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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 국장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수습' 딱지도 채 떼지 못했던 햇병아리 기자 시절, 나름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선배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회사 '윗분'에 대한 하소연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선배는 '쉿!'이란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특정인을 호칭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선배의 설명에 따르면, 실명을 생략해야 하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

먼저 '보안유지'였다. 우리가 특정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순간, 우리 근처에 그 특정인 또는 그의 친지나 지인이 머물러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뒷담화가 돌고 돌아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뒷담화가 아니어도 마찬가지. 몰래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단독, 특종 기삿거리를 누군가에게 흘린다거나, 취재원에 대한 정보를 누설한다거나... 의도치 않게 그런 실수가 발생하는 걸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저명성'이었다. 80년대 거물급 정치인들을 영문 이니셜로 호칭했다거나, 대기업 임직원들이 자사 총수 일가를 알파벳 등으로 칭하는 경우 등을 예로 들었다. 유명한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수도, 비실명으로 호칭하면 부담이 덜해진다는 이유일 수도 있다고 했다. 이유야 어떻든, 커뮤니케이션에 지장이 없다면 굳이 실명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나.

나머지 하나는 '면책'이라고 했다. 자신의 말이나 기사 때문에 법적 쟁송에 휘말리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했다. 

선배의 설명을 듣고 '그럴듯 하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요즘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그분'이 화제다. 정영학 회계사의 녹취파일에서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가 대장동 개발사업 투자사 천화동인1호의 실제 소유주라며 주장한 '그분' 말이다.

실명 대신 인칭대명사로 등장하는 '그분'. 정치권과 법조계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자 초년병 시절 선배가 주장했던 '실명 생략의 원칙'이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 만은 아니지 싶다.

우선 '보안유지'. 그들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 해당 인물의 신상이 외부로 알려지면 안될 정도의 거물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할 수 있다.

다음은 '저명성'. 보안을 신경쓰지 않더라도 실명 보다는 다른 표현을 쓰는 게 더 편한 인물일 수 있겠다 싶어진다.

그리고 '면책'.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그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는, 그래서 "난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며 빠져나갈 수 있는, 그 정도의 인물이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래서 '그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기자도 몇몇 인물을 대상으로 추측만 할 뿐, 방송이나 글을 통해 자신 있게 언급하긴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또는 동급의 인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것. "김만배 씨가 유 전 본부장을 평소 '동생'으로 부르더라"는 남욱 변호사의 증언도 있지만, 유 전 본부장이 위에서 소개한 3가지에 해당하는지를 따져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그렇다면 유 전 본부장보다 윗선일 가능성이 높다. 검찰과 경찰도 이런 점에 주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고, 현재는 당시 성남시 고위층 인사였던 인물들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어쩌면 수사기관 종사자들이 이 글을 본다면 "그런 훈수 두지 않아도, 우리도 다 알고 있거든!"이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다. 그저 더 늦어지기 전에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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