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2021년 6월 10일 서울시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옛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 새로 세워지는 민주인권기념관 착공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제34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2021년 6월 10일 서울시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옛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 새로 세워지는 민주인권기념관 착공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6월이 되면, 6월 10일이 되면, ‘자갈치 아지매’가 떠오른다. 1987년이니, 34년 전 일인데, 쉽게 잊을 수 없다. 화면은 그 당시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으로 이동한다.

지금은 지하철1호선 자갈치역과 남포역 사이 ‘구덕로’는 ‘진구(鎭區) 서면역’ 부근과 함께 ‘항쟁의 거리’였다. 매일 같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원인 제공은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제공했다. 직선제 개헌 등의 요구를 뒤로 하고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도화선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 불을 붙였다.

부산 영도(影島)가 고향인 박종철 열사가 서울 용산 남영동에 있는 비밀 경찰조직에게 조사를 받던 도중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사망했다’는 전언이다. 도대체(都大體) 무슨 말인지, 그 근거와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진상은 반드시 밝혀진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캐냈다. 진상은 공권력에 의한 고문치사사건(拷問致死事件)이었다. 특히, 그 자체가 당시 ‘비밀경찰’에 의해 은폐되고 축소되고,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현장은 용산구 남영동(南營洞) 대공분실(對共分室)이었다. 그런데 왜 대공(對共)인가! 대공분실은 해방 직후 1948년 대간첩 수사를 목적으로 설치됐다. 국가안보 위해행위 수사가 본령이다.

그런데, 3공화국을 거치면서 ‘정권 방탄 조직’으로 전락한다. 민주화 운동 조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실제 간첩과는 무관한 사건까지 직접 조사하면서 까닭없는 무고(誣告)행위를 저질렀다. ‘보안분실’이라고도 불렀는데, 지도상에도 그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

지번도(地番圖)에도 번지수만 표기하거나 위장상호를 사용했다. 직원 상호간에도 정식계급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위장계급으로 서로 호칭했다.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조직이 아니라 ‘비밀 범죄 고문조직망’과 다르지 않다고 해도 ‘침소봉대의 과언(過言)’이 결코 아닐 것이다.

김부겸 국무총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지선 스님 등이 6월 10일 서울시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지선 스님 등이 6월 10일 서울시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에 이어서, 이한열 열사가 1987년 그 해 6월 9일 항쟁 도중 최루탄 파편이 머리에 박히면서 사경(死境)을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유하자면, 도화선(導火線)이 도폭선(導爆線)이 되는 순간이다. 그 폭발엔 남항 물빛 보다 많은 '꽃별같은 민주영령'이 있었다. '젊은 학도 민주 열사의 희생'이 발생한 것도 모자라,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당시 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이 주도한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군사정권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극치를 보였다.

 민주전선과 그 세력이 보다 분명하게 뭉쳤다. 남녀노소, 종교와 이념을 불문하고 시민사회가 분연히 일어나 ‘반독재 군사정권 타도 투쟁’이 본격화됐다.

특히, 고(故) 박종철-이한열 열사에 대해 ‘공권력에 의한 사망사건’을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산발항쟁’이 ‘총력항쟁’으로 전환됐다. 대전환이다. 군중은 서로 팔을 바싹 끼고 종횡대(縱橫隊)로 ‘스크럼(scrum)’을 이었다. 생사(生死)의 연대이며 행렬이었다. 부산뿐 아니라 도시와 향촌 -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펼쳐졌다.

지금은 롯데 타운몰(town-mall)이 있는 ‘옛 부산시청 광장도로’는 ‘6월 항쟁의 중심’이었다. 매일같이 진퇴(進退)가 반복됐다. 항쟁 군중과 경찰의 대치속에 최루탄과 화염병의 공방전이 난무(亂舞)했다.

