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연 : 대원정사 회주 보각 스님

●연 출 : 김종광 기자

●진 행 : 이병철 방송부장

●일 시 : 2021년 01월 13일(목) 제주BBS ‘아침저널 제주’

(제주FM 94.9MHz 서귀포FM 100.5MHz)

●장 소 : BBS제주불교방송 / 제주시 임항로 14(덕산빌딩 4층)

●코 너 명 : 그땐 그랬지 우리의 부처님오신날

[이병철] 제주의 다양한 관심사를 보다 심층적으로 알아보는 집중 인터뷰 시간입니다. 이 시간 격주로 우리 불자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돌아보고 있는데요.

‘그땐 그랬지. 우리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제목으로 오늘은 네 번째 순서로, 대원정사 회주 보각 스님 모시고 그 시절 이야기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주시 애월읍 수산봉에 자리잡은 대원정사의 부처님 오신 날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각 스님] 예.

[이병철] 우선 청취자 여러분에게 새해 덕담 한 말씀 해주시죠.

[보각 스님] 제가 출가한 이래 이제 68년이 되었는데, 그동안에도 이러한 코로나 19라는 대재앙이 있지 않았어요. 그 당시는 내가 출가할 때만 해도 굉장히 식량이 모자라고, 굶는 분들은 많았고 계속 흉년이 들어서 형편이 없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근래에 와서 2019년부터 이와 같이 우리 불자뿐만 아니라 도민들까지 고난 속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빨리 종식해야 되는데 우리 스님들은 밤낮으로 불전에다 축원을 올리는데 코로나 19 대 역병이 속히 사라져서 재난이 종식되고 나라가 편안하고 인류가 편안해져서 서로 교류하게,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우리 제주 불자님들도 그동안 무난히 재앙을 넘겨서 다음 해부터는 2022년도에는 빨리 재난이 종식되어서 삶의 활기를 찾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절에도 자유자재로 출입해서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부처님 앞에 기도하고, 마음껏 소리내서 정진할 수 있는 때가 되었으면 바라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다시 활기를 찾아서 우리 스스로가 무한한 정진을 하여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병철] 스님께서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해 주시니까 코로나가 올해 안에는 종식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희가 여쭤보고자 하는 게, 사실은 대원정사의 부처님 오신 날을 다뤄보려고 하는데요. 스님께서 어떻게 대원정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예전에는 원천사라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얘기해 주신다면요?

[보각 스님] 제가 어렸을 때, 13살부터 병이 들어서, 고관절인데 그 당시에는 관절염이다 뭐다 했는지 무슨 소아마비도 아니라고 해서 다리가 다 오그라지고 영양실조로 병을 구완하지 못하다가 4.3을 겪고 나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라서 어디 병원을 찾을 수도 없고 당시 의료 시설도 없었지만, 도립 병원과 후생의원 몇 개밖에 없었죠. 그래서 한방으로 침도 맞고 하다가, 도저히 학교도 못 나가고 그래서 선생님들이랑 동창들까지 내가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고 하니까 찾아와서 위로해 줬는데, 내가 그걸 받을 때 굉장히 서글프더라고. 마침 그때 우리 고모할머니 되시는 분이 원래 4.3 이전부터 독실한 원천사 신도입니다.

그런 분이신데 거기는 시어르신부터 할머니, 자녀들까지도 전부 불자라. 이제 나에게 와서 너 그렇게 집에서 고통스럽게 울고만 살지 말고,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절에 가서 기도하면서 보살님의 보살핌을 받아보며 살지 않을 테냐, 이렇게 하니까 나는 우선 벗들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창피한 생각에, 부끄러워서 피신하고자 해서 외딴 절에다 찾아가겠다고 해서 온 거지. 그런데 올 때 나는 걸어서도 못 오고 할머니 등에 업혀서 와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원천사인데 4.3 때 피해를 봐서 법당은 극락사로 옮겨가 버리고, 요사채만 이렇게 있어서 그것을 수산리 신도들이 중심으로 되어서, 마을에 인접한 곳에 옮겨다가 집을 지어서 어느 보살님한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냥 아무 부처님도 모시지 않았지만 염불하면서 살라고, 신도들이 그러니까 그분이 살고 있었는데, 당시 와서 들어보니까 이 절이 수산봉에 있게 된 연유는 그렇게 신도님들이 옮겨서 임시로 지었지만, 그때 우리 절간, 원천사 처음 창건하신 분이 화엄사 주지이신 청산 스님입니다.

