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가 갑작스레 채식을 시작했단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선 실천하기 어려우니 해외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채식을 해보려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데, 통 움직이지 않는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고기 없는데 왜 안 먹어? 채소만 있잖아.”라는 물음에, 친구는 뜻밖의 대답을 들려줬습니다. “이거, 고기랑 볶았는지 채소에서 고기 냄새가 나. 못 먹겠어.” 채식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는데도, 고기 냄새가 밴 음식은 아예 입에 대기조차 힘들다는 친구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난 2019년, 시민단체들이 ‘군대 내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라’며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기했습니다. 당시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던 정태현 씨는 “채식주의 군인들은 복무 기간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한 채 훈련을 받고 정신적 스트레스와 무기력, 우울증에 고통스러워했다”고 밝혔습니다. <해방촌의 채식주의자> 저자 전범선 씨도 한 언론사 기고문에서 군 복무 당시를 떠올리며 “논산훈련소에서 5년 만에 제육볶음을 먹고 구토를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채식주의자들에게 채식은, 단순 신념을 넘어 ‘생존의 문제’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인권위는 해당 진정을 기각했습니다. 국방부가 처음으로 급식 방침에 채식주의자 등 급식 지원 관련 규정을 신설했기 때문입니다. 군은 올해 2월부터 병역판정 검사 때 작성하는 신상명세서에 ‘채식주의자’ 여부를 표시하는 항목을 신설하고, 채식주의자와 특정 종교를 믿는 병사에게 맞춤형 비건 식단을 짜서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시리얼과 샐러드, 연두부, 두유 등으로 구성된 식단 예시도 제시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9개월, 국방부의 약속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군이 정태현 씨 군 복무 당시 제공한 채식 급식. 사진 국방부 제공.
군이 정태현 씨 군 복무 당시 제공한 채식 급식. 사진 국방부 제공.

 먼저, 올해 병무청 병역판정 검사에서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4백여 명. 이 가운데 훈련소에 입영한 사람은 102명입니다. 전체 군내 채식주의자 비율은 알기 어렵지만, 최소한 올해 입영자부턴 채식주의자 인원 파악이 가능해진 겁니다. 국방부에서 채식 급식 관련 지침이 내려진 후 실제 각 군부대에서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곳곳에서 작게나마 일렁이는 변화는 엿볼 수 있습니다.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기했던 정태현 씨는 군 입대 후 훈련소에서 대체 식단을 제공받았고, 국군 제9965부대 보급 장교는 채식주의자 병사에게 대체식을 제공했던 경험을 국방일보 기고문에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장교는 부식 예산으로 대체품을 구매·제공했다고 전하며 “급식소수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국방부 급식 방침에 따라 예산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확실히, 군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물론, 정태현 씨는 언론에 알려진 인물인 만큼 ‘특별 관리’를 받았을 수 있고, 국군 제9965부대 사례는 해당 장교의 세심한 배려로 이뤄진 일부 ‘모범 사례’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군에서 고통받고 있는 채식주의자들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정태현 씨의 진정 대리인을 맡았던 장서연 변호사는 ‘채식은 생존권의 문제’라는 주장에 담긴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채식주의자 장병들은 육류 거부로 자신의 건강을 해치느냐, 아니면
오랜 신념을 포기하느냐 두고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당사자에겐 생존 문제지만,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사소한 일’로 치부되고 있는 것”

누군가의 신념, 또는 생존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것. 이제 막 시작된 군의 변화가 오래도록, 그리고 확실히 이뤄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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