실제 ‘항쟁의 가투현장’은 살벌하다. 군용차량의 위협도 간단치 않지만, 곳곳에서 최루탄(催淚彈)이 번지는 현장은 바로 전투현장이다. 실제 군생활하면서 ‘모의(模擬)전투 훈련’에 참가했지만, 비교적 생명 위협도는 낮았다. 그런데, ‘6월 항쟁의 현장’은 ‘진짜 살벌하다’는 표현처럼 ‘생사가 오가는 현장’이었다. 마치, 태산명동(泰山鳴動)의 함성이 일어나고, 수시로 폭발음이 터졌다. 그 전투적 분위기는 아직도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남포동 먹자골목과 건어물시장의 ‘골목 체험’은 결코 잊지 못한다. 한창 최루탄 농도가 자갈치 시장과 구덕로에 짙어지면, 군중들은 수시로 또 골목으로 흩어졌다. 진구 서면광장 집회규모도 컸지만, 골목과 건물 마다 '비밀 경찰 정보원'들은 가투상황을 밀착 감시망을 가동했다. 살상(殺傷)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기어 오고가는 도망(逃亡)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런데, 군중들이 골목으로 산개할 때 마다, 시장 상인과 가게 주인들은 ‘맑은 물을 담은 세수대야’를 골목골목 내놓았다. 최루탄의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위현장에선 학생 항쟁대과 함께 직장인, 이른바 넥타이 부대도 합류했다. 골목과 거리는 물론 육교 등에도 시민의 인파가 가득했다. 오직 하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구호 한 목소리를 반복했다.

돌이켜 보면, 최루탄이 터질 때마다, 굳이 표현하면 가까운 남항에서 해풍(海風)이 불었다. 그럴 때 마다, 눈과 코, 그리고 입 등 호흡기가 ‘컥컥한 순간과 상황’이 거듭됐다. 최루탄 가스를 피해 산개(散開)하는 골목골목 마다 자갈치 아지매, 그리고 가게 주인들은 ‘물 담은 세숫대야’를 내놓았다. 그 항쟁의 현장에서 마주한 ‘대야물’은 말 그대로 ‘민주화의 청정수(淸淨水)’가 아닐 수 없다.

6월 항쟁 34주년을 맞은 10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박종철 열사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509호는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다 숨진 조사실이다.
6월 항쟁 34주년을 맞은 10일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박종철 열사의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다. 509호는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다 숨진 조사실이다.

 아시다시피, 세수대야 그 이름과는 달리 세수(洗手)하거나 세면(洗面)는 절대 금물이다. 최루가스가 용해되고 침투해, 더 심각한 질환과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항쟁의 명분’으로 가투(街鬪), 거리투쟁한 체험이 경력은 물론 민주사회 계급장은 더 더욱 아니다. 벌써 34년 전(前) 일이 되었지만, 그만큼 우리사회가 민주사회로 가는 시금석(試金石)을 놓았다. 차라리 '형언할 수 없는 희생'을 토대로 금강대(金剛臺)를 만들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정말이지 ‘혈루신고(血淚辛苦)의 현대사 과정’이 아닐 수 없다.

 30년에 4년을 더해 지난 세월을 다시 살펴보니, 가급적, 아니 기왕이면 시위와 데모(demo)는 물론 항쟁도 없어야 하는 바램이다. 이상론이지만, 그래야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주지하다시피, 민주든 자유든 그 어떤 가치를 부여하더라도, ‘평화(平和)’와 '상호존중'이 전제돼야 가능할 것이다.

 헌법 등 실정법의 취지를 준수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생명(生命)’을 중심으로, 자유(自由)와 민권(民權)이 ‘살아있는 호흡’이 돼야 가능한 일이다.

 6.10항쟁 34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때 '자갈치 아지매'가 마련했던 ‘세숫대야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그 때 '갈매기 소리'가 지금 이 순간 '번개와 같이 이명(耳鳴)'이 되어 반향(反響)을 일으키고 있다. 자갈치 아지매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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