제주도에 와서 원물에다가 절을 지어서 거기다 이름을 원천사라 하고 포교당으로 등록했었어요. 그때는 조계종, 태고종이니 갈라지지 않을 때였으니까. 그래서 불교 종단에 가입했는데, 그러다가 4.3 사건 때 주지로 4대째 왔던 고정선이라는 분이, 제선이라고도 하고 정선이라고도 합니다.

그분이 4.3때 어느 사형되는 스님을 잠깐 절에다 숨겨주었다가 나중에 그것이 탄로나서 그놈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잘 모릅니다, 벌써 나간지가 며칠 되었다고 하니까 행방은 알 것 아니냐, 하고 잡아다 취조를 한 거지. 취조를 해도 자백하지 않아서 총살을 시켜버렸어요. 그래서 절은 비니까 절을 옮긴 상태인데 초가집만 있어서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청산 스님 제자 되시는 분이 방동화, 선두석, 오춘송, 제가 불자로 유발제자라고 해서 박보현화, 이렇게 네 분이 스님의 자취를 다시 복원해야겠다, 법 형제들이 의논을 해서 극락사에 가서 불상, 불화, 책자, 불교용품들을 달라고 해서 거기서 집을 지어버린 건 옮길 수 없어서 옮길 수 있는 작은 불상, 탱화를 옮겨서 향로, 촛대 같은 불구품들, 책상 하나, 그런 정도로 하니까 절이 얼마나 초라하겠어요.

신도도 없지. 신도도 다 수산리를 중심으로 다니던 신도들은 다 극락사로 가버리고. 그래서 남아 있느 신도라는 건 하귀에 몇 분, 구엄에 몇 분, 신엄에 몇 분, 이런 정도거든. 절도 가난하고, 신도님들도 생활이 풍족하지 못해서 가난한 형편에 절이라고 해서 옛날 다니던 인연이 있어서 오긴 왔지만 신도님들이 제대로 절을 위해서 봉사한다거나 시주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절이 가난할 수밖에 없죠. 형편없이 가난했지.

이 주변에 절도 저 고내봉도 있고 극락사도 있고, 파군봉에는 그땐 없을 때고. 절이라고 하지만 절이 뭐 명맥만 유지하는 형편이에요. 사시는 분도 박보현화라고 해서 한 분만 살았어. 스님도 안 계시고. 방동화 스님이나 오춘송 스님이 다니면서 기도나 법회를 봐주고. 이렇게 해서 한 2년이 지났을 때 내가 들어왔단 말이야. 들어오니까 이제 어쨌든 글 읽을 줄 아는 놈이 왔다고 잘됐다고 해서 방동화 스님이 나보고 무조건 기도하라는 거야. 왜냐하면, 과거에 관음사에서 출가하신 여러 스님들도 있지만 방동화 스님의 소개로 온 분들도 있는데 그분들이 병이 들었다가 절에 가서 정진해서 다 좋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피를 얻었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무조건 정진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까 불자 요람이라는 작은 104페이지 정도의 책을 주면서 천수경, 심경, 고왕경, 금강경찬, 무슨 불송 이런 정도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그걸 외워서 기도하라고 하니까 그때는 아파서 다른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그걸 외우는데 부처님 인연이 있으려고 하니까 내가 3일 만에 외운 거예요.

그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 서경보스님도 천재라고 하지만 산방산에서 천수경 3일 만에 외워서 천재라고 하는데 너는 이 책 전체를, 화엄경까지 다 외웠으니 너는 더 천재다, 그런데 불연이 없으면 이렇게 불경을 다 외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틀림없이 가피가 있을 것이니 기도해라, 그래서 천수경 가지고 기도한 거지. 기도를 하라니까 기도문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니까 다른 건 얘기할 것이 없고 관세음보살 부르고 천수경 읽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부처님이시여, 저를 좋게 해주시면 제가 새 생명을 얻어서 모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가피가 내린다고 하니까 했지.

