하더라, 자료가 필요한데도 자료를 쉽게 구할 길도 없고 그러니 선배님도 낙향을 하시려면 용인이나 남양주로 가시는 게 좋겠다” 그런데 저는 그때 그 얘기를 듣고 서울 근교로 낙향하는 것은 왠지 사이비 낙향이라는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청산 깊숙이 내려가자 그래서 남도 산중으로 내려간 거죠. 불편하죠. 그렇지만 제가 선택한 불편함이기 때문에 견딜 만합니다. 그리고 또 서울에서 손님들이 내려오면 첫마디가 그 질문이에요. 외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산중에서 살아가는 힘이 있다면 외로움으로 생각하거든요. 외로움이 살아가는 어떤 힘이 되고 있어요. 외로우니까 자연과 더 가까워지더라고요, 우리 법정스님께서 자연과 멀어지면 병원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외로우니까 미물들하고 이렇게 더 가까워지더라고요, 미물들이 소중하고 그리고 글쓰기는 여기 서울에서 살 때보다 그 글 쓰는 양부터 일단 배가가 됐구요, 그리고 저는 이제 글 쓰는 것 지필이 곳 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부러 자연스럽게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글쓰기 집필과 어떤 삶, 어떤 갈등은 없었습니다. 하나가 됐다고 할까요. 네 그런 느낌을 좀 가지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외로움이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셨고요, 또 우리가 말하는 위기가 기회가 된다는 말처럼 오히려 글쓰기가 더?

[정찬주 작가]

네, 저는 이제 거기서 외로움이 제일 힘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여기 도회지의 후배나 이런 사람들 내려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외로움이 두렵기 때문에 노래방을 가고 또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외로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할 대상이다 이렇게 좀 얘기를 해주고 싶어요.

[배재수 앵커]

외로움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다. 정말 ‘촌철살인’인 것 같습니다. 이제 작품 이야기 좀 해보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그동안 주로 입적하신 뛰어난 선지식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 글을 쓰셨는데요, 최근에 생존해 계신 스님을 주인공으로 작품을 쓰셨더라고요, 바로 신간 ‘시간이 없다’인데요, 저한테도 선물로 주셨는데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서 소설의 개략적인 줄거리와 특징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정찬주 작가]

먼저 제가 지금까지 집필해 온 고승들을 손으로 꼽아보자면 신라시대 때 성덕왕의 아들이었던 신라 왕자로서 중국으로 구화산으로 가서 지장왕 보살이 된 김지장 스님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만해 한용운 스님 그리고 해방 이후로는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성철스님, 혜암스님 그리고 영축산 도인이라 불리었던 경봉스님 그리고 해인사에서 자비보살로 불리던 일타스님 또 제 불가의 스승이신 법정스님 이런 분들을 이제 쭉 소설로서 형상을 했죠. 그런데 이런 분들 한 분을 쓰는데 취재와 집필 기간이 보통 대략 한 5년 걸리거든요, 그러니까 이 일곱분을 쓰다 보니까, 7*5=35, 35년. 

[배재수 앵커]

적어도 35년은?

[정찬주 작가]

적어도 35년이 그냥 흘러가 버렸어요. 그런데 이제 최근에 우리 생전에 계신 수불스님의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이라 한다면, 스님의 출가 전과 출가 후로 크게 대별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출가 전도 꽤 주목을 했습니다. 수불스님의 가력을 보니까, 원래 이북에서 수불스님 선친께서 이렇게 월남하신 분이거든요, 6.25전쟁 때. 그 대대로 천도교 집안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수불스님 선친께서도 충청도 천도교 도령을 지내셨더라고요, 그래서 수불스님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2 때까지 가세가 기울어지기 전까지, 새벽 한 시간 초저녁 한 시간씩 해서 천도교 주문을 외우도록 했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두 시간씩에 외우는 거죠. 그래서 그 주문을 외웠던 게 스님이 나중에 수행자 생활을 하는데 어떤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그걸 제가 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출가 후는 아무래도 스님의 일관된 가풍이신 간화선의 대중화, 세계화 이런 어떤 스님의 어떤 일상을 또 이제 형상화를 했죠.

