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청바지를 입지 않는다. ‘청바지 입은 꼰대’란 신조어에 감정이입이 돼서다. 어울리지 않는 이 단어의 조합은 절묘하면서 ‘웃프다’(웃기다와 슬프다를 합성한 말). 말만 소통을 앞세우고 본인 스타일을 고수하는 직장 상사를 일컬으며 내 또래 50대를 정조준한다. ‘청바지 입은 꼰대’란 말을 처음 접하고 죽비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든 뒤로 중년남성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본다. 머리가 희끗하고 뱃살이 좀 나와도 자신있게 청바지를 입은 이들이 길거리에 꽤 많다. 밑위 짧은 청바지를 억지로 끌어올린 민망한 패션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몸에 착 붙는 요즘 유행 핏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청바지 복장에서 혁신과 유연함이 아닌 또다른 고리타분함이 묻어난다. 젊음과 저항의 시대정신에 무임승차하려는 욕심이 찢지 않고 실밥만 살짝 푼 ‘적당히 진보적인’ 청바지에 물들어있는 듯 해서다. 미래세대를 위하는 척 하면서 기득권의 장벽을 쌓고 빚부담을 떠넘기는 50대 중심의 사회권력이 오버랩 된다. 진정한 소통보다는 청바지 하나 걸쳐서 ‘탈권위 코스프레’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지나친 편견일까? 패션은 자유니까.

   중년남성의 청바지 패션이 마음 속에서 왜곡돼, 편안한 날에도 청바지에 손이 안가게 된 건 2년 전 ‘조국 사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자녀 입시비리 의혹과 유체이탈 언행으로 불공정과 위선, 내로남불의 아이콘이 되기 전 조국 전 장관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반대였다. 그렇게 온 국민이 깜쪽같이 속은데는 청바지 차림이 큰 몫을 했다. 길쭉한 다리에 허리띠 없이 자연스럽게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자주 포착되면서 일약 '인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가면이 벗겨지고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때 그의 청바지 차림은 금방 ‘꼴 사나움’으로 변해버렸다. 졸지에 ‘청바지 입은 꼰대’의 아이콘이 돼버린 것이다. 요즘은 조국 전 장관 비판의 선봉에 섰던 논객 진중권씨가 ‘청바지 입은 꼰대’의 전형으로 등장해 많은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진중권씨가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30대 이준석씨와 SNS에서 장기간 페미니즘 설전을 벌인 자체로는 좋은 시도였다. 하지만 여성 우대정책 등에 관한 논쟁에 날이 설 때마다 매번 그는 “공부 좀 하라”는 말로 타이르듯 훈계를 해 내면의 ‘꼰대’를 소환해버렸다. 그는 이준석이 당 대표 지지율 1위란 여론조사가 나오자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바보”란 비아냥으로 ‘뒤끝 작렬’을 보여주기도 했다. 20대 나이에 대학생 필독서 ‘미학 오디세이’를 쓴 논객 진중권이야말로 본래 청바지가 상징하는 이미지와 가까운 인물 중 하나인데 그는 그토록 싸잡아 공격했던 586 운동권 정치인들보다 더한 꼰대가 돼버렸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야말로 청바지에 가장 어울리지 않은 말일테니.

    겉으로만 바뀐 척 흉내내는 ‘청바지 입은 꼰대’는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영역에도 존재한다. 특히 여러 정부 정책들이 매우 닮았다. 바꿔 말하면 ‘무늬만 개혁’인거다. 스스로를 ‘촛불 정부’로 선언한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 ‘일자리 혁명’ 등 온갖 개혁 과제를 내세웠지만 4년이 흐른 지금 결과는 참담하다. 아파트값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올랐고, 40시간 이상 '풀타임 일자리'는 사상 최악이다. 두 영역에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공공 주도’는 허상으로 가득하다. 요즘 국민 혈세로 정부와 지자체가 만들어주는 단기적 '알바' 일자리만 늘어났다. 현 정부 4년간 주거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 32만8천호 공급됐지만 85%가 임대 기간이 짧거나 보증금만 지원하는 ‘무늬만 공공주택’이라고 경실련은 주장한다. 젊은이들을 위한다며 최저임금을 너무 급하게 올려 일자리 감소를 부채질한 것은 그야말로 ‘청바지 입은 꼰대짓’의 결정판이었다. 때맞춰 보게된 신문의 명사 인터뷰에서 '경박한 자신감'이란 용어에 꽂혔다. 최진석 전 서강대 교수가 한 얘기다. "지도층이 지적(知的)으로 두툼하지 못하면 감성과 기능으로 세상일을 다 해결할 것 같은 경박한 자신감에 휩싸인다. 지도층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파악해 국민 역량을 모아 ‘시대의 급소’를 잡아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 정권은 무슨 개혁 같은 곁가지에 매달리거나 정치 공학으로 비효율과 국민분열만 낳고 있다[2021. 5. 27 조선일보]" 개인이건 조직이건 ‘꼰대’ 문제는 이 ‘경박한 자신감’에 있다고 나름 정리해 보았다./ 경제산업부 이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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