그렇게 살면서 나중에 1년 후에는 병은 정진하자마자 한 달 조금 남짓해서 걸음도 걷게 되고, 아픈 것이 없어졌어. 그래서 차츰차츰 걷기도 하고, 엉치가 조금 아픈 것이 있지만 나머지는 활기차게 걸음도 걷고 잔디밭에서 달리기도 하게 된 거야. 그것에 신심이 나서 부지런히 정진해서 51일 넘은 후에서는 밖에서 땅도 파고 다 했지. 우리 보살님은 그때의 그 절이 가난하다 보니까 그냥 나서서 탁발해오는 거야. 탁발해오는 절이니까 얼마나 가난하겠어.

신도님들은 한 30여 명 다니는데 그분들도 삶이 빠듯한 분들이라. 그렇지만 신심으로 겨우 먹고살 정도로 했지. 기도를 하는데 내가 이렇게 견디니까 1년 만에 계를 받게 되었어. 나도 맨 처음에는 중 되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집안이 유교 집안인지 불교 인연도 없고, 그런 건 생각을 못 했지만 나중에 방동화 스님이 오셔서 너 부처님 가피를 받았고, 기도 올릴 때 네가 이렇게 새 생명을 주신다면 모든 이를 위해서 봉사하겠다고 했지 않았느냐, 부처님과의 약속을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해서 머리를 깎고 시봉을 했지.

[이병철] 그러면 스님, 절이 아주 가난하다고 하셨는데, 스님이 출가할 당시 1950년대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제주도 절들이 다 가난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당시 스님이 처음 절에 들어오셔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셨을 텐데 그 가난한 시절의 부처님 오신 날은 어떠셨는지요?

[보각 스님] 예. 요즘 토시등이라고 하는 것처럼 딱 붙여서 대나무로 길게 하고 초를 꽂아서 축원하는데, 그런 것도 하고. 둥그런 마늘등도 만들고. 대로 깎아서 다 했지. 백지를 붙이고 물색도 없고 하얀 종이로 다 해서, 법당 돌아가면서 하고 마당에도 하고, 안에도 달았지만 마당에까지 달 것도 없고 안에다 30여 개 달아서 우리 절은 그렇게 했고. 조금 나은 절도 그렇게 많이 안 달았더라고요. 한 50등, 많이 달면 100등이지. 그렇게 만들어서 다 했다고 해요.

그때는 신도도 가난하고 절도 가난했지만, 등도 만들면 요즘처럼 한 사람이 한 등 하듯이 하는 게 아니고, 등 하나 해서 초를 하나 꽂잖아요? 그러면 석가모니불 부르면서 해가 지고 한 40분 동안 하면 초가 어느 정도 탈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 초를 다시 킨 채로 이름만 바꿔 달아서 축원하고 했지. 그렇게 할 때도 초파일이라는 것은 즐거운 날이라는 것은 도민들, 백성들, 일반인들한테 다 인식되다 보니까 저녁때 되면 불은 밝혀져 있는데 인선에서 수산리니 뭐니 학위니 구엄이니 하는 데에서 사람들이 막 와. 남녀노소. 젊은 사람들이 막 오지. 2, 30대들이 몰려와서 마당에, 사실 마당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잔디밭인데 거기에 장구 하나 가져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절이나 기도하러 온 게 아니고. 그렇게 놀러는 오더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병철] 예전 같은 경우는 그런 축제 같은 분위기가 있었네요?