[배재수 앵커]

수불스님의 개인적 배경이나 사회적 배경 불교적 배경 이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수불스님하면 현재도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 방식인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노력하시는 분이시고요, 또 안국선원 같은 전국 각지의 선원을 세워서 도심 포교 활성화에도 역할이 크신 스님으로 알고 계신데요, 스님의 어떤 면이, 아까 출가 전 부분도 얘기하셨지만, 어떤 면이 책 쓰기로 이어졌을까요?

[정찬주 작가]

선에는 조사선이 있고 간화선이 있고 묵조선이 있거든요, 이 궁극적인 목적은 다 같습니다. 인간 존재의 어떤 실상을 깨닫는 거거든요,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영원히 변해간다는 존재는 어떤 제행무상 또 모든 존재는 공하다. 오온개공,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 공의 어떤 실상을 깨닫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제가 특히 간화선을 주목하는 것은 우리 현대인들 시간에 쫓기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 간화선은 일주일이면 어떤 체험을 해 주게 하거든요, 빠른 사람은 3일 아니면 5일, 7일, 또 7일에도 체험을 못하면 한두 달 쉬었다가 또 7일에 도전하면 틀림없이 체험하거든요. 이런 현대인들한테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한테 최적화된 수행법이 간화선이 아닌가 그래서 제가 이제 간화선에 주목을 했고. 조사선은 우리 스님들한테 좋습니다. 스님들은 일단 의식주가 해결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선방에서 1년이고 2년이고 이렇게 수행하시다가 깨달으면 되는 것이고 또 선방에서 또 인연이 없으면 금생에 또 인연이 없으면 내 생에 또 깨달으면 되거든요. 그래서 조사선은 스님들하고 조금 더 어울리고 간화선은 우리 재가불자들한테 더 어울리는 수행법이 아닌가 그래서 이제 간화선에 주목을 했고 마침 우리 또 수불스님께서 간화선의 어떤 대중화 세계화가 또 스님의 가풍이어서 소설로 형상화했는데 스님의 간화선 도량은 우리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 LA에도 중국 천진에도 있고 뉴질랜드에도 있고, 정말 글자 그대로 세계화에 진력하고 계십니다.

[배재수 앵커]

네 알겠습니다. 책 제목인 ‘시간이 없다’ 이게 평소 수불스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리고 수불 스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시길래 또 이 책이 나왔을까 궁금한데요?

[정찬주 작가]

신간 '시간은 없다'.
신간 '시간은 없다'.

