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 기사 한 두 꼭지는 ‘극단적 선택’ 이야기입니다. 마치 사회 전체가 ‘극단적 선택’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가슴 아픈 소식들로 채워집니다. 오랜 병마와 생활고, 고독과 은둔, 장애와 자립에 대한 두려움 등이 대표적 비극의 원인입니다. 극단적 선택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개인이 겪었을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우리 사회에 만연된 고립감과 우울감은 아마도 이들의 선택에 기름을 부었을 겁니다.

전문가들은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는 현상을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적 아노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아노미 사회, 즉 혼란스러운 사회가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극단적 선택의 원인들에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가 개인의 극단적 선택을 모두 설명하거나 합리화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는 없습니다.

불교에서 인간 존엄과 생명 존중은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은 하늘,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외쳤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보다 더 존귀한 존재는 없다”. 가끔 코미디 소재로 다르게 쓰여 여론의 지적을 받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는 개인이 아닌 ‘사람’이나 ‘중생’, ‘인류’를 상징합니다.

불자가 되려면 반드시 지킬 것을 다짐하며 외우는 ‘오계’의 첫 번째 약속도 같은 맥락입니다. “불살생계(不殺生戒)”, 즉 “살아있는 생명은 죽이지 말라”. 생명의 가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니 생명 있는 것을 함부러 대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윤회사상을 따르는 불교는 인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비유로도 설명합니다. “망망대해에 던진 널빤지의 구멍으로 100년에 한 번씩 해수면에 올라오는 눈먼 거북이가 머리를 집어넣을 만큼 어렵다”. 인간이 죽어 지옥에 가거나 아귀와 축생, 수라의 몸 받기는 쉽지만, 천상에 태어나거나 사람의 몸 받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의 고통이 이겨내기 버겁다고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한다면, 또 다른 윤회의 원인이 될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기와 의도에 따라 극단적 선택에 대한 평가도 달라집니다. 이타적 희생이라는 죽음의 긍정적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소신공양 같은 살신성인이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드는 소방관의 의로운 죽음은 비록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생명의 가치를 지킨 숭고한 희생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고통’이라고 진단합니다. 때문에 어차피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니, 빨리 알아차리고 바른 수행으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을 성취하라는 겁니다.

행여 고통이 단번에 해결되지 않더라도, 원래 삶은 고통의 바다이고 이는 누구나 겪는 일이니, 고통이 그치고 언젠가 내게 찾아올 행복을 위해 끝까지 생의 끈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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