[보각 스님] 축제지. 축제가 뭐 그런 거지. 뭐 다른 게 아니고. 그렇게 하면 절에서는 사월초파일이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떡은 해놓고, 과일도 살 것 아니에요? 그 당시에는 제주도가 감귤도 재배할 때가 아니니까 사과나 배 같은 것 밖에 없지. 한쪽씩 잘라서 온 사람들 주고, 떡도 한 조각씩 나눠주고. 이렇게 하면 그걸로 그냥 한 밤 10시, 11시까지 놀다 가더라고. 짧은 초도 없어서 보통 초로 하면, 이젠 우리가 합동으로 보살님이 가서 양초, 백지, 이런 걸 다 사오거든. 이곳에서 대나무 끊어다가, 대나무는 아무 데에서나 주니까 만들어서 등 하고. 그러다 이제 스님들이 지시한 대로 글을 봉축, 불탄, 이렇게 썼지. 그렇게 해서 불을 키고 했어. 그렇게 했는데 지난 다음에야 다른 절에도 들어오면 신도들 와서 저녁까지 놀다가 갔다고 하더라고.

[이병철] 특별한 것은 없지만 절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처럼 즐기고 갔네요.

[보각 스님] 불자 아닌 일반인들도 그날은 축하하는 날이다, 경축하는 날이다, 이렇게 인식은 갖고 있었어요.

[이병철] 예전에 절에 오면 떡도 주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요즘은 대부분의 사찰에서 비빔밥을 주시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어땠나요? 시대에 따라 절밥도 변화했을 것 같은데요.

[보각 스님] 절밥도 비빔밥이니 뭐니 하는 것도 90년대 돼서 한 거고, 그전에는 밥해서 채소랑 주고 그랬지. 잘 차리든 못 차리든 김치 한 조각 하고, 채소 하나 해서 밥해서 주고.

[이병철] 연등의 변화도 굉장히 클 것 같아요. 옛날에는 대나무로 직접 깎아서 만드셨다고 하셨는데요.

[보각 스님] 그렇게 했지. 그렇게 하다가 60년대 말, 70년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철사 등이 나왔지. 그전에는 철사를 사다가 직접 여기서 묶어서 만들었는데 70년대 말부터는 육지에서 등살이 나왔어. 종이도 맞춰서 나오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냐면 75년도인가 76년도인가, 용태형 변호사가 부처님 오신 날 제정을 위해 법적으로 했잖아요? 국가에서 부처님 오신 날로 지정된 후부터 나왔지. 그전에는 사찰마다 자기대로 만들었어.

[이병철] 보통 전통 등 하면 팔각등이라고 하죠. 대나무로 해서.

[보각 스님] 대나무로 하지 않고 그 후부터는 철사로. 그전에 할 때는 철사로 각을 낼 수 없어서 수박등같이 둥근 등을 만들었어.

[이병철] 등도 귀하던 시절, 제주불교연합회에서도 관음사에서 제등한대로 하다가 본격적으로 종합경기장에서 제등 행렬, 요즘은 연등 축제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여러 종파가 같이 부처님 오신 날을 기렸는지요?

[보각 스님] 그전에 우리가 연합회를 하게 된 계기는 중원 스님이, 그때는 지영 스님이었지. 지영 스님이 관음사 주지로 오셔서 연합회를 했고. 그전에도 최지선이라고 백양사 방장 했던 분이 탐라성진회라고 해서 우리가 종단을 초월해서 각 종단이 흐트러지지 말고 제주불교를 위해 모여서 같이 연합회를 결성해서 제주불교를 좀 빛내도록 하자고 해서 처음 3년 동안 유지했어요. 태고종 스님들도 같이 하고.

[이병철] 1970년대 후반이시잖아요?

[보각 스님] 그렇지. 최지선 스님 올 때. 그걸 시발로 해서 연합회라고 하는 것이 태동하기 시작한 거라. 그렇게 했는데 최지선 스님도 얼마 안 되어 가버리니까 그다음에 오신 몇 분은 그런 게 없었어. 어쨌든 종단별로 연합해서 했는데 관음사는 관음사를 중심으로 하니까 관음사에서 제등 행렬은 안 하고 주변에서만 하고. 각 종단별로는 종단에서 모여서 며칠 전에, 한 번 봉축 행사라고 이름을 붙여서 좀 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체계를 잡은 건 아니지. 그러다가 중원 스님이 오셔서 한 번은 나를 부르더라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연합 체계를 마련할 수 있냐고 물으시길래 나는 대뜸 그랬지.