아마 스님께서 제가 알기로는, 시간이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말하자면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신도들이 공부할 시간이 없다 이런 의미도 있고, 또 하나는 이제 스님께서 내가 지도할 시간이 없다 내가 앞으로 몇 해나 더 간화선을 지도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도 드셨겠죠. 그런 의미에서 소찬 법문 때 시간이 없다는 말씀을 좀 자주 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불스님의 어떤 언어의 기호가 있다면 시간이 없다가 아닐까 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였고요, 그리고 스님과 인연은 저는 중국 북경대에서 대학원에서 중국 선학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월암스님하고 인연이 좀 있습니다. 아까 김지장 스님 소설을 제가 발표했다고 하는데, 김지장 스님 소설을 취재하기 위해서 구화산을 같이 여행을 했습니다. 그분이 북경에 계실 때 그래서 인연이 있어서 제가 서울 모 일간지 ‘암자로 가는 길’을 연재할 때 스님이 그때 다녀오셔서 경주 남산 칠불암에 계시더라고요 거기 가서 취재를 한 번 한 적이 있고, 또 어느 날 보니까 벽송사로 주지로 가 계시더라고요, 선원장 겸 주지로 가 계시더라고요, 그 벽송사를 또 한 번 찾아갔죠. 그랬더니 거기서 수불스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벽송사하면 우리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수행했던, 108조사 행화도량이거든요. 그런 유서가 깊은 선도량인데, 절이 너무 퇴락해서 내가 중창을 해야 되겠다 이런 어떤 원을 세우고 있었는데, 수불스님한테, 아마 박사학위 논문을 보강해서 만든 단행본이 ‘간화정로’이였을 거예요. 간화정로, 그 간화정로을 한 권 보내드렸답니다. 그래 같은 문중도 아니고 또 무슨 강원의 선후배 사이도 아니고 그런데 수불스님께서 어느 날 벽송사를 찾아온 거예요. 그 책을 한 번 보고. 찾아왔을 때, 이제 우리 월암스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중창을 하겠다 계획을 좀 말씀하셨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스님께서 좋다. 내가 여기 와보니까 벽송사가 내 전생에 수행했던 도량 같다. 내가 젊은 시절에 꿈을 꿨던 그 모습하고 똑같아 그런 인연도 있고 하니 6개월만 나한테 시간을 더 여기가 중창할 수 있는 거금을 모금해서 가져오겠다. 보내겠다. 그렇게 해서 이제 6개월 하루 만에 거금이 월암스님한테 간 모양이에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이건 수불스님은 보살이구나 정말로 호주머니가 없이 사는 분이구나 그래서 수불스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동대 후배한테 어떻게 연락해서 수불스님을 한번 뵙고 싶다, 친견하고 싶다, 주선을 한번 해달라 그래서 이제 제가 서울 안국선원 토굴로 찾아가서 뵀죠 그런데 스님께서도 한 달 만에 저희 남도 산중을 산방을 찾아오셨어요. 예고 없이 정찬주 작가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모습이 궁금해서 한 번 찾아왔다고 그래서 이제 우리 집사람이 서울 올라가서 간화선 체험하고, 우리 또 두 딸이 이 간화선 체험하고, 이렇게 해서 이제 안국선원하고 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안국선원 패밀리가 돼버린 거죠.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아주 뜻밖이면서도 아주 깊은 인연이 있으시네요. 신간 ‘시간이 없다’는 그래서 그런지 10년 전에 기획을 하고 또 8개월간의 집중 집필을 거쳐서 탄생했다고 제가 들었는데요, 출간까지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고 특히 생존해 계신 스님이셔서 또 존경하시는 분이어서 부담감이 더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정찬주 작가]

만약에 스님께서 더 젊으셨다면 아마 더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스님, 올해 세수가 70이시거든요. 그러면 연세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대를 살다간 그 고승 분들은 벌써 40대, 50대에 전부 고승이라고 추앙을 받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스님의 70세 세수는 결코 작지 않고, 또 저 역시 올해 70이 넘었거든요. 그래서 면탈이 더 약해지기 전에 스님 얘기를 써야 되겠다. 그런 제 입장하고 또 아까 그 간화선이 현대인들한테 최적화된 수행법이다, 그런 스님의 어떤 가풍하고 이런 게 결합이 돼서 어떤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집필했던 것 같습니다.

[배재수 앵커]

부담감보다는 오히려 더 굳센 의지가 생기신 거군요. 아마도 이런 글을 쓰시면서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한 번에 묻기에는 좀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한국불교의 백년대계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정찬주 작가]

제가 안국선원으로 국한시켜서 얘기를 해볼게요, 부처님 당대에는 부처님과 1250비구는 부처님과 신도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였습니다. 그렇게 부처님 당대의 어떤 승가의 모습은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게 원초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안국선원은 거기서 간화선을 체험한 사람들과 수불스님이라는 스승과의 관계거든요, 그래서 안국선원은 스승과 신도의 관계가 아니라 제자의 관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처님 당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고 봐야죠. 그러니까 불교가 저는 타력신앙이 자력보다 저울로 잴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두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한국불교의 미래는 타력에서 자력으로 옮겨가는 것이 불교의 어떤 뿌리, 한국불교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안국선원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한국불교의 미래의 한 대안도 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고 실제로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인 로버트 버스웰이라는 UCLA 석좌 교수를 지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실은 구산스님한테 출가해서 7년간 무자 화두도 들고 선수행하신 분이거든요, 그리고 또 안국선원에 가서 동국대 국제불교학술원장 재임 시절에, 부산 안국선원에 가서 간화선 집중 수행을 한 분이에요. 근데 이분 말씀이 자기는 솔직하게 얘기해서 간화선 체험을 함으로 해서 안국선원에서 일주일이 자기한테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얘기를 고백을 했고, 또 이분이 제가 책에도 썼습니다마는 안국선원의 수불스님의 어떤 수행 모습을 볼 때, 자기는 한국 불교의 미래는 밝다 이렇게 어느 방송에서 얘기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로버트 버스웰의 그런 어떤 평가가 저는 바른 평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배재수 앵커]

