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아카데미 명상대강좌가 지난 3일 강남 참불선원에서 개강했다.  
참선아카데미 명상대강좌가 지난 3일 강남 참불선원에서 개강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면, 그 대답은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개가 어떻게 부처님이 될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막연하게 불성이 있을 거라 여길 것 같다. ‘열반경’을 들이밀며 분명 불성이 있다고 외치는 이도 아마 있을 수 있다. 

누군가 필자에게 이같이 묻는다며, 사실 어떻게 대답할지 난감하다. 경전에 의하면 개에게는 분명 불성이 있다. 그러나 대승에서 부처는 지혜와 복덕을 갖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3아승기 100겁에 걸쳐 지혜를 구하고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부처는 ‘법신’과 ‘보신’ ‘화신’의 ‘삼신’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법신은 깨달으면 된다. 소승에서 말하는 아라한이다. 그러나 무량한 공덕은 3아승기 동안 쌓아야 하고, 32상 80종호의 ‘화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100겁이 걸린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고 누군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물음은 수당이래 지속됐던 ‘불성논쟁’을 바탕으로 한다.

이 질문은 ‘조주무자’ 화두이다. 어떤 스님이 이같이 묻자 조주스님은 '없다'고 했다. '없다'고 답한 조주스님이 ‘모든 생명체에게 불성이 있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모를 리는 없다. 이를 물은 스님 또한 이를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런데 먼저 왜, 그 스님은 선지식에게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물었을까? 아마 이같이 물은 스님은 조주스님에게서 개에게도 당연히 불성이 있으니 너도 열심히 정진해서 깨달으라는 격려를 듣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논리적으로 더욱 타당하게 개에게 불성이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까? 그도 아니면 나의 뜻이 스승의 뜻과 같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주스님은 왜 없다고 했을까?

불립문자의 화두이기에 어찌 그 뜻을 쉽사리 알수 있을까. 더욱이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은 글로 기록되고 후세에 전해진 순간, 그 효용성을 다했다고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단초는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 종고 스님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대혜 종고 스님은 “유, 무의 의식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했다. 6조 혜능조사 또한 “유를 물으면 무로 대답해야 하며 무를 물으면 유로 대답해야 한다 범부에 대해 물으면 성인으로 대답하고 성인에 대해 물으면 범부로 대답하라 두 가지 길이 서로 의존하여 중도의 뜻을 생한다”고 했다.

이러한 조사 스님들의 무자 화두 선문답은 ‘유’와 ‘무’, ‘유무’, ‘비유비무’의 4구를 바탕을 한다. 4구는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나가르주나, 용수보살의 중관학에서 나왔다. 용수보살은 반야경의 공사상을 논증하기 위해 이전에 없던 반 논리를 사용했다. 불전에 없는 중관논리는 인도 논리학의 한 학파인 ‘니야야학파’의 ‘자띠’ 논법이 그 기원이다. 즉 논리를 뛰어넘는 선문답은 질문자의 집착을, 그것이 설령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라고 해도 부정 한다. 극단에 치우지지 않게 하는 절대부정으로,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인 무아와 공, 중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중론 제3장, 제2게에 나와 있는 눈에 대한 가르침은 그 자체가 화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간화선의 화두를 대할 때면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워 한다. 우리의 실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필자 또한 그러했는데 고우스님의 입적 이후 스님의 법문을 찾아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고우스님은 “선불교의 목적은 불교를 체질화 하고 생활화 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불교가 지식을 주입해 깨닫게 하는 과정이라면 선불교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질화 하고 생활화하는 것이 선의 특징이죠”라고 말했다. 이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여러 화두를 찾아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간화선이야 말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전해주는 수행임을 새삼, 다시 한 번, 거듭 되새기게 됐다. 

그러던 중 강남 참불선원에서 조계종 수좌대표 영진스님이 간화선 강의를 한다고 하기에 주저 없이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사무처에 문의해서 취재를 갔다. 당시 2시간 남짓한 강의에서 영진스님은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삼처전심’부터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된 선불교와 간화선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다. 무엇보다 한 겨울 봉암사 선방에서 한 밤 중에 일어나 보니, 도반들이 어둠 속에서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는 체험은 수좌스님으로부터만 들을 수 있는 귀한 인연이었다. 앞서 다룬 ‘조주무자’ 화두 또한 영진스님이 강의를 듣고 기사를 쓴 후, 여러 관련 서적을 찾아보고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책은 여러 책을 보았으나 필자가 쓴 글 중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관학자인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선불교의 뿌리 인도 중관학과 동아시아 삼론학’에서 나왔다. 선불교의 교학 적 바탕이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대승불교에서 더욱 엄격한 깨달음은 결국 상구보리 했으면, 반드시 하화중생 해야 함을 소승과 대승, 밀교와 비교해서 다룬 글이 빼어났다. 

그런데 되돌아 생각하면 할수록 문자를 넘어서 조주스님이 왜 없다고 했는지 사실 그 이후로 쭉 되내어 보았지만 가늠할 수 없었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천여 명의 제자 중에서 오직 가섭 존자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대해 철학자 강신주는 무문관 48공안을 다룬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뗼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위대한 스승이 꽃을 들자 모두가 꽃을 보지는 않고 스승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승이 행하는 반논리의 답변과 행동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지도 방법이라는 뜻이다. '수처작주권입처개진' 머무는 곳에서 주인이 돼라는 일갈은 결국 깨달음은 권위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주인공이 될 때만이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제일의 아난존자 보다, 두타제일의 가섭존자가 먼저 깨달음을 얻고, 아난존자가 가섭존자에 의해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는 것보다 절실히 행해야 구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강남에서 종단의 수좌대표 스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준 한국참선지도자협회 회장 각산스님에게 취재 전에도, 당일에도,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다. 뒤늦게 방송 시점이 며칠 미뤄지면서 양해를 구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더니, 스님은 쾌히 괜찮다 하셨다. 문경 봉암사 세계명상마을 선원장까지 맡게 된 각산스님이 너무나 바쁜 것을 잘 알기에, 취재로 스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건 아닐까 했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이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것 또한 이심전심 ‘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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