우선 조계종에서 내가 조계종을 중심으로만 모이라고 하면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선 태고종을 일어서도록 하십시오. 태고종이 나서서 힘을 합쳐야 연합 체계가 되지. 태고종이 다수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니까 그러면 자기가 수열스님을 한 분 청할 테니까 같이 모여서 의논하자고. 그러니까 수열스님도 선뜻 좋다고 하지. 수열스님이 열성이 있는 분이시거든. 불교가 살아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더 앞장서서 했지.

태고종이 합쳐지고 법화종은 중재 역할을 하고. 태고종, 조계종, 법화종, 3개 종단이 모이면서 일부 종단까지 끌어들인 거지. 그때 천태종은 별로 안 할 테니까. 그렇게 3개 종단이 합쳐져서 불교연합회를 결성해서 중원 스님 중심으로. 관음사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조계종이 중심이 되어야 하니까. 이와 같이 하고, 봉행위원장은 수열스님이 하고. 나는 우리가 작은 종단이니까 같이 협조하겠다고 연합회를 몇 년 동안 하긴 했는데 그때 1년 후부터 우리가 이렇게 그냥 연합회만 할 게 아니라, 부처님오신날 봉축 행사를 서울에서는 여의도에서 행사한다, 그러니까 조계사에서만 하지 말고 여의도에서도 하니까.

제주도에서도 관음사에서만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우리 한 번 모여서 하자고 하니까, 수열스님이 그렇게 하려면 관을 움직여야 하니까 그때가 도지사, 도의회 의장, 도의회장은 없을 때일 거야. 그런 분들, 도의 책임자뿐만 아니라 경찰청장까지 일으켜 세워서 그날 도로를 통제해야 하니 허가도 받아야 하니까 이런 일은 중원 스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니까 한 거지. 그래서 공설운동장에서 시작해서 제등행렬을 해보니까 굉장히 호응이 좋아. 그런데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다양한 등들이 나올 때가 아니지. 기껏해야 만월등, 팔모등, 연등, 이 정도지. 이렇게 했지만 어쨌든 내려가면 시민들도 다 나와서 축하해주고, 호응해줘서 학생회도 밴드부를 불러서 거창하게 했지. 그렇게 잘 되었어요. 잘 된 것이 오늘날 연등 법회까지 하게 된 거지. 지금은 전국적으로 세계의 문화제로 등재되니까 제주도에도 연등제로 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그전에는 그렇게까지는 안 되고, 그냥 제주 지역 불교 하면 종단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어보자는 의미였지. 그러니 관에서도 호응하고, 시민들도 호응했지.

[이병철] 아까 서울 연등회 말씀하셨는데, 서울 연등회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세계인들이 우러러보는 축제가 되었는데요. 제주 불교도 이제 타 지역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주불교의 부처님 오신 날, 연등 축제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후손들에게 마지막 한 말씀 해주시죠.

[보각 스님] 뭐 내가 생각할 게 아니고 기획하고 앞으로 하는 일은 제작자들이나 관심 있는 분들이 해야지 내가 뭐 그런 걸 알 수가 있나요. 나는 다 합치려고 하면 지금 하는 대로 최대로 하긴 하되, 등을 만들어서 거리 행진도 하지만, 제주도는 섬이기 때문에 바다에 가서 유등제를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등도 만들고 바다에 띄우기도 하면, 지금은 산지천에서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크게 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하긴 잘 안 될 거예요. 왜냐하면 사찰들이 사찰 개별적으로 하면 이제처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날짜를 한 달 전, 보름 전, 열흘 전을 해야지 당일 하면 각 사찰마다, 곧 사찰 수입과도 관련이 된 것이기 때문에 사찰 개별적으로는 등을 달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병철]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상징성을 가지고 하면 제주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타지의 관광객이나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보각 스님] 나도 그때가 절기적으로는 봄이지만 건조한 시기기 때문에 새별오름 같은 데에서 불을 놓고 하는 건 안 되고, 등을 하는 것도 상당히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때문에 잘 연구해서 바다 쪽에서 하든지, 어디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또 어느 광장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음악회 같은 걸 3일 동안 하면 좋지 않을까.

[이병철] 스님의 바람대로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말씀 해 주신 보각 스님 감사드리고 만수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보각 스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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