지금 여러분께서는 개천절 휴일 특집 뉴스파노라마를 듣고 계시고요, 소설가 정찬주 작가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서요. 작가님께서는 무소유 법정 스님의 유발상좌이신데요, 법정스님께서 생존에 ‘무염(無染)’이라는 법명도 주셨다고 제가 들었는데, 법정스님과는 어떤 인연이 있고 또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정찬주 작가]

법정스님의 산문집을 제가 한 10권을 샘터사에 있으면서 만들어 드렸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편집하면서 불일암을 자주 내려갔죠. 그런데 저는 처음에는 법정스님하고 그렇게 가깝지는 않았습니다. 스님께서 너무 까다로우셔서 어디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이런 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스님께서 남과의 약속은 물론이고 자기와의 약속이 너무 투철하시더라고요, 불일암에 계시면서도 새벽 예불을 혼자라도 꼭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불일암에서 자면서 그걸 봤거든요. 그래서 이제 어느 날 나는 스님의 제자가 돼야 되겠다 그리고 스님께 말씀을 드렸죠. 스님, 저 법명을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래? 불일암에 내려와, 그래서 불일암에 내려가서, 좀 제가 좀 젊었을 때 좀 당돌했어요. 스님, 법명을 주시려면 이왕이면 인생의 좌우명이 될 수 있는 법명을 주십시오 그랬더니, 어쨌든 불일암에서 하루 자 봐, 내일 아침에 내가 지어서 줄 테니까, 그래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 날 일어났더니 법명 두 개를 제시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는 지금도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인연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스님 저는 이 ‘무염’이 좋습니다 그랬더니, 그래, 저자거리에 살면 어쩔 수 없이 물들 수 있고 때가 묻을 수 있어 그렇지만 물들지 않게 노력하는 그 자세가 중요하지, 그런 무염 법명이 인생의 좌우명도 될 수 있을 거야 하면서 짧은 법문을 해 주시더라고요, 법문을 받는 공덕은 신호등을 보는 것과 같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잖아요. 또 내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빨간불이 켜지잖아요. 그게 법문을 받는 공덕이랍니다. 자기 스스로 말하자면 점검을 해볼 수 있는, 그래서 이제 거기서 그 법명을 이제 받고 그리고 이제 불일암 자주 내려갔는데, 스님들이 보통 자기 상좌분들한테 출가 전 얘기는 절대 안 하거든요. 

[배재수 앵커]

안 하시죠. 

[정찬주 작가]

진짜 안 하죠. 알죠? 그런데 저한테는 많이 해줬어요. 일제시대 때 산수시간에 그 산수 선생이 그 슬리퍼로 스님의 뺨을 쳤다는 얘기,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더라고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네가 내 한번 소설을 써보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해 주셨는지, 가정이 좀 어려운 그런 역경도 있었거든요, 그런 것도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리고 돌아가시고 나니까 출가 전 얘기가, 말하자면 과거가 없는 현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쓸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법정스님의 출가 전 얘기를 참 많이 들어서 나 혼자만 알고 새길 일이 아니라 이걸 한번 써보자 그래서, 법정스님 다비장에 가서 송광사 가서, 집에 돌아와서 제가 사립문을 닫아 걸고 49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썼던 게 ‘소설 무소유’였습니다. 지금까지 독자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죠. 한 30만 부 출간이 됐으니까요.

[배재수 앵커]

소설 무소유가 그렇게 탄생하는 거군요. 스님께서 수행자는 아니지만 재가자로서 작가님께 마음을 아주 많이 여셨나 봅니다. 

