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얻어,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에 있는 지인에게 "같이 놀아 달라"고 청했다. 나처럼 기자인 그 지인은 "오후에 재판 취재가 있으니, 취재를 마치면 놀아주겠노라"고 했다. 다만, "아마 오늘 모든 변론과 신문이 마무리될 것 같아서 재판이 늦어질 수 있다"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서울 서초동에서도 금요일 오후 늦게 열리는 재판은 드물다. 도대체 무슨 재판인지 궁금했다. "혼자 기다리면 뭐하나. 나도 방청하겠다"고 제안했다. 예정에 전혀 없었던 제주지법 형사재판 방청은 그렇게 시작됐다.

해당 사건 피고인은 3명이었다. 주식회사 제주동물테마파크 대표이사 자격으로 법정에 섰지만, 서홍송 대명소노그룹 창업주와 박춘희 현 회장의 맏딸로 더 잘 알려진 서경선 대표, 제주동물테마파크 사내이사였던 서 모 씨, 그리고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제주 조천읍 선흘2리 이장을 맡았던 정 모 씨였다.

재판의 쟁점은 서 대표가 정 전 이장과 아들에게 건넨 돈 1800만원의 성격이었다. 검찰 측은 부정 청탁의 대가인 것으로 파악했고, 서 대표와 정 전 이장 측은 차용금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 자체는 새로운 사실은 아닌 듯 했다. 지인은 "이미 여러 차례 공판이 열렸고, 기사도 나갔다. 오늘의 포인트는 서 대표의 법정 진술 내용"이라고 귀띔했다.

놀라웠던 건, 재판 내용보다는 서초동과는 확연히 다른 법정 분위기였다.

재판이 시작된 지 1시간 여 지난 오후 5시 30분쯤, 정 전 이장에 대한 피고인 신문이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갑자기 공판검사가 난감한 표정과 말투로 재판장에게 발언했다. "재판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나머지 두 피고인에 대한 신문은 공판기일을 한 번 더 잡으시면 어떨지요?" 오늘 '끝장'을 봐야 하는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되묻는 재판장에게, 검사의 부탁이 이어졌다. "그게,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집엘 가야하는데, 비행기 시간이 다 돼서요. 더 늦게 출발하는 표나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표도 찾아봤지만, 구할 수가 없어서요"

더 놀라운 건 재판장의 반응이었다. "그렇죠? 주말부부이실텐데, 가족과의 시간이 중요하죠. 그럼 피고인과 변호인에게 양해를 구해야할 것 같은데요. 오늘 피고인 신문을 다 마치고, 결심까지 하려 했는데... 재판을 원활히 진행하지 못한 제 잘못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초동이었다면 공판검사가 '감히' 이런 발언을 할 수도 없었겠거니와, 했다 하더라도 재판장이 '안된다'고 단호히 끊었을 테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자신 때문이라는 재판장의 사과 멘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다.

놀라운 건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정 전 이장과 반대 의견인 듯한 마을 주민들이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피고인 신문에서 정 전 이장은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거나, 방청객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낮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조소가 터져나왔다. 서초동이었다면 법정 경위가 달려와서 경고하거나 퇴정을 명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판장이 부드러운 어조로 "소란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민 한 명이 갑자기 손을 들며 외쳤다. "재판장님, 제가 바로 고발인인데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공소장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을 저는 열람하지 못했는데요!" 

역시 재판장은 친절한 어조로 "고발인이라고 해서 자료 열람 권한이 있는 건 아니"라고 설명해주었다. 서초동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인은 "결국 서경선 대표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며 투덜댔다. 기사를 쓸 만한 주제를 잡기 어렵다는 불평이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탓에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서 대표의 미간도 찌푸린 듯 보였다. 멀리 제주까지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결과적으로 '헛걸음' 한 셈이니 이해가 됐다.

취재기자로서가 아니라 방청객으로서 법정에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서초동을 주로 지켜보다가, 처음 접한 제주법원의 분위기가 신기했기 때문일까. 투덜대는 지인과 달리 내게는 이런 광경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아! 법원에서도 인간미를 느낄 수 있구나!

업무량이 많은 서울의 법원과,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제주 법원의 분위기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의 법관들에게 "왜 당신들은 제주 법관들처럼 인간적이지 못한가!"라고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서울에서 보기 어려웠던 제주 법원의 '인간미'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