[정찬주 작가]

글쎄, 제가 뭔가 좀 미덥지 못해서 그러셨는지 안 그러면 좀 어떤 측근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 저희 집도 여러 번 오셨어요. 여러 번 오셔가지고 현판 글씨도 써주시고, 근데 현판 글씨를 써주시는데 낙관은 안 찍으시더라고요, 낙관을 찍는 건 내 글씨 자랑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것도 벌써, 이 짧은 일화만 봐도 얼마나 자기의 질서가 투명한 분입니까?

[배재수 앵커]

그러네요.

[정찬주 작가]

그래서 그런 걸 볼 때 저는 참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지금도 어떤 분이 그래요, 낙관을 찍은 글을 받았으면 가치가 훨씬 지금 높을 텐데 근데 저는 오히려 낙관 없는 글씨가 저한테는 더 보배로 느껴집니다.

[배재수 앵커]

하긴 법정스님 입적하실 때도 말빚만 짓고 가신다는 얘기도, 겸손한 말씀 하셨으니까요. 40년 넘게 글을 쓰시면서 많은 작품 쓰셨는데, 글쓰기 참 쉽지 않지 않습니까? 평소 글쓰기 수행으로 여기신다고요?

[정찬주 작가]

네, 제가 남도 산속으로 내려간 이유도 남은 인생을 좀 더 치열하게 살고 싶다 제 인생이라는 게 글 쓰는 것 밖에 더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좀 치열하게 살고 싶어서 치열하게 글을 쓰고 싶어서 내려가서, 저는 제 산방 이불재를, 이불재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무문관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제 사저의 의자를, 저는 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방의 좌복, 거기 의자에 앉으면 선방에 내가 지금 좌복에 앉아 있는 거다 이런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화순에서 광주는 근교잖아요. 가깝습니다. 근데 광주를 가려면 화순에서 너릿재를 지나야 되는데, 저는 가능하면 너릿재를 안 지납니다. 예외는 딱 하나 있죠. 어머니가 광주에 사시는데 어머니가 올해 연세가 95세인데 이제 일요일마다 가서 점심을 같이 하거든요.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만 그 너릿재를 지나고 그 외는 너릿재를 이렇게 지나가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 질서 같아요. 제 질서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면 글 쓰는 데 좀 방해가 될 것 같고, 그래서 제 질서를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올해 연세가 일흔이신데요. 여전히 왕성한 글쓰기를 하고 계시지만 어느 글에서인가 좌우명이 “글을 쓰다 죽다”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앞으로 어떤 글을 더 쓰고 싶으십니까?

[정찬주 작가]

저는 지금 제가 쓰고 싶은 딱 한 편의 소설이 있는데 그 역시 고승입니다. 조선시대 문정왕후 때 허응당 보우, 승과를 부활시킨 분이거든요. 숭유배불의 시기에 승과를 부활시킨 분입니다. 이 승과 부활은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승과에서 장원하신 분이 서산대사, 사명대사입니다. 이분들이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일념으로, 말하자면 참전하신 분들 아닙니까? 평양성 탈환 같은 경우는 서산대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우리들이 잘 모르고 있는데 평양성 탈환할 때 서산대사에 힘이 없었으면 탈환을 못 했을 겁니다. 결국 임신왜란의 물꼬를 돌려놓은 분이 서산대사, 나중에 포로 송환을 할 때 사명대사께서 일본 가서 다 데리고 왔잖아요. 이런 분들이 승과에서 장원하신 분들이었어요. 그러니까 보우대사가 없었으면 이분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제가 마지막으로 고성 소설을 쓴다면 허응당 보우대사를 꼭 한 번 쓰고 싶은 그런 의지가 있습니다.

[배재수 앵커]

승과를 부활했던 허응당 보우스님 글을 한번 써보고 싶으시군요. 이야기 나누다 보니까 벌써 이제 제한된 시간이 다 돼서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나눠야 될 것 같습니다. 못 다한 이야기는 또 인연이 되면 한 번 더 나누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찬주 작가]

고맙습니다.

[배재수 앵커]

지금까지 소설가 정찬